제2 장 이슬람의 기본개념

신앙(이만)의 개념 (up)

참 하나님의 유일성을 믿고 무함맏을 그분의 마지막 사도로 믿는다고 고백하면 무슬림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완전한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슬람에서의 신앙이란 행복한 상태를 말하며, 이러한 행복은 적극적 행동과 건설적 개념 그리고 역동하는 효과적 수단에 의해 획득된다.

성꾸란과 무함맏의 관습(전통)이 이러한 요구 수단을 규정하고 의미 있는 신앙을 구축하는 기준을 확립한다. 따라서 진실한 신자는 :

1.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과 꾸란으로 완결되는 경전들과 무함맏을 마지막으로 하는 사도들과 최후 심판일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식과 지혜를 믿는다.

2.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확고부동하게 신뢰한다.

3.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부와 생명과 건강과 지식과 경험 등을 하나님을 위해 베푼다.

4. 주집회(週集會)와 일상 예배를 제 때에 준행(準行)한다.

5. 종교세(자선 혹은 자카)를 정당한 수혜자(개인이나 기관)에게 지불한다. 종교세의 최소한도는 연 순수입 혹은 투자한 경우 증권 총가액에서 모든 비용과 채무를 공제한 나머지 2.5%이다.

6. 의와 선을 명하고 불의와 악에 대하여는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 마음대로 맞서 싸운다.

7.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 무함맏에게 복종하여, 꾸란이 낭송되면 신앙심이 고조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들리면 마음이 겸손해짐을 느낀다.

8.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극진히 사랑하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동료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9. 원근(遠近)의 이웃을 사랑하고, 손님 특히 낯선 사람에게 진심 어린 친절을 베푼다.

10. 진실을 말하고, 건전한 대화에 끼거나, 아니면 말을 삼간다.

분명히 신앙의 이런 의미에 의한다면, 이슬람은 생활의 모든 측면으로 깊숙이 그리고 건설적으로 스며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에 의하면 진실한 신앙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운명과 개인적, 사회적 행동 그리고 정치행위와 재정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다음에 몇 가지 실례를 들어 꾸란이 진실한 신자를 가리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기로 한다. 꾸란에는 이런 종류의 언급이 많다:

진실한 신자는 이러하니 곧 하나님 얘기가 나오면 복종심이 우러나오고, 마음이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계시가 낭송되면 신앙심이 고조되고 굳세어 지느니라.

또 주를 신뢰하고 (명을 받은 대로)예배를 준행하며, 우리가 부여해 준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베푸나니 이들이야말로 진실한 신자이니라.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높은 명예와 풍성한 마련이 있느니라. (꾸란8:2-4)

진실한 신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서로를 보호해 주는 (결연한)친구들이니라. 저들은 의를 명하고 악을 금하며 예배를 준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베풀 것을 베풀며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에게 복종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니 진실로 하나님은 강하고 지혜로우시도다. 하나님께서는 남녀 신자 모두에게 아래로 강이 흐르는 동산의 거처와 영원한 행복의 동산 속의 아름다운 저택을 약속하시느라.

그러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의 선한 기뻐하심이니, 그것이야말로 지고한 행복이니라(꾸란, 9:71-72)

진실한 신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무함맏)를 믿되, 돌아서서 의심하지 않고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나니 이러한 사람이라야 진실하다 할 수 있느니라(꾸란, 49:15) 이러한 꾸란의 언급 말고도 여기에 관련된 무함맏의 전승도 적지 않다. 무함맏의 말씀을 예로 들어본다.

너희 중 누구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동료신자에게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없느니라

세 가지 성품이 건전한 신앙의 징표를 이루는데, 이러한 성품을 가진 사람만이 신앙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1)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이며 (2)같은 인간을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하며 (3)마치 불 속에 던져지기라도 하듯 발분(發憤)하여 불신으로 돌아서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최후 심판일을 믿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금지되며, 손님 특히 낯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며, 진실을 말하든지 아니면 말을 삼가야 한다. 위의 인용 예와 유사한 꾸란의 구절과 관습은 많이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은 아랍어 원전에 나오는 꾸란과 무함맏의 말씀 그대로는 아니며,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학식과 재능을 갖춘 사람이 해석을 내린다 하더라도, 다른 언어로 꾸란의 영적인 힘과 마음을 끄는 활력은 결코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꾸란은-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흉내낼 수 없으며 인간의 상상력과 재현능력을 초월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까지 무함맏의 관습도 꾸란과 마찬가지다. 꾸란 다음으로 무함맏의 말씀은 가장 결정적이고 웅변적이기 때문이다.

정의(正義:비르)의 개념 (up)

이슬람은 항상 피상적 개념과 겉치레만의 의식을 경계하며, 무미건조한 정식 절차와 효력 없는 신념을 경계한다. 꾸란의 대표적인 한 구절에서 하나님은 정의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신다. (예배 중에)고개를 동쪽이나 서쪽으로 돌리는 것은 의가 아니니라. 의는 곧 이것이니 하나님과 마지막 날과 천사들과 경전과 사도들을 믿는 것이요, 너의 재물-비록 아끼는 것이라 하더라도-을 친척과 고아와 궁핍한 자와 나그네와 간청하는 사람과 노예의 속전(贖錢)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며 예배를 착실히 보고 때맞추어 자선을 하는 것이요, 계약을 이행하며, 고통과 역경 속에서 그리고 공포가 밀려와도 내내 동요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사람이 진실하고 하나님을 염원하는 사람이니라(꾸란, 2:177)

여기 인용한 꾸란 구절에 의로운 사람이 아름답고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정의로운 사람은 모두 유익한 규칙에 복종하고, 진지한 동기에서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여 동료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다음에 4개 강령을 제시한다 : (1) 우리의 신앙은 진실하고 진지해야 하며, (2) 같은 인간에게 자선과 친절을 베풀어 우리의 신앙심을 보일 각오가 서 있어야 하며, (3) 자선단체와 사회기관을 후원하여 선량한 시민이 되어야 하며 (4) 어떤 상황에 처해서는 태연자약해야 한다.

그러므로 분명히 정의는 결코 실속 없는 말만으로는 서지 않는다. 정의는 굳센 신앙과 실천 위에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고 생활의 내면과 외면으로, 공사의 모든 문제로 확대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정의와 원칙이 서게 되면, 개인에겐 항상 평온이 깃들고, 사회는 각 방면에서 안정을 누리며 국가는 결속되고 국제 사회에는 희망과 조화가 넘칠 것이다.

사람들의 개념에 맞게 정의를 실천한다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평화롭고 대의명분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마음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피지배자의 깊은 관심을 덜고 착취당하는 자의 고통을 줄이며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의 궁핍한 처지를 돌보는 것보다 더 인도적인 일은 무엇인가?

약속을 이행하고 양심을 깨끗이 보존하며, 성실성을 지키는 것보다 더 정연(整然)하고 정직한 일은 무엇인가?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어김없이 행하는 것보다 더 정신적인 기쁨을 주는 일이 또 있겠는가?

경건(敬虔:따끄와)의 개념 (up)

  신앙과 정의에 대해 말한 내용이 대개는 경건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경건 역시 편의상 요구하는 것이 아니며 입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도 아니다. 이보다 한층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꾸란이 우리의 최선의 전거(典據)인 바, 꾸란은 경건한 사람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바)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예배에 철저하며 우리가 마련해 준 것을 베풀면서 무함맏에게 보낸 계시와 네 이전에 보낸 계시를 믿고, (마음속으로)내세를 확신하느니라, 이들은 주님의 올바른 인도를 따르나니 바로 이들이 번영을 누릴 자들이니라.(꾸란, 2:3-5)

경건한 사람은 유복할 때나 어려울 때나 (하나님을 위하여 아낌없이)베풀며 분노를 참고(모든)사람을 용서하여 주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사람과-부끄러운 일을 했거나 스스로 그 영혼을 욕되게 했을지라도-진정으로 하나님을 염원하고, 용서를 빌며-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으리요?-결코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자기가 저지른 (악)을 고의로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심이라, 이들에게 주께서는 용서로 보상하시며, 아래에 강이 흐르는 동산을 상으로 주어 영원히 거하게 하느니라.

힘써 (노력하는)사람들에게 정녕 훌륭한 보상이 아닌가! (꾸란, 3:134-136) 여기 인용한 꾸란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경건하려면 하나님과 생의 진리를 파악함으로써 지성을 선용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베풀어줌으로써 부를 선용하며, 예배를 준행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적·신체적 능력을 선용해야 한다.

경건은 또한 분노와 감정에 대한 고도한 자제력과 용서하고 인내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과 그리고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께 돌아서게 해야겠다는 의지적 행동을 요청한다. 경건하다는 것은 곧 올바르고 훌륭한 확신을 보지(保持)하고 결단력과 인격을 갖추며 의지와 용기를 겸비한 사람이 됨을 뜻하며 특히 하나님의 사람이 됨을 뜻한다. 경건과 정의와 의미 있는 신앙은 상호관련 되어 하나의 길로 통하게 된다.

