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장 신앙의 적용

본 장에서는 이슬람이 규정한 신앙의 실천사항을 다룬다. 이 가운데는 예배(쌀라), 단식(싸움), 자선-기부 혹은 “희사(자카)”와 순례(핫즈)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들 실천 사항을 명하신 방식이 이들 실천사항으로 하여금 영적인 제반목적에 합치하고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게 한다. 그 중에는 매일 실행해야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 주에 한 번·한 달에 한 번·일 년에 한번 실행해야 되는 것이 있고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실행해야 되는 것도 있다. 결국 이러한 실천 사항은 한 주의 모든 요일, 한 달의 모든 주, 일 년의 모든 달, 그리고 평생의 모든 해에 걸려 있는 셈이며, 특히 이러한 실천을 통하여 전 생애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게 되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행동과 실천이 없는 신앙은 이슬람에 관한 한 막다른 길목이다. 신앙이란 워낙 아주 민감하며, 극히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실천하지 않거나 그냥 내버려두면 생기와 동기유발 능력을 금방 잃어버리고 만다. 신앙에 생기를 주고 신앙이 그 목적에 합치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의 신앙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존속과 효과를 부여한다. 역으로 신앙은 인간을 고무하여 부단한 헌신과 꾸준한 실천으로 유도한다. 이것은 신앙과 실천의 상호관계가 매우 깊고 둘의 상호의존이 쉽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뚜렷하게 감화를 받을 만한 곳이 없고 따라서 성취하거나 열망할 만한 가치 있는 목적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의 생은 무의미하며 그날그날 살아가고는 있지만, 이렇게 산다면 아예 사는 것도 아니다. 한편 신앙을 고백해 놓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며 실제로는 신앙을 갖지 않은 것이니, 이런 사람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이 빗나간 사람이나 진배없다.

이슬람에서 신앙과 실천 사이의 상호관계는 종교제도 전체를 생생하게 반영하며 그 가르침의 심오한 철학을 드러낸다. 이슬람은 여하한 경우에도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종교와 실생활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인간을 받아들이며 영육으로 이루어진 그 본성을 인정한다. 이슬람은 인간의 영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영성을 무시한다며,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슬람은 또한 인간의 육체적 요구를 과소 평가하지 않는다. 육체적 요구가 없다면 인간은 천사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며 또 천사가 될 수도 없다. 이슬람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의 연속선상에서 중앙에 자리한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를 초월하지도 않는다. 하나님만이 오직 영적인 존재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로지 물리적·육체적 존재인 것만도 아니다. 이런 부류의 존재는 동물이나 기타 이성 없는 피조물 외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처럼 상보적(相補的)본성을 갖는 존재이기에, 상응하는 요구와 상응하는 필요를 지닌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그리고 윤리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어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할 수 있는 종교는 이러한 모든 요구와 필요를 고려에 넣는 종교이며 인간의 영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육체적 욕망을 훈련하는 종교인 것이다. 이런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인간성의 어느 한 면을 억누르거나 균형을 잃거나 한쪽으로만 치우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심어준 본성을 무책임하게 무시함은 물론이려니와 그것을 부인하여 학대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이슬람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인간의 영적·물질적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종교를 사사로운 문제로 보거나 실생활 전반과 유리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종교란 공사를 불문하고 전체적인 인생행로에 눈에 띄는 흔적을 내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생활을 조직적으로 영위해 나가지 않는다면 생은 무의미하다. 이슬람이 사회 각 방면-개인적, 사회적 행위, 노동과 산업, 경제와 정치, 국가적, 국제적 제관계 등-으로 그 조직적 감각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나 또 같은 연유에서 이슬람은 “세속주의”나 성속(聖俗)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종교와 의미 있는 생활의 상호작용은 지극히 중요하다. 이것이 이슬람이 사회 각 방면으로 침투하여,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고, 인간에게 자비로운 건전한 방식으로 인간의 제반사를 지도하는 까닭이다.

참종교와 일상생활 사이의 이러한 필연적인 부합의 결과로서, 이슬람은 “엿새는 나 혹은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하루는 주님을 위해서”라는 식의 교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런 교리는 결국에 가서는 공허해지고 종교의 활기를 창백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교리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심히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며, 인간 자신의 영혼에 해로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 윤리적 욕구를 심각하게 무시하는 것인 바, 이러한 영적, 윤리적 요구는 물질적 욕망보다 더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필적할 만큼 중요하다. 그것은 또한 인간성을 위험하게 분열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불균형은 곧 타락의 징후이다. 마찬가지로 엿새는 수도생활이나 명사에만 몰두하고 하루는 자신을 위해 보낸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균형이 깨어지기는 매일반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행로는 이슬람이 제시하는 행로가 된다. 인간은 상보적 본성을 지닌 존재이고 피조계(被造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영혼이나 육체를 등한시하거나 어느 한 쪽을 다른 쪽보다 우위에 둔다면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영혼과 육체 모두에 자양분을 주고, 양자를 균형 있고 건전하게 육성시키는 것이 인간의 정의감과 성실감 그리고 의지력과 진실성을 가늠하는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 그리고 인간을 도와 이 시험에 통과시키고자, 이슬람이 신앙의 규칙적인 실천사항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예 배(쌀라) (up)