즉 이들 모두는 이슬람으로 인도하여 진정한 무슬림을 만들어 낸다.

예언자 지위의 개념(up)

자비로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민족마다 하나 이상의 예언자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예언자 모두는 훌륭한 인격과 드높은 명예(위엄)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택하고 예비시켜 당신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하게 하셨다. 그들의 정직성과 진실성 그리고 지성과 성실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법을 범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이들에게는 과오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인간이었기에 인간사를 해결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본의 아니게 실책을 범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의 개인적 판단이 반드시 옳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강한 유대가 있음을 명백히 시현(示顯)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개선의 의지가 있고, 선한 기질이 다분히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언자 지위를 둔 목적은 인간이 이미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는 것을 확인시키고, 그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알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데 있다. 또한 인간에게 도움을 베풀어 하나님의 정로를 찾고, 의를 행하고 악을 피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예언자 지위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그 피조물을 올바른 신념과 행동으로 이끌고자 하는 그 분의 의지를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 그것은 또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부가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에게 올바른 인도를 베풀고, 다음에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를 발하고 있는 데도 사람이 자기 악행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의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인간이 주님께 책임을 질만한 가치와 능력에 완전히 부합한다. 예언자직의 근원과 모든 예언자들의 후원자는 하나로서 동일하니 곧 하나님이 이에 해당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인간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신성한 가르침을 알게 하여 진리와 선을 확립하고 도움을 베풀어, 자기 존재의 진정한 목적을 실현하게 하며, 목적이 있는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 이들 예언자의 목적이다. 무슬림이 예언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이들의 가르침을 일관성 있고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바탕에서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무슬림은 하나님의 모든 경전을 믿고 앞서 말한 모든 예언자들을 받아들인다.

생명(生命)의 개념 (up)

생명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찬란한 전시이며 그분의 기술과 능력의 생생한 반영이다. 그분은 생명의 수여자요, 창조자이시다. 그 무엇도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은 없으며 그 누구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창조해 내지 못한다. 생명은 귀하고 소중한 재산이며,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생명을 잃어버리는 쪽을 택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망에 빠진 나머지, 서서히 자신을 죽여, 생명을 버리는 사람들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다시 살아 날려고 애쓰며 재생의 기회를 잡고 싶어한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므로, 그것을 도로 찾을 정당한 권리를 가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살생의 권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이 자살과 자멸을 어떤 경우에도 금하며 귀중한 영혼이 떠날 때, 인내와 강한 신앙을 권하는 소이(所以)이다. 살인자가 처형을 당할 때는, 하나님의 권리와 그 분의 법에 따라 그의 생명이 제거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면서 공연히 독특한 자질과 뛰어난 능력을 부여한 것이 아니며, 부질없이 어떤 의무를 부과한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생의 목적을 이루고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창조적 삶의 기술을 터득하여 삶의 진미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신탁물이며 인간은 그 수탁자로서 하나님을 염두해 두고 그 분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여 그 신탁물을 정직하고 요령 있게 다루어야 한다.

생명은 어떤 지점에서 출발하여 어떤 목적에서 끝나는 여행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생명은 일종의 과도계단(過渡階段)이며 내세의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인간은 이 여행을 하는 여행자이며, 오직 내세의 생명에 이로운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여 충분히 준비를 갖추고 순간 순간을 영원을 향하여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의 생명을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로 삼아 될 수 있는 한 생을 가장 보람있게 보내야 하는 것이다. 떠날 때가 오면 단 한 시도 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명이 다하면 때는 이미 늦어 어떻게 하더라도 그것을 늘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을 가장 보람있게 보낸다 함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며, 그 생이 미래의 영생에 이르는 안전한 통로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하므로 이슬람은 규정과 원칙의 완전한 체계를 세워 인간에게 살아가는 방식을 제시해 주고 취할 것과 버릴 것 그리고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 등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그분께로 돌아갈 것은 뻔하다. 예언자 무함맏은 현명하게도 자신의 포괄적인 언명 가운데 하나에서, 사람에게 스스로 이생의 객이요, 세상을 스쳐 가는 나그네로 하라고 충고한다.

종교의 개념 (up)

종교는 역사의 전개 속에서 악용되었으며 오해를 받아 왔다. 종교가 착취와 압제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편견과 박해의 구실이 되는가 하면 엘리트와 대중에 대한 권력과 지배의 근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종교라는 미명하에 부당한 전쟁이 펼쳐졌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억압되었으며 과학이 박해를 당하고 개인의 자아 완성의 권리가 박탈되는가 하면 개인의 존엄과 명예가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또 종교라는 미명하에 인류에게 불의를 강요하여 종교 자체가 많은 타격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현실이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종교 본연의 기능이며 종교를 다루는 올바른 방법인가?

이것이 종교의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연코 "아니다"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저마다 유일한 참종교라고 자처한다. 종교마다 사람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서로 모순하여, 한 분이신 자애로운 세계의 하나님 아래 인류를 범세계적인 형제애로 결속시키기는커녕, 사람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고 종교에 대한 거센 반발만을 초래하였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을 주시해 본 사람은 누구나 당황하게 마련이며, 필시 종교라면 어디서나 다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최광의로 본 이슬람의 종교의 개념은 독특하다. 참종교는 인류를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성과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고금을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개념은 한가지 결론을 유도하니 곧 한 분이신 같은 하나님에게서 비롯하여 항존(恒存)하는 미해결의 인간 문제를 처리하는 참종교는 오직 하나라는 것이다. 이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예언자 무함맏만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는 달리 무함맏 이전의 모든 예언자들도 모두 이슬람을 가르쳤으며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하여 예수와 나머지 예언자들의 진실한 추종자들은 무슬림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하나님의 범세계적인 참종교로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한 분으로 변함없으며, 시간과 공간, 종족과 언어 그리고 그 밖에 어떤 다른 요인이 작용하더라도 이에 관계없이 인간성과 인간의 기본 욕구가 근본적으로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로 하여 이슬람의 개념은, 종교는 영적, 지적, 필요물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것임을 단언한다. 인간을 미혹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도하려는 것이며 인간을 격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성을 향상시키려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박탈하고 그에게 짐을 지우거나 그 자질을 억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사고와 올바른 행동의 무진장한 보물을 그 앞에 펼쳐 보이려는 것이다. 좁은 테두리에 그를 가두려 함이 아니요, 진리와 선의 광활한 지평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참종교는 인간에게 하나님과 자기자신과 세계를 알게 하는데 그 참뜻이 있는 것이다. 종교의 기능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의미를 풀어 보면 이렇다.

참종교의 목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종교가 인간의 정신적 요구와 적당한 육체적 요구를 만족시켜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심리적 매듭과 강박관념을 풀어 주며 본능과 열망을 순화시키고 욕망과 인생 행로로 전체를 훈련한다. 세계 최상의 진리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켜 준다.

인간에게 생명의 신비와 인간성과 이들을 다루는 방법과 선과 악 그리고 의와 불의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다. 악을 제거하여 영혼을 정좌시키며 마음에서 의혹을 말끔히 가시게 하며 인격을 강화시키고 인간의 사고와 신념을 바로 잡아 준다.

이 모든 것의 실현은 사람이 종교가 제시하는 정신적 의무와 육체적 규정을 충실히 지킬 때만 가능하다.

한편 참종교는 인간을 교육하고 단련시켜, 희망과 인내심을 가지게 하며, 진실과 정직을 지키게 하고 의와 선을 사랑하게 하며, 용기와 참을성을 배양시킨다. 이 모든 것이 우수한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또한 참종교는 두려움과 영적인 피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며, 하나님의 도움과 끊을 수 없는 유대를 인간에게 보장해 준다. 인간에게 평온과 안정을 주고 그의 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참종교가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며 또한 이슬람에서의 종교의 개념이다. 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종교는 어느 것이든 이슬람이 아니다. 아니 아예 종교도 아니다.

또 종교로부터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심도 하나님을 염원하는 마음도 없는 것이다. 다음에 제시하는 성 꾸란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옳다: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종교는 이슬람이니 성서의 백성들도 지식이 저들에게 이른 이후로는 서로 시기하지 않는 한 거기에 반대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표징을 부인한다면, 하나님께서 속히 책임을 물으시리라, (꾸란, 3:19)

그리고 누구든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를 원한다면, 그것이 결코 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니와 내세에서는 (모든 영적 유익을)상실한 자들의 대열에 서게 되리라 (꾸란, 3:85)

죄의 개념 (up)

인간 존재를 괴롭히는 근본 문제 중의 하나는 세상의 죄와 악이다. 에덴 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이브에게서 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다. 그 사건의 결과 타락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인류는 죄와 치욕의 낙인이 찍히고 혼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 전반에 대해 이슬람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독특하다. 우리가 아는 어떤 종교도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꾸란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에덴 동산에 거하며, 에덴에서 나는 것을 마음껏 즐겼으며, 풍부한 양식과 안락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해악과 불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 특정한 나무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런데 사탄이 간계로 이들을 유혹하여 이들이 누리던 즐거운 상태를 앗아가 버렸다. 에덴에서 쫓겨난 이들은 땅으로 유배당하여, 이 땅에서 살다가 이 땅에서 죽어 마침내는 땅에서 다시 일으켜져 최후의 심판을 받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수치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베푸셨다. (꾸란 2:35-38, 7:19-25, 20:117-123)

이 상징적 사건이 계시하고 있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은 인간이 낙원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불완전하며 미흡한 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처럼 죄를 짖거나 과오를 범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인간의 마음이 무디어져 영적인 개선이 안 되고, 도덕적 성장이 정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충분한 감수성이 있어 자기의 죄와 결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디로 돌아가야 하며 누구에게 인도를 구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더 한층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움을 구하는 자들의 진지한 요청에 언제라도 기꺼이 응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워낙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시기에 용서하시되 여지를 남기지 않으며 자비를 베푸시되 빠짐이 없게 하신다.(꾸란, 7:156) 이 사건이 마지막으로 계시하는 한 가지는 성(性)에 의한 차별과 유전죄라는 것이 이슬람의 정신에 맞지 않다는 사실이다.

원죄 혹은 유전죄의 개념은 이슬람의 가르침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 꾸란(30:30)과 예언자에 의하면 인간은 피뜨르, 혹은 순수의 자연상태, 곧 하나님의 뜻과 법에 복종한다는 의미의 이슬람의 상태에서 태어난다. 사람이 출생 후에 어떻게 되든 그것은 외부의 영향을 받고 여러 요인이 간섭해서 생긴 결과이다. 현대적 사고 방식을 빌어 말한다면 인간성이 순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회화 과정이 인성의 형성과 도덕성의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고 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부인되거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전죄 혹은 본능적 죄의 무거운 짐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定議)에 의하면 공정하고 자비롭고 자애로우시며 완전하시다. 그 분은 자신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셨다. (꾸란, 15:29, 32:9, 66:12) 하나님은 절대적인 무한의 선이시며, 그분의 영은 절대로 완전한 것이므로, 또한 인간은 창조되면서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인간에게는 적어도 창조주의 이러한 선한 영의 일부나마 있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의 선한 기질과 영적 열망이 설명된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을 숭배하도록 창조하셨지, 그분과 대등한 경쟁자로, 그분의 선의 완전한 화신, 절대적 권화(權化)가 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한 힘으로 아무리 선하고 완전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과 완전성에는 미칠 수 없음을 뜻한다. 과연 인간에게 이런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은 한정되어 있으며 인간의 유한성과 능력과 책임에 맞춰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불완전하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과오를 범한다는 것이 곧 죄에 상당하거나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적어도 이슬람에서는 그렇다-인간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결점의 제물이 되도록 도움 없이 방치해 두시지는 않는다. 인간은 계시에 의해 권능을 받고 이성의 후원을 받으며, 선택의 자유에 의해 강화되고 상대적 완전성을 추구·성취할 수 있는 갖가지의 사회적, 심리적 성향의 인도를 받는다. 선과 악의 힘 사이에 작용하는 부단한 인력(引力), 곧 삶의 투쟁이다. 이러한 인력(引力)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을 기대하고 이상을 추구하며 업적을 이루고 역할을 수정해 나가게 한다. 생을 단조롭게 정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흥미진진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인력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영적, 도덕적 승리를 쟁취해 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슬람의 윤리적 범주에 의하면 인간이 불완전하거나 잘못을 범하는 것은 죄에 들지 않는 다. 이것은 유한하고 한정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성의 일부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완전해질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있는데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다. 죄는 행위와 사고와 의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1) 고의적이며, (2) 하나님의 명백한 법을 무시하며 (3) 하나님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며 (4) 영혼과 육체에 유해하며, (5) 되풀이 저질러지며 (6) 정상 상태에서는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범죄의 구성요건인 바, 타고나거나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범죄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경건과 선의 능력보다 더 크지는 않다. 선의 잠재력이 아니라 죄의 잠재력을 행사하게 되면, 자신의 순수성에 새로운 외부적 요인이 더해지게 될 것이다. 인간은 오직 이렇게 더해진 외부적 요인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이슬람에서는 크고 작은 죄들이 있어 하나님에 대한 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범하는 죄도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죄는 하나만 빼 놓고, 죄를 진 사람이 진지하게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꾸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정녕코 쉬르크의 죄(다신론, 범신론, 삼위일체설 등)는 용서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은 나머지 다른 죄는 용서하시며 당신이 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하여 주신다. 그러나 다신론자와 무신론자도 하나님께로 돌아선다면 그의 죄는 용서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죄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거나 응분의 보상과 처벌, 혹은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이루어져야 용서가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죄는 생득적(生得的)인 것이 아니며, 어쩌다 저질러지는 것이지 천성적으로 몸에 밴 게 아니며 피할 수 있는 것이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법을 의식하면서 고의적으로 어기는 것이 곧 죄인 것이다. 타고난 본능이나 억제가 절대 불가능한 욕구와 제어할 수 없는 충동 때문에 어떤 일을 저지를 것이 분명하다면 이러한 행위는 이슬람에서는 죄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무의미해지고 인간의 책임은 무위로 끝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실현성이 있고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 있는 것만을 요구하신다.

자유의 개념(up)

자유는 하나의 개념과 가치로서 많은 개인과 집단과 민족에게 그 권리가 부인되었다. 오해와 악용의 사례도 자주 있었다. 사실은 사람이 사는 사회라면 어느 곳이나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 사회가 일단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어떤 식으로든지 어느 정도의 제한이 가해져야 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슬람은 자유를 가르치고 자유를 소중히 여기며 비무슬림은 물론 무슬림에게도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자유 개념은 각계 각층에서 사람이 하는 모든 자발적 활동에 적용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피뜨라 혹은 순수한 자연상태에서 자유롭게 태어난다. 이것은 예속과 죄와 유전적 열등함과 인습적 장애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태어남을 뜻한다. 인간의 자유권은 그가 하나님의 법을 고의적으로 범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모독하지 않는 한 신성하다.

이슬람이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명한 생활지침 속에는 심오한 지적 노력과 부단히 지켜야 할 영적 관습과 구속력 있는 도덕적 원칙 그리고 음식에 관한 금기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이 이런 생활지침을 독실하게 따른다면, 자유와 해방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게 될 것이다. 신앙과 양심과 숭배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꾸란의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

종교를 강요하지 말지니라, 진리는 오류와 뚜렷이 구별되나니, 누구든지 악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 가장 튼튼한 끈을 잡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들으심이라.(꾸란, 2:256)

이슬람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종교란 신념과 의지와 참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힘으로 강제하면 무의미해진다. 더욱이 이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기회의 형태로 제시하며, 사람이 스스로 길을 결정할 수 있도록 선택의 자유를 준다. 꾸란의 말씀은 이러하다 :

진리는 너의 주께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니, 믿기 원하면 믿게 하고 믿기를 원치 않으면 믿지 않게 버려 두라.(꾸란, 18:29)

이슬람의 자유개념은 신조의 하나이며 최고의 창조주께서 내린 엄한 명령이다. 이 자유개념은 다음의 제 기본원칙 위에 세워진다. 첫째, 인간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한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사람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며, 그 자신만이 자기가 이룬 업적을 거두어들일 권리를 가진다. 셋째, 인간에게는 충분한 영적 인도가 베풀어지며, 책임을 지고 건전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합리적 자질이 부여된다. 이러한 것이 이슬람의 자유개념의 기초요, 이슬람의 자유의 가치다. 그것은 천부인권이요 영적인 특권이며 도덕적 특권인 동시에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의무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자유 개념의 체계 속에는 종교적 박해와 계급 투쟁 혹은 인종적 편견의 여지가 없다. 개인의 자유권은 그의 생존권만큼이나 신성하다. 자유는 생명 그 자체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평등의 개념(up)

이슬람의 가치 체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 하나는 평등의 원칙이다. 형평의 원칙이라는 말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평등의 가치를 획일성이나 스테레오 타이프로 오인하거나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지만 반드시 똑같지 만은 않다는 것이 이슬람의 가르침이다. 능력, 잠재력, 의욕 그리고 재산 등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자체만으로 한 사람이나 종족이 다른 사람이나 종족보다 우월한 지위를 점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혈족, 피부색, 가지고 있는 재산의 양, 그리고 누리는 특권의 정도는 하나님에 관한 한, 개인의 인격과 사람됨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영적 우수성의 기준이다. 꾸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

오 인류여! 진실로 우리가 너희를 한 쌍의 남자와 여자에게서 창조하여 너희로 민족과 부족이 되게 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서로 알게 하려함이라. 정녕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희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는 가장 의로운 자이니라.(꾸란, 49:13)

인종과 피부색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는 우연적인 것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됨의 진정한 크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평등의 가치는 단순 헌법상의 권리나 신사협정 혹은 생색내는 자선으로 실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슬림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고수해야 하는 신조다. 이러한 이슬람의 평등의 가치 토대는 이슬람의 체계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평등의 가치는 다음의 기본 원칙에서 나온다. (1) 모든 사람은 만유의 최고 주이신, 유일한 영원불변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2) 모든 사람은 인류로서 같은 종(種)에 속하며 똑같이 한 부모,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다. (3)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게 공정하시고 친절하시다. 그분은 특정 종족이나 연령 혹은 종교에 치우치시지 않는다. 우주 전체가 그분의 지배 영역이며 모든 사람이 그분의 피조물이다. (4)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빈손으로 온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며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5) 하나님은 각 사람들 그 자신의 공과를 근거로 그 자신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 (6)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명예와 존엄을 누릴 권리를 부여하신다.