예배의 목적

예배는 이슬람을 버티는 하나의 지주이며, 종교의 기초로 간주된다. 합당한 이유도 없이 예배를 보지 않는 무슬림은 중대하고 가중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범죄가 중대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이것만해도 나쁜데-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존재를 숭배하고 숭고한 목적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가장 위대한 존재이며 동시에 가장 숭고한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성격을 건전하게 키워 주고 성숙과정에서 그 열망을 실현시키는 최선의 방법이 이슬람의 예배이다. 예배를 게을리 하는 것은, 인간성의 선한 자질을 억누르고 인간성이 누려야 할 권리 곧 숭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권리와 열망하고 고매해질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선에 뛰어나고 고상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권리를 부당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억누르고 거부하는 것은 극히 심각하고 파괴적인 범죄를 구성한다. 예배가 인간의 생에서 가지는 의의와 생명력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예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만 우리의 번영과 복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분이 예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우리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하시는 것은 우리를 도우려는 그 분의 뜻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든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하든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역시 인간이 인력(引力)의 중심이다. 그가 보이는 일반적인 흥미가 주된 관심이다.

인간이 이슬람의 예배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한하여 예배의 축복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하나의 “이론”이나 상투적인 가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사실이며 영적인 체험이다. 다음에 이슬람 예배의 효과를 설명한다:-

1. 하나님의 존재와 선에 대한 신념을 강화시키며 이런 신념이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게 한다.

2. 이러한 신념에 생기를 주는 한편, 실생활에서 그것이 건설적으로 작용하게 한다.

3. 인간에게 도움을 베풀어 위대성과 숭고한 윤리 우월성과 원숙한 덕에 대한 천부적·본능적 열망을 실현하게 한다.

4. 마음을 정화하고, 정신을 계발(啓發)하여 양심을 길러 주고 영혼을 위로한다.

5. 인간에게 선하고 예의바른 기질을 함양시켜, 악하고 무례한 성향을 억제시킨다.

이슬람의 예배를 분석하여 그 독자성을 연구해 보면, 이슬람의 예배가 단순히 신체 동작이나 성서의 공허한 낭송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것은 지적인 명상과 영적 헌신 그리고 윤리적 향상과 신체 운동 모두를 총괄하는, 독자적이고 유례없는 신앙 형식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슬람적인 체험인 바, 예배하는 동안 신체의 모든 근육이 영혼과 정신에 합일하여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 예배의 완전한 의의를 말로써 나타내기는 어렵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있다. 이슬람 예배는…

1. (심신)단련과 의지력의 수업이다.

2. 하나님과 모든 가치 있는 목적에 대한 헌신의 실습이다.

3. 하나님과 부단히 계시되는 그분의 선을 빈틈없이 상기시킨다.

4. 영적 수양과 윤리적 건전성의 씨앗이다.

5. 생의 가장 곧은길로 이끄는 안내자이다.

6. 무례와 악, 그릇된 탈선과 이탈에 대한 방어수단이다.

7. 진정한 평등과 확고한 통일성과 형제애의 시현(示顯)이다.

8.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인식의 표시이다.

9. 마음의 평온과 안정의 길이다.

10. 인내와 용기, 희망과 자신의 풍부한 원천이다.

이것이 이슬람의 예배이며, 그것이 예배가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혜택이다. 예배를 실제 체험해 보고 그것이 주는 영적인 즐거움에 젖어 보면 이 말이 실감나게 된다. 그런 연후에야 예배의 진정한 의의를 알게 될 것이다.

예배의 제조건(up)

다음의 조건을 갖춘 무슬림은 남녀를 불문하고 의무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1. 정신이 온전하고 책임을 질 수 있을 것.

2. 비교적 성숙하고 사춘기의 연령-보통 14세-에 달해 있을 것(자녀들의 경우 7세가 되면 예배를 시작하라고 권해야 하며, 10세가 되면 강권해야 한다.)

3. 중병에 걸려 있지 않아야 하며, 여자의 경우에는 월경 중이 아니고, 해산과 수유로 행동이 부자유스럽지 않을 것, 양자의 최대기간은 각각 10일과 40일이다. 이런 경우에 여자는 예배의 의무가 완전히 면제된다.