이러한 것은 이슬람의 평등의 가치 배후에 있는 원칙의 일부다. 이러한 개념을 충분히 구체화시키게 되면 편견이나 박해의 여지가 없어질 것이다. 또 이런 하나님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면, 압박이나 억압의 소지가 사라질 것이다. 선민이니 이방인이니 하는 식의 개념, 특권 받은 민족이냐 저주받은 민족이냐 하는 말들 그리고 사회적 특권층이나 이등 시민이니 하는 표현들이 모두 의미를 잃고 사장되어 버릴 것이다.

형제애의 개념 (up)

  이슬람의 가치 체계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기본 요소는 인간은 모두 한 형제라는 형제애의 가치다. 이 가치 역시 자유와 평등을 다룰 때 논한 것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한다. 전술한 바, 이러한 제 원칙뿐 아니라 이슬람의 형제애는 숭배 받으시는 분인 하나님의 유일성과 보편성 숭배자인 인류의 통일성 그리고 숭배의 매개체인 종교의 통일성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에 기초한다. 무슬림에게 있어 하나님은 유일하고 영원하고 보편적인 분이시다. 그분은 만인의 창조주요 만인의 부양자이시며, 만인의 재판관이고 만인의 주이시다. 사회적 지위와 민족적 우수성 그리고 어느 인종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그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분 앞에 만인은 평등하며 서로의 형제이다.

무슬림은 창조의 근원과 원래의 조상과 최종 운명이 같다는 의미에서 인류의 통일성을 믿는다. 창조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다. 첫 조상은 하나로서 같으니 곧 아담과 이브이다. 모든 인간은 이 첫 조상의 후손으로서 같은 부모를 가진다. 무슬림은 최종운명이, 모든 인간이 결국은 돌아가야 할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슬림은 하나님의 종교의 통일성을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교를 한정시키거나 특정 민족이나 종족 혹은 연령을 편애하시지 않음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을 올바로 해석하면 우월한 체한다든지 주제를 모르고 남을 배척하는 일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신 속에 자리잡을 때 사람은 모두 한 형제라는 형제애의 개념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그 형제애의 바탕이 튼튼하게 될 것이다. 무슬림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인류의 통일성 그리고 종교의 통일성을 믿기에 하나님의 모든 사도와 계시를 차별 없이 믿는다.

평화의 개념 (up)

 

이슬람의 몇 가지 기본적 사항을 살펴보게 되면, 이슬람이 평화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평화와 이슬람은 같은 어근에서 파생하며 동의어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명칭 가운데 하나가 평화다. 모든 무슬림이 일상 예배를 끝내며 하는 말은 평화의 말이다. 무슬림이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는 인사는 평화다. 무슬림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도 평화라는 말이다. 형용사로서의 "무슬림"은 어떤 의미에서는 평화롭다는 것을 뜻한다. 이슬람에서의 천국의 평화의 거처다.

이처럼 이슬람에서는 평화의 주제가 근본적이고 지배적인 것이다. 이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자기자신, 그리고 같은 인간들과 평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모든 가치를 받아들이고 우주 속의 인간에게 합당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훌륭한 신앙과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정녕 우리의 세계를 개선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며, 평등을 이루고 세계적 형제애를 누리며 지속적인 평화를 구축하게 될 것이다.

공동체의 개념(up)

  공동체라는 말은 몇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 중의 어떤 것은 낭만적이고 고향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 또 어떤 것은 경멸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근본을 따져보려는 것인 만큼, 공동체라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논하는데 그치기로 한다.

한 가지 기본적 의미에서 본 공동체의 개념은 "고도의 대인적 친밀감, 감정적 깊이, 도덕적 약속, 사회적 결속, 그리고 시간적 계속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모든 형태의 관계를 뜻한다.…이러한 공동체는 지연, 종교, 민족, 종족, 직업 혹은(공통의 목적을 가진 집단)속에서 발견된다. 그 원형이 …가족이다."(Nisbet 47-8면)

또 다른 기본적 의미에서의 공동체는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주로 하는 포괄적 집단이다: (1) 공동체는 개인이 그 안에서 자기에게 중요한 활동의 대부분을 전개하고 경험을 획득하는 집단이다. (2) 이 집단은 공유된 귀속감과 일체감에 의해 결속된다.(Broom & Selznick, 31면)

공동체라는 친밀하고 깊은 도덕적 관계로부터 대중사회라는 몰인간적(沒人間的)이고 형식적인 공리주의 관계로 전이(轉移)해 나아가는 것이 역사의 주된 흐름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갖가지 양상 속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파급적 결과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보고,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역사적 진전은 전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오로지 긍정적이고 건설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동시에 긍정적인 결과는 사람에 따라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다르다. 둘째, 현대사회는 결코 완전하지 못하며, 헤쳐 나가야 할 커다란 과업이 가로 놓여 있다. 셋째, 인간조건은 목적이 상실된 것도, 희망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위기와 진통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전혀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끝으로, 인류의 상호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으며, 인간사회는 더욱 더 복잡하게 얽혀졌다.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반드시 나머지 다른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슬람의 공동체 개념을 논한다.

이슬람의 공동체 개념이 고유의 특징을 가진다는 말은 대체로 보아 틀림이 없다. 이러한 고유의 특징은 공동체의 기반, 그것이 역사적 목적, 다른 공동체 사이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 그 주체성과 계속성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슬람에서의 공동체는 인종, 국적, 지연, 직업, 친족 관계 혹은 특별한 이해 관계를 터전으로 하여 세워지는 게 아니다. 어떤 지도자나 창설자 혹은 사건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부여되지도 않는다. 국경이나 정치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이슬람의 공동체다. 이슬람에서의 공동체의 기초는 하나의 원칙으로서 이러한 원칙은 알라의 뜻에 복종하고, 그분의 법에 순종하며 그분의 대의에 기여함을 그 내용으로 한다. 요컨대, 이슬람의 공동체는 그것이 이슬람에 의해 육성 촉진될 경우에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의 공동체는 단순한 생존이나 권력지향, 종족번식이나 생리적 연속성을 초월하는 역사적 사명을 지닌다. 이러한 사명을 성 꾸란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너희 가운데 공동체(혹은 움마)를 두어 선을 널리 펴며, 의를 내세우고, 악을 근절시킬지니라, 이리하여야 형통하리라(꾸란, 3:104)

일찍이 너희보다 더 훌륭한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았나니 너희는 의를 시행하고 악과 싸우며 알라를 믿을지니라(꾸란, 3:110)

이슬람 공동체의 역사적 소임은 미덕과 건전성과 고결성의 진정한 구현체가 되는 것이다. 이슬람다운 공동체는 선의 빈틈없는 수호자요 악의 철저한 적이다. 공동체 일반에 요구되는 것이 그 공동체의 구성원 개개인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이며 각 개인은 저마다 알라에게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무슬림 개개인의 소임은 예언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대 중 누구든지 악한 일을 보거든 행동으로 그것을 바로잡아 나가야 하느니라. 그래도 안 되면 말로 고쳐야 하며, 그래도 안 되면 거부와 비난의 감정을 격하게 할지니, 이것이 신앙의 최소 한도이니라.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규정은 매우 의미 심장하고 포괄적인 것이다. (대중)매체가 혁명을 일으키는 이 시대에,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일치된 행동의 힘이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말의 힘, 혹은 감정의 힘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슬람 공동체의 역사적 소임은 꾸란 구절에 다음 같이 부연되고 있다. 우리가 너희를 중앙의 민족, 뭉쳐진 공동체, 균형 잡힌 움마로 만들었나니, 이는 너희가 다른 민족에게 증인이 되고 사도가 너희에게 증인이 되게 하려 함이다. (꾸란, 2:143)

이러한 증거의 소임은 지극히 의미 심장한 동시에 그 요청하는 바가 자못 심각하다. 그것은 이슬람의 공동체가 모범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슬람의 공동체는 행위의 최고 기준을 설정하고 타의 준거가 되어야 한다. 극단과 사치와 정체적 경직성과 즉각적인 증발을 피해야 한다. 행동에 중용을 취하고, 확고부동하게 일관성을 유지하고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지를 알며 원칙을 세우되, 융통성을 견지하는 것이 아마 인간성과 사회의 생존력을 판가름하는 가장 어려운 시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슬람 공동체의 소임이며 무슬림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평가 기준에 의해서 무슬림의 공동체가 인간이 지금까지 발전시킨 최선의 공동체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슬람 공동체의 정체성(正體性)은 일관성 있는 균형, 모범적 행위, 목적의 통일성, 감정의 상호성 결속과 형평의 제원칙을 그 중심내용으로 한다. 꾸란과 순나에는 이런 취지의 언급이 많다.(예 꾸란, 4:135, 21:92, 25:52)

이슬람 공동체의 계속성에 관하여는 몇 가지 점이 주목된다. 자기가 가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이런 계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무슬림의 의무이다. 혼인과 상속에 관한 규정, 자카와 핫즈의 의무, 친족의 상호권리와 의무, 개인의 양심, 사회적 귀속, 이 모든 것이 이슬람 공동체의 건전한 계속성을 지향한다. 한편 알라께서는 몇 가지 방법에 의해 이러한 계속성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셨다.

첫째, 그분은 꾸란을 보존하고 그 순수성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셨다.(꾸란 15:9) 이것은 꾸란을 신봉하는 공동체가 항존(恒存)할 것임을 뜻한다. 다른 경전의 신봉자들은 있는데 꾸란의 신봉자가 없는 경우는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둘째, 이슬람 자체가 하나의 연속체다. 한민족이 알라의 길에서 일탈할 때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을 재다짐하고, 당신의 진리를 재확인하였으며 새로운 예언자나 개혁자를 임명하여 이를 계속하게 하였다.

셋째, 알라께서는 만약 무슬림들이 정로를 버린다면 실패하게 될 것이며, 실패한 무슬림들은 이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대체하실 것이라는 취지로 엄히 경고하셨다.(꾸란, 47:38)

또 신자들에게는 경고하시되 만약 신자들 중 누구라도 자신의 신앙을 등진다면 하나님께서는 속히 저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신자들에게 겸손하고 불신자들에 대해 꿋꿋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고 수치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사람들을 만들어 내겠다고 하셨다.(꾸란, 5:57)

윤리(倫理)의 개념 (up)

이슬람에서의 윤리의 개념은 몇 가지 기본적 신념과 그 핵으로 한다. 이런 신념과 원칙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모든 선과 진리와 미의 창조주로 근원이시다.

(2) 인간은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존엄하고 명예로운 창조주의 대리자이다.

(3)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만물이 인류에게 봉사하게 하셨다.

(4)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시기에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을 기대하지 않으시며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지도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의 진미를 즐기는 것을 금하시지 않는다.

(5) 중용과 실천성과 균형이, 드높은 고결성과 건전한 윤리성을 보증한다.

(6) 원칙적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나, 다만 의무로 규정된 것은 이를 지켜야 하며, 금기로 규정된 것은 이를 피해야 한다.

(7)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지며, 인간 최고의 목적은 창조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윤리의 차원은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이슬람의 윤리는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다른 인간, 그리고 인간과 우주를 이루는 제요소와 피조물, 인간과 그 자신의 심층자아의 관계를 규율한다. 무슬림은 외부에 대한 행동을 경계하고, 분명히 드러나는 행위와 말과 생각과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무슬림의 소임은 의를 옹호하고 악과 싸우며, 진리를 추구하고 거짓을 버리며, 아름다움과 건전성을 소중히 하고 무례를 피하는 것이다. 진리와 덕이 무슬림의 목적이다. 겸손하고 소박하고 예의바르며 동정심을 보이는 것은 그의 제이의 천성이다. 무슬림에게 있어 오만과 허영 그리고 매정함과 무관심은 불쾌하고 무례한 처사이며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일이다.

특히 무슬림과 하나님의 관계는 사랑과 순종, 철저한 신뢰와 깊은 사려, 평화와 감사, 불구의 의지와 적극적 봉사의 관계다. 이러한 고등한 윤리가 인간적 차원에서의 윤리를 육성, 강화시켜 줄 것임을 확실하다. 왜냐하면, 같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무슬림은 친족에게 다정하고, 이웃에 관심을 보이며, 연장자를 존중하고 젊은이를 감싸주며,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의기소침해진 사람을 격려하며, 남의 경사를 보면 기뻐하고 유혹에 빠진 자에게 참을성을 보이며, 무지한 사람에게 아량을 베풀고, 무력한 사람을 관용하며 악을 거부하고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나, 더욱이 무슬림은 자기 자신의 권리에 못지 않게 타인의 법적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의 정신의 건설적인 생각과 진지한 탐구열로 가득 차야 한다. 그 마음은 동정심과 선의로 고동쳐야 하고, 그 영혼은 평화와 평온의 빛을 발해야 하며, 충고는 하되 진심을 깃들여 정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정직과 완전의 산 본보기가 되고 약속을 이향하며, 자기의 과업을 충실히 수행하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더하여 지식과 덕을 추구하며, 잘못을 고치고 죄를 회개하며, 사회의식을 보다 민감하게 하고 인간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성품을 기르며, 가족을 풍족하게 부양하되 사치를 피하고 가족의 정당한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 이 모든 것이 무슬림의 윤리적 의무인 것이다. 자연과 세계는 무슬림의 탐구의 장(場)이요, 향락의 대상이다. 무슬림은 자연과 세계를 이루는 제요소를 활용하고 그 경이를 음미하며 그 경이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간파하고 그 선을 보존하며, 그 경이를 탐구하고 그 속에 깃든 신비를 파헤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활용을 하든, 즐기는데 그치든 낭비와 무절제를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양심적인 자로서 무슬림은 자기와 세계를 공유하며 앞으로 그 뒤를 이어갈 사람들을 항시 염두해 두고 있어야 한다.

이슬람의 윤리적 원칙은 일부는 이행의 의무가 따르는 긍정적 서약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또 일부는 금지의 일부가 따르는 부정적 명령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긍정적인 형식이든 부정적인 형식이든 모두다 인간에게 건전한 정신과 평온이 깃든 영혼과 강한 인격 그리고 건강한 육체를 갖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인류의 전체 복지와 번영의 필요 조건임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 인간에게 도움을 베풀어 이러한 요건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이슬람은 다음의 규정을 두고 있다.

1. 하나님의 유일성과 무함맏이 사도임을 증언하되, 의미심장한 서약의 방식을 취할 것.

2. 일상 예배를 규칙적으로 올릴 것.

3. 자선 혹은 빈자(貧者)의 몫(자카)이라고 하는 종교세를 바칠 것.

4. 성원(聖月)라마단의 단식(斷食)을 지킬 것.

5. 적어도 평생에 한 번 성도(聖都) 멕카를 순례할 것.

이런 규정에 내포된 윤리적·사회적 의미는 후에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이러한 적극적 수단에 더하여, 예방적 수단이라고 할 만할 규정들도 있다. 사람은 광란과 퇴폐에서, 우유부단과 방종에서, 추잡과 유혹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이슬람은 음식과 음료와 성에 관한 금기 사항을 규정하였다. 이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포도주, 증류주, 독주(毒酒) 등 취하게 하는 술 전부(꾸란, 2:219, 4:43, 5:93-94)

2. 돼지고기와 그 제품(포오크, 베이켄, 햄, 돼지기름), 발톱이나 이빨로 먹이를 잡는 들짐승(호랑이, 늑대, 표범 등)의 고기와 그 제품, 설치류, 파충류, 벌레등을 먹이로 하는 모든 날짐승(매, 독수리, 까마귀 등)의 고기와 그 제품, 제대로 도살이 안 된 짐승과 새의 시체에서 나온 고기와 그 제품(꾸란, 2:172-173, 5:4-6)

3. 도박과 무익한 스포츠 전부(꾸란, 2:219, 5:93-94)

4. 모든 혼외 성관계와,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걷거나, 쳐다보거나, 옷을 입을 때, 유혹을 부채질하거나 성욕을 자극하거나 은연중 음란 행위로 이끄는 모든 태도와 몸짓(꾸란, 23:5-7, 24:30-33, 70:29-31) 하나님께서 이런 금지의 법을 두신 것은 인간의 영적·정신적 안녕과 인류의 윤리적,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마음내키는 대로 취한 조처가 아니요, 인간이 강요를 자청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복지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이며, 그분이 인간을 잘 보살피고 있음을 지적하는 징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금하시는 이유는 인간에게서 요긴하고 이로운 것을 박탈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훌륭한 식별력과 생의 보다 나은 것에 대한 세련된 취미와 보다 숭고한 윤리가치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키우게 하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영과 정신, 영혼과 육체, 양심과 정서, 건강과 부, 체위와 사기(士氣)를 잘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금기는 박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풍요하게 하려는 것이며,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훈계하자는 것이며,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려는 것이다.

모든 금기는 자비와 지혜의 법인 바, 이와 관련된 이슬람의 2가지 원칙을 지적하여 이점을 밝혀 보기로 한다.