다음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예배는 무효이다.

1. 세정(우두)을 할 것. 이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한다.

2. 온몸과 몸에 입은 옷을 청결하게 하고, 예배 장소에 있는 먼지와 불순물을 깨끗이 치울 것.

3. 의복을 격식대로 입어 음부를 가리는데 그 뜻이 있는 윤리적인 규정을 지킬 것. 남자는 적어도 배꼽에서 무릎까지는 가려야 한다. 여자는 얼굴과 양손, 양발을 제외한 전신을 가려야 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예배 중에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의복을 피해야 한다.

4. 가능하면 마음과 말로써 예배 의사(니얏)를 밝힐 것.

5. “끼블라”의 방향, 즉 멕카의 카바 방향을 똑바로 향할 것. 방향을 제대로 잡는 방법은 많다. 방향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자신의 최선의 판단에 따른다.

예배의 종류 (up)

예배의 종류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의무예배(파르드) : 하루 다섯 번의 예배와 금요일의 정오 집회, 그리고 장례예배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예배를 보지 않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가벌적 중죄다.

2. 추가 의무예배(와집과 순나) : 의무예배에 수반되는 예배와 두 개의 큰 축제(이-드)의 집회가 이에 해당한다. 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유해한 태만이며 지탄받을 행위다.

3. 임의예배 :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이든 자진해서 드리는 모든 예배가 이에 해당한다. 특히 다음의 두 시기를 택해서 예배를 보는 게 좋다 : 동트기 직전까지의 늦은 밤과 늦은 오전.

예배 시간 (up)

모든 무슬림은 남녀를 불문하고 합법적 면제 사유가 없고 모아서 하거나 일시적으로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하루에 다섯 번의 예배를 때 맞춰 드려야 한다. 다섯 번의 예배는 다음과 같다.

1. 이른 아침 예배(쌀라뚤-파즈르) : 새벽 이후 해뜨기 전-전체 약 두 시간의 길이-사이에 드리면 된다.

2. 정오 예배(쌀라뚤-주흐르)[1]) 남중한 태양이 기울기 시작하여 서녘 하늘에 질 때까지의 중간을 잡아서 그 사이에 드리면 된다. 예를 들어, 일몰시간이 오후 7시인 경우에는 예배 시간은 정오 12시 조금 후에 시작해서 오후 3시 30분 조금 후까지 계속된다. 그 직후에 다음 예배 시간이 시작된다. 하지만 정확한 달력이 나와 있어서 이것을 보면 각 예배 시간을 알 수 있다. 이런 달력을 입수할 수 없다면 자신의 최선의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1]

3. 이른 오후 예배(쌀라뚤-아스르) : 정오 예배시간이 끝난 직후에 시작해서 해질녘까지 계속 된다.

4. 해질녘 예배(쌀라뚤-마그립) : 이 예배시간은 일몰 직후에 시작해서 서쪽 지평선에서 저녁놀이 사라질 때까지 1시간 20분 내지 30분 동안 계속되는 게 보통이다.

5. 밤 예배(쌀라뚤-이샤) : 서쪽 지평선에 저녁놀이 사라진 후(일몰 후 약 1시간 30분 뒤)에서 새벽 조금 전까지 계속된다.

이슬람에서 예배시간을 정한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이 방식에 의하면 영적 안식이 신체의 영양 섭취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한편 마음의 평온과 신체의 휴식을 겸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른 아침 예배는 통상 아침 식사 시간대에 올리도록 되어 있고, 정오 예배는 점심 시간대와 일치하며, 이른 오후 예배는 대략 차나 커피를 마시는 휴식 시간에 해당한다. 해질녘 예배는 저녁 식사시간에 올려지고 밤 예배는 밤참을 먹을 때와 일치한다.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것은 무슬림이 이들 예배를 준행함으로써 하루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하루 전체에 영적 인(印)을 찍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무슬림은 종교와 생활을 결합시키고 하루 종일 마음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영적인 기분에 젖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신의 도덕적 위신을 튼튼한 기초 위에 구축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무슬림은 자기의 생활 곳곳으로 영적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며, 종교는 활동 분야 전반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상점과 회사에서 가정과 농장에서 공장과 작업장에서, 종교가 그 효력을 나타내게 된다. 업계 전반으로 종교가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기실 이런 시간표가 돋보이는 이유는 즉,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이슬람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예배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다.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 예배를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들 예배는 신성한 경기다. 이 경기를 치르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무한하며, 그 기쁨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이 얻는 행복, 느끼는 즐거움, 받는 명예는 형언할 수 없는 정도다. 반면에 이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처벌할 수 있는 죄에 해당한다. 엄한 형벌과 영적인 일탈과 정신적 고민과 사회적 소외를 초래한다.