첫째, 비상 사태나 위급한 상황, 불가피하고 긴급한 정황에 처한 무슬림은 정상 상태에서는 금지된 행위라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불가피하게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윤리적 규정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꾸란, 2:173, 5:4참조)

둘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비의 법을 다짐하셨으니, 몰라서 죄를 지으나 후에 회개하여 자기의 행위를 고치는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것이다. 정녕 하나님은 자비롭고, 용서에 인색하지 않는 분이시다. (꾸란, 6:54)

전형적이고 두드러진 꾸란 구절에, 건전한 윤리적 행위의 바탕과 철학이 규정되어 있다. 그 구절을 다음에 옮겨 본다: 오 아담의 자손들이여! 언제 어디서 예배를 보든지 아름다운 옷을 입을 지니라. 먹고 마시되 지나치게 낭비하지 말지니, 하나님께서는 낭비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심이라. 이렇게 말하라: '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마련해 준 아름다운 선물과 깨끗하고 정결한 음식을 금하였느뇨?' 이렇게 말하라: '그것은 이생에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심판날에는 오직 이들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라.' 이와 같이, 우리가 이해하는 자들을 위해 그 징표를 자세히 설명하노라. 이렇게 말하라: '진실로 나의 주께서 금(禁)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누가 보든, 안 보든, 수치스런 짓을 하는 것과 진리와 도리를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동반자를 붙이는 것, 그리고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꾸란, 7:31-33)

이슬람에서의 윤리적 범주는 포괄적·통합적인 것이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의식 영적인 관습, 사회적 행위, 의사결정, 지적탐구, 소비습관, 말씨와 예법, 그리고 기타 인간 생활의 모든 부면(部面)이 이러한 윤리적 범주 속에서 일체를 이룬다. 윤리는 이처럼 이슬람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에, 그 윤리적 색조가 꾸란의 전 구절에 깔려 있어, 성서전체를 통하여 여러 문맥에서 그 윤리적 가르침이 되풀이 강조되고 있다. 이래서 이러한 윤리적 가르침을 통하여 꾸란에 나오는 대로 정리하면 간결하나마 요령 있게 분류하려는 계획이 어려워진다. 각 원칙마다 여러 문맥 속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중요한 단일원칙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전체 윤리체계를 이루는 한 요소로서 나타나기도 하는 바, 이러한 요소는 또 다시 종교적인 상위(上位)체계 전체를 이루는 한 요소인 것이다.

그런 만큼, 다음에 제시하는 꾸란 구절은 꾸란에서 대표적으로 발췌해 낸 데다 인간이 번역과 해석을 가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번역과 해석은 아무리 해도 원전(原典)의 완전성에 미칠 수 없거니와 그 완전한 번역이 될 수도 없다.

하나님을 섬기되 그분에게 어떤 동반자도 붙이지 말라. 선을 행하되 네 부모와 친척과 고아와 가난한 자와 가까운 이웃과 낯모르는 이웃과 네 곁의 벗과(네가 만나는)나그네와 네 오른손의 소유(포로, 노예, 동물, 새 등)에게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만한 자와 자기를 높이는 자를 사랑하지 않으심이라. 또 스스로 인색하거나 남에게 인색해 지기를 명하는 자들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선물을 감추는 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나니, 우리가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 저희로 수치를 당하게 할 형벌을 예비하여 두었음이니라. 또 저의 재산을 베푸나(위선 되어)남에게 보이려고만 했지 하나님도 마지막 날도 믿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 만일 누가 악한 자를 저의 친구로 사귄다면 참으로 두려운 일일진저!(꾸란, 4:36-38)

이렇게 말하라(오 무함맏이여): '오라, 내가 하나님께서(참으로) 네게 금하신 일을 자세히 보이리라? 그 무엇도 동등시하여 그 분께 붙이지 말라. 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난을 구실로 네 자녀를 죽이지 말라. 우리가 너와 네 자녀에게 식물(食物)을 마련하였음이라. 고아의 재산을 늘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저가 자라서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거기에 가까이 말라. 자질과 저울질을 공정하게 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라. 우리는 어느 영혼에게나 감당할 수 있는 짐 이외는 지우지 아니하느니라. 또 말할 때는 언제나 비록 가까운 친척이 관련되어 있을 지라도 공정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라. 이와 같이 그분이 너에게 명하시나니 이는 너로 기억하게 하려 하심이라. 진실로 이것이 곧게 뻗은 나의 길이니 그 길을 따르고 다른 길을 따르지 말라. 다른 길은 너희를 흩어 그분의 정로(正路)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그분에 네게 명하시나니 이는 너로 의롭게 하려 하심니라(꾸란, 6:151-153)

하나님께서 명하시나니 정의를 시행하고 선을 행하며 일가친척에게 친절히 대하라. 또 그분은 모든 부끄러운 행위와 불의와 배반을 금하시느니라. 그분께서 네게 가르치나니, 이는 너로 훈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으면 그 계약을 이행하며, 네게 맹세하고 그 맹세를 다짐한 후에는 그것을 깨지 말라. 진실로 너는 네 하나님을 보증으로 삼았나니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는 일을 아심이라,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의를 행하며 신앙을 가진 자는 누구에게나 정녕 우리가 새 생명을 주리니 곧, 선하고 순수한 생명이라, 우리가 이처럼 애쓰는 자들에게 저들의 최선의 행위에 따라 상을 내리리라(꾸란, 16:90-91,97)

지혜를 다하고 아름다운 선교를 펴(모든 사람을)네 주의 길로 초대하라, 그리고 저들과 의논하되 최선을 다하며, 가장 정중하게 할지니라, 네 주께서 누가 당신의 길에서 빗나갔으며, 누가 올바른 인도를 따르는지 가장 잘 아심이라.(꾸란, 16:125)

누가 있어 이 사람보다 더 좋은 말을 할 수 있으리요. 저는(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초대하고 의를 행하여 이 같이 말하느니라: '나는 이슬람에서 경배하는 자 중의 하나라.' 선과 악이 같을 수 없나니 최고의 선으로 악을 물리치라, 그리하면 말하건대 너와의 사이에 증오함이 있던 자가 너의 절친한 친구가 되리라!(꾸란, 41:33-34)

(세상에서)네가 받는 것은 무엇이나 이생을 편하게 할뿐이나 하나님에게 있는 그것은 보다 낫고 더 오래 가느니라. 그것은 이런 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곧 저들은 자기의 주를 믿고 신뢰하며, 더 큰 범죄와 부끄러운 행실을 피하고 분노가 치밀어도 용서하며, 주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예배를 거르지 않느니라. 또 저들은 서로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고 우리가 식물로 준 것을 베풀며, 악에 억눌리면(겁에 질림이 없이) 스스로를 도와 지키느니라. 상해에 대한 보상은(정도에 있어) 그에게 상응하는 상해를 가하는 것이나, 용서를 베풀어 화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분의 보상을 하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악행 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심이라. 그러나 누가 위해를 가해와 스스로를 도와 지킨 것이 사실이라면 죄의 여지가 없는 것이니라. 죄는 오직 악행으로 사람을 억누르며 무모하게 땅의 경계를 범하고 공평과 정의를 무시하는 자들에게 돌려지느니라. 이러한 자들(압제자와 위반자)에게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리라, 그러나 진실로 인내하여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 진정 담대한 의지와 결의를 보이는 것이니라.(꾸란, 42:36-43)

(이생의)덧없는 것을 누가 원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리라. 그러나 마지막에 우리가 저들에 대해 마련해 둔 것은 지옥이니, 저희는 지옥 속에서 타오르며, 수치를 당하고 버림을 받으리라.

그리고 내세의 것을 바라고 그를 위해 응분의 노력을 다하며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 저들이야말로 그 노력을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기는 자들이니라.

네 주의 선물을 우리가 이 사람이나 저 사람 모두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나니, 제 주의 선물은 (그 누구에게도)막힘이 없느니라…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사람들이여!)는 수치와 빈곤을 면치 못하리라.

너의 주께서 명하셨나니, 너는 그 분 외에 그 누구도 숭배하지 말며 네 부모를 상냥하게 대할 지리라.

네 생전에 그분들 중에 노령에 달한 분이 있거든 멸시하여 말하거나 반박하지 말고 공손히 말할지니라.

그리고 친절한 마음씨로 겸손의 날개를 그분들께 내려 이같이 말하라 '나의 주여! 어린 저를 저분들이 애지중지하셨듯이, 저분들께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너희 주께서 너희 마음속을 가장 잘 아시나니, 너희가(돌이켜) 의를 행한다면 정녕 그분께서는 몇 번이고 (회개하여)당신께 돌아서는 너희를 아주 관대하게 용서하시느니라.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에게 하듯 친족에게도 저들의 정당한 권리대로 해 줄지니라 그러나 방탕한 사람처럼(네 재산을) 탕진하지 말라. 진실로 방탕한 자들은 악인의 형제이니 악인은 저의 주를 감사할 줄 모르느니라.

그리고 네가 저들(앞에 말한 사람들)에게서 돌아서 네가 의지하는 주의 자비를 구하고자 하더라도 저들에게 거슬리지 말고 다정한 말을 해 줄지니라.

(인색한 사람처럼)네 손이 목에 매이게 말며(무책임한 탕자처럼)네 손을 쭉 뻗지도 말라(어떻게 하든)너는 비난을 받고 곤궁케 되리라.

진실로 너희 주께서는 당신이 베풀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식물을 베푸시나니 그분은 또한 공평히 베푸시느니라, 그분은 당신의 모든 종들을 아시며 주시하고 계심이라.

가난이 두려워 네 자녀를 죽이지 말라. 우리가 너와 네 자녀에게 양식을 마련하여 주리라. 자녀를 죽임은 실로 큰 죄이니라.

간음을 멀리하라. 이는 수치스런 짓이요 죄악이며 또 다른 죄악의 길을 엶이라. 정당한 이유 없이 살생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룩하게 하셨나니, 그리고 만약 누가 부당하게 살해당한다면, 우리가 저의 후계자에게 권한을 주었나니(저는 동등한 처벌을 요구하거나 용서를 베풀 수 있느니라.) 그러나 살생에 관해서는 한계를 넘지 못하게 할지니, 이는 저가(법(法)의) 도움을 받음이라.

고아의 재산을 늘려 주지 않으려면 저가 자라서 제 힘으로 살아 갈 때까지 거기에 가까이 말라. 그리고 (모든)약속을 이행하라. (심판날에)모든 약속이 조사 될 것임이라.

자질을 후하게 하여 저울을 곧은 것을 쓸지니라. 이것이 가장 온당하며 종래에 가장 이로움이라.

그리고 네가 알지 못하는 것(부질없는 헛된 호기심)을 추구하지 말라.

듣거나 보거나 마음에 느끼는 행위 하나 하나가 (심판날에)조사될 것임이라.

땅 위에서 오만하게 행치 말라. 네가 땅을 갈라지게 못하며 높은 산에 이르지 못함이라.

그 무엇보다도 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니라. 이러한 것들이 네 주께서 네게 나타내신 지혜의(가르침)가운데 드느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지 말지니 이는 네가 지옥에 던져져 질책과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꾸란, 17:18-39)

우리가 루끄만에게 지혜를 주었노라: '하나님께 감사하라.' 감사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렇게 하여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느니라. 혹 누가 감사하지 않더라도,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으시며 모든 찬미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그리고 우리가 사람에게 명하기를 자기 부모에게 친절하라 했느니라. 진통을 거듭하여 어머니가 저를 낳았으며, 두 해가 지나서야 저가 젖을 떼었느니라.(명을 들으라), 나와 네 부모에게 감사하라 나를 향하여 최고의 목표가 있느니라. 그러나 나 외에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애써 숭배시키려 한다면 부모에게 순종하지 말라. 그러나 이생에서 공평하고 (정중하게)부모님을 모시며(사랑하며)내게 향하는 자들의 길을 따르라. 너희 모두가 결국 나에게 돌아오리니. 내가 너희가 행한 모든 일의 진상과 의미를 너희에게 말하리라…오, 나의 아들아(루끄만의 말이다):예배를 거르지 말고, 공평과 의를 명하며 악을 금하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꾹 눌러 참으라, 이리하는 것이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의지가 확고한 것임이라. 또 사람에게는 네 볼을 불룩하게 하여(오만을 부리지)말며, 땅에서 오만하게 행치 말라, 하나님께서는 오만하게 뽐내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심이라. 그리고 걸음걸이를 절도 있게 하며, 목소리를 낮출지니, 진정 소리 중 가장 거친 것은 나귀의 울음소리이니라(꾸란, 31:12-19)

오 너희 믿는 자들이여! 취하게 하는 것과 도박…은 가증한 것이요 사탄의 소행이라 이런 (가증한)짓을 피해야 너희가 형통하리라. 사탄의 술책은 오직 취하게 하는 것과 도박으로서 너희 사이에 적의와 미움을 부채질하고, 너희를 훼방하여 하나님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거늘 너희가 삼가지 않으려느냐?(꾸란, 5:90-91)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것으로 내세의 본향(本鄕)을 구하라. 현세에서 네 본분을 잊지 말되, 하나님께서 네게 선하셨듯이 너는 선을 행하며, 땅에서 해악을 짖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해악을 짓는 자를 사랑하지 않으심이라.(꾸란, 28:77) 여기 발췌한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꾸란의 다른 구절과 무함맏의 관습은 많이 있다. 여기에 발췌한 것만으로도 이슬람의 기본적 윤리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이슬람의 윤리는 경우 여하를 막론하고 그 성격이 독특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윤리원칙을 세우신 뜻은 어쩌다 보고 감복하라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시행, 발효시키려는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을 도와서 가장 건전하게 성격을 개선하고 인격을 도야하며,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그분과의 결속을 다지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사람을 위협하여 소극적이 되게 하거나 무관심하게 만들려고 이슬람의 윤리를 세워 놓은 게 결코 아니다. 예를 하나 들면 요점이 설명될 것이다. 만약 무슬림이 해를 입거나 억압을 당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는 자유선택에 의해 여기에 저항하여 상응하는 보복을 가하거나 용서를 베풀어 자기 행위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맡길 수도 있다. 그는 자기에게 어느 쪽으로도 조처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며, 용서해 주는 쪽이 더 좋다는 것도 역시 안다. 그러므로 그가 용서를 베풀 경우, 그 자신의 자유선택에 의해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보복을 가하는 경우에도, 하나님의 법을 어기거나 부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처인 것이니, 이런 태도는 그 자체가 신성한 의무이며 동시에 관계당국이 질서와 정의를 확립하는 데도 일조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슬람이 여느 교의가 내세우는 이론처럼, 절대적인 용서를 요구한다면 수양이 안 된 많은 사람들은 죄를 범하고 모든 한계를 벗어나는 쪽으로 기울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여느 교의가 무자비하게 가르치는 것처럼 이슬람이 오로지 보복만을 요구한다면 자비와 인내 그리고 영적 개선과 윤리적 성숙의 여지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많은 훌륭한 성품이 자취를 감출 것이고 많은 윤리적 잠재능력이 결코 빛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여하한 일이 있어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침 받은 사람은 그런 가르침을 실천하지도 않으려니와 아마 실천할 수도 없으리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은 결국 인류를 위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윤리 그 자체를 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차없이 보복을 가하라고 가르침 받은 사람은 인간의 덕이라는 것을 거의 혹은 전혀 존중하지 않으며 보편적 규정으로서의 윤리에 대한 관심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못하다. 그러나 인간성의 신성한 육성자인 이슬람은 인간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제시하였다. 악인이지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고, 용서를 베풀면 더 나아지거나 이롭게 될 경우에는 용서를 권하게 되며 또 그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용서의 동기를 잘못 생각하고 있거나 악의 길을 걷기 쉬운 자들에게는 원한에 따라 상응하는 보복을 가하게 된다. 따라서 어느 경우에나 무슬림은 건전하고 유익한 태도를 견지하게 되는 것이다. 용서를 베푸는 경우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월한 입장에 서서 비행을 저지른 자의 선도에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보복을 가하는 경우에는 자기의 권리를 보호하고 질서와 정의를 확립하며 악을 저지하는데 이바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건전한 윤리인가? 물 불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복수하는 자의 태도인가? 아니면, 자비와 용서의 여지를 두고 예외적 경우를 허용하는 무슬림의 태도인가? 그리고 누가 윤리적으로 건전한가? 보복이 허용되지 않음을 알고서 용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보복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용서하는 무슬림인가? 어느 쪽이 진정한 용서인가? 외적인 강제와 금지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어서 하는 용서인가? 아니면 선택과 행동의 자유에서 비롯하는 용서인가? 이슬람의 윤리원칙이 건전하고 독자적이며 융통성이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것은 모든 선과 윤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교훈인 것이다.

세계의 개념 (up)

머리말에서 간략하나마 서반구에서의 무슬림의 위치와 이슬람의 미래상을 논했는데 이번에는 현대 세계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인간의 전반적 상황 그리고 이슬람의 세계의 개념 또는 세계관을 논하기로 한다. 이미 논의된 개념을 재확인하는 한편, 몇 가지 새로운 생각을 덧붙이고 다양한 차원에 걸친 주제를 한데 묶어 요약하게 될 것이다.

현재 인간이 처한 상황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절박한 감을 금할 수 없다. 선의와 신앙심을 가진 사람 모두의 관심과 적극적 반응을 요청하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이나 체념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희망의 정신이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이슬람의 긴요한 속성이다.(예, 꾸란 12:87, 65:3 참조)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제문제와 위기는 오로지 현대만이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와 위기는 난감하고 복잡하며 고통스러운 것임은 사실이다. 아마 이전 어느 때보다도 지금이 한층 더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와 지난 세기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현대가 처한 곤경이 점점 복잡성을 더해 가는 것은 주로 우리의 기대와 능력의 수준이 비슷하게, 비례하여 높아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세기에 걸쳐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난감한 위기는 주로 생소하고 이질적이고 외래적(外來的)인 것에 대한 일종이 완고하고 배타적이고 편협한 태도에서 기인하였다. 이러한 정향(定向)은 인종주의, 엘리트 의식, 완고한 신앙, 편견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불쾌한 일군(一群)의 태도를 조장하였다.

그 누구도 감히 인류가 유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이런 위기는 외부적인 밖을 향한 물질적 탐구와 내면적인 안을 향한 윤리적 탐색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에서 야기되는 현상으로 보인다. 균형의 유지를 요구하고, "중도"를 주장하고, 중용을 위한 개혁운동을 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그러나 이것만큼 성취하기 어려운 일도 없었다. 과거에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왜곡되어 인간의 물질적 복지를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때도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을 오해한 나머지, 만사를 맡겨 버리는 운명론이나 절대적인 부정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영성(혹은 탈속(脫俗))과 체념을 지나치게 내세우면 필경 이에 대한 반동으로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와 "자유의지"등을 강조하게 된다. 영성(혹은 탈속)을 어느 한계를 넘어 강조하게 되면 그것이 미신과 미혹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강조가 지나치면 물질주의가 방종으로 자유의지가 방탕으로 화하고 합리주의가 공리공담으로 끝날 우려가 있다. 지난 수세기의 지성사(知性史)가 이런 경향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지난 수십 년간 정신의 저울은 비틀거렸다. 60년대와 그리고 70년대인 지금, 추종을 불허하는 미증유의 외계 탐사가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이 되었다. 안으로 파고드는 존재의 내면 세계에 대한 전례 없는 탐구도 그것이 비록 광적이거나 신경질적인 혹은 일시적 유행의 양상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조되고 있는, 전대 미문의 균형을 잃은 2가지 유형의 탐구열은 유례없는 불안을 자아내고 있다. 그 이유를 필시 이 두 가지 유형이 수렴하기는 고사하고 서로 무관계한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뚜렷한 상호관계나 상호보완 혹은 교접(交接)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안정하고 불균형한 이 두 가지 유형의 존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불안과 혼란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이로 인해 사회문제는 심화되고 현대인의 운명에는 찬물이 끼얹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외계 탐사와 윤리적 내면 탐색이 다소나마 화합하게 된다면 이런 불안한 경향을 역전시킬 수도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예배만으로도 살 수 없다. 인간은 정치적 물질주의적 동물인 동시에 성(聖)의 탐구자이기도 한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현대세계는 허다한 문제로 좌절에 직면해 있다. 한편,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처방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 역시 못지 않은 좌절의 요인이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식의 대중가요를 읊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인도주의, 악마주의 혹은 과학주의를 궁극의 해결책으로서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장차 구세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더욱 많다. 그러나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 놨지만 무관심한 사람들, 자포자기한 사람들, 냉담한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실제에 있어서는 낙관론자들이 결성한 클럽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이해"의 절박한 필요성일 것이다. 인간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본성과 잠재력과 한계 그리고 세계 속의 자기의 위치와 그 요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제 문제는 이슬람이 어떻게 인간에게 도움을 베풀어 그 자신을 이해시키고, 정신에서 장애를 제거하며, 흐릿한 시야를 맑게 해 주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답하려면 이제까지 논한 이슬람의 기본개념을 머리에 새기고, 그 가치체계를 구성하는 일부요소를 정치화(靖緻化)시킬 필요가 있다. 바라건대 이건 분석을 통하여 이러한 제개념과 가치체계의 제요소가 어떻게 진통하는 현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관련될 수 있으며, 어떻게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인이 자기 길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중용의 원칙은 이슬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것은 이슬람이 인간성과 생의 의미와 하나님의 개념을 파악하는 방식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이슬람은 편파적인 "인본주의"철학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을 거의 신격화시키고, 그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또한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고 죄성(罪性)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인본주의 철학에 못지 않게 편파적인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인생은 추잡하고 동물적이며 짧고 비참하다는 관념을 배격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생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서 즐겁고, 태평하다는 관념 역시 배격한다. 이슬람은 생에 긍정적인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다. 이슬람이 지상에서의 생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경우는 내세와 관련시켜서 일뿐이다. 오로지 목전의 현실과 순간적인 향락주의와 찰나적 쾌락에만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현실을 도피하여 철저하게 내세의 낙원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슬람은 지상에서의 인간조건에 관심을 갖는 동시에 내세에서의 인간의 운명을 중시한다. 물론 이런 관심은 비례적인 것으로서 이슬람은 존재의 각 단계를 평가하되 그것이 인간의 전체 복지에 미치는 영향의 상대적 크기에 의존한다.(꾸란 7:33, 17:18-21, 28:77, 57:20-21) 여타의 많은 성귀(聖句)를 만할 꾸란의 성귀(꾸란, 2:27-39)가 하나 있다. 이 성귀는 이슬람의 기본원칙의 일부를 포함하며, 이슬람의 세계관의 기초를 제시한다. 이런 원칙들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것을 들여보면 다음과 같다.

1. 세계는 하나의 생성체로서 설계자의 의지에 의해 창조되어, 의미 심장한 목적을 위해 유지된다. 역사는 그분의 의지대로 전개되며, 정해진 법칙을 따라 흘러간다. 역사의 전개는 맹목적인 우연에 지배되지 않으며, 우발적으로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모여 역사의 흐름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2. 인간 역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부왕(副王)으로 임명된다. 인간이 부왕으로 선택된 것은 땅을 경작하고, 지식과 덕과 목적과 의미로서 생을 풍요케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천지의 만물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어 인간에게 도움을 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생은 인간을 가두어 놓은 감옥이 아니며,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전생의 죄를 임의로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쫓겨난 것도 아니다. 인간의 존재는 단순한 우연이나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3. 지식은 인간에게만 있는 능력이며 인격과 존재의 필수요소다. 인간에게 창조주의 부왕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고, 하나님의 천사들에게조차도 존경과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지식이다.

4. 지상에서의 생의 초두부터 죄와 반역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그 뒤를 이어 일어난 일련의 일들-아담과 이브의 양심의 가책, 회개, 하나님의 용서와 동정 그리고 인간과 사탄 사이의 적의-이 모든 것은 창조주에게 의외의 일이 아니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발적이기에는 너무나 의미심장하였다. 오히려 첫 인간을 훈계하고, 타락과 회복, 도덕적 패배와 승리 그리고 창조주로부터의 이탈과 그분과의 화해를 실지 체험시키려는 계획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생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고, 생의 불확실성과 고통스런 순간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혜안을 가지게 될 것이다.

5. 이브는 첫 인간부부의 연약한 쪽이 아니었다. 이브는 아담을 유혹하여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지 않았으며, 그녀만이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담과 이브는 똑같이 유혹을 받았으며 똑같이 유책(有責)하였다. 둘 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였으며, 하나님의 용서와 동정을 받았다. 이는 의미 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이브는 여성으로서의 그녀에게 태고적부터 따라다녀 온 저주로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자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꾸란은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미덕과 약점을 지니며, 똑같이 감수성과 장점을 갖는 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6. 인간은 자유의지가 부여된 자유 행위자다. 이것이 인간성의 본질인 동시에 인간이 창조주에게 책임을 지는 근거다. 인간에게 상대적 자유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그 자신의 목적을 깨는 것이 되고, 인간은 전혀 어떤 책임도 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임은 물론이다.

7.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생명은 영원하지도, 그 자체가 목적인 것도 아니다. 생명은 하나의 과도기로서, 이 기간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8. 인간은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자다. 그러나 죄에 대한 책임은 실제 죄를 지은 사람만이 진다. 죄는 유전되지 않으며 전가가 불가능하고, 연대성을 갖지 않는다. 각 개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인간은 타락하기 쉬운 반면, 구제와 선도의 가망성도 아울러 갖는다. 이것은 이슬람이 집단보다 개인을 선호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인주의는 사회적 맥락에서 유리시켜 생각하면 무의미해진다. 개인마다 상이한, 일련의 역할을 갖는다는 것이 개인주의 본래의 의미다. 각 개인은 자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되, 자신의 도덕적 성실성을 지키고 그 주체성을 보존하며, 하나님의 권리를 지키고 자기의 사회적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9. 인간은 존엄하고 명예로운 존재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에게 창조주의 영이 불어넣어진다는 사실에서 연원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존엄성이 특정 종족이나 피부색 혹은 신분계층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존재인 인간 모두의 천부적 권리이다.

10. 끝으로 이 성귀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인류의 통일성이 깊이 뿌리를 내려 요지부동임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인간 최고의 덕은 경건과 지식이며,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이런 지식을 습득, 활용하면 그 사람에게는 행복한 운명이 보장되고 그 생애가 평탄해지리라는 것을 지적한다.

Source: Islam Fra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