정오(주흐르)와 오후(아스르)예배는 여행 중이거나 병중인 경우에는, 한꺼번에 드릴 수도 있다. 해질녘(마그립) 그리고 밤(이샤)예배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허용된다.[2]

일부세정(우두) (up)

예배를 올리기 전에 먼저 용모를 단정히 하고, 청결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 먼지나 스모그에 전체가 노출되는 신체 부위를 씻어내야 한다. 이렇게 씻는 것을 세정(우두)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행하는 것이 좋다.

1. 숭배와 청결을 위해서 세정한다는 의사를 밝힌다.

2. 손을 손목까지 세 번 씻어낸다.

3. 입을 물로 세 번 헹궈 낸다. 될 수 있으면 칫솔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4. 콧구멍 속으로 물을 들이켜 세 번 씻어낸다.

5. 얼굴 전체를 양손으로 세 번 씻는다. 가급적이면 이마 위에서 턱 아래까지 그리고 양쪽 귀 있는 데까지 씻어낸다.

6. 오른팔을 팔꿈치 끝까지 세 번 씻고 다음에 왼쪽 팔도 같은 식으로 씻는다.

7. 머리의 전부 혹은 일부를 손을 적셔서 한 번 닦아 낸다.

8. 귀 안쪽은 집게손가락으로, 귀 바깥쪽은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낸다. 젖은 손으로 해야 한다.

9. 목둘레를 적신 손으로 닦아 낸다.

10. 양발을 발목까지 세 번 씻는다. 오른발부터 시작한다.

여기까지 하면 세정이 끝나게 되는데, 이처럼 세정을 한 사람은 예배를 할 준비가 된 것이다. 세정이 유효하면 가급적 오랫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여, 다시 세정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회수만큼 예배를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가능하면 다시 세정하는 것이 좋다. 다시 할 경우에도 위의 순서대로 하는 게 역시 좋다. 그러나 이 순서를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도 세정한 것으로 인정된다. 위에 말한 대로 세정을 하면 다른 사유에 의해 무효화되지 않는 한 예배를 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게 된다.

세정의 무효 (up)

세정은 다음 각 경우에 무효가 된다.

1. 생리적 배설 즉 소변, 대변, 방귀 등

2. 신체 부위에서 피나 고름 혹은 유사물질의 유출

3. 구토

4. 수면

5. 마약이나 술 종류로 인한 정신 이상

이중에 어느 한 가지 경우라도 생긴다면 그 후에 세정을 다시 해야 예배를 볼 수 있다. 또 생리적 배설 후에는 물을 써야 한다. 숭배와 청결을 위해서는 화장지만으로 충분치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정의 완전한 대체(따이야뭄)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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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이야뭄 혹은 깨끗한 흙의 사용은 세정을 대체할 수 있다. 목욕도 이로써 대체가 가능하다. 따이야뭄은 다음 각 경우에 허용된다.

1. 병중이거나 물을 쓸 수 없을 때 :

2. 충분한 양의 물에 접할 수 없을 때 :

3. 물을 쓰면 해가 되거나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을 때

4. 세정을 하고 나면 장례예배나 이-드 예배를 놓칠 우려가 있을 때, 이 두 예배는 대체가 안 된다.

위와 같은 경우에는 따이야뭄을 하는 게 허용되는데 그 시행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양손을 깨끗한 흙이나 모래 혹은 돌 위에다 가볍게 두드린다.

2. 세정할 때와 같은 식으로 흙이나 모래 혹은 돌로써 한 번 손을 문질러 털어 내고 얼굴을 닦는다.

3. 손을 다시 두드리고, 왼쪽 손으로 오른팔을 그리고 오른쪽 손으로 왼팔을 팔꿈치까지 닦아낸다.

이 따이야뭄은 세정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세정은 건강과 숭배 양자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반복 가능한 세정을 도입함으로써 이슬람은 어느 종교 교리나 의학적 처방도 예상하지 못했던 최선의 위생요법을 아울러 가져오게 된 것이다.

세정의 편의(便宜)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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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세정에 관한 몇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세정 후에 양말이나 스타킹을 신거나, 신고 있었던 경우에는 세정을 다시 할 때 이를 벗지 않아도 된다. 벗지 않는 대신 적신 손으로 그 위를 스쳐 닦는다. 그러나 24시간마다 적어도 한 번은 벗어 내고 발을 씻어야 한다. 장화를 신은 경우에는 그 바닥이나 겉이 깨끗하면 이와 마찬가지 방식에 의한다. 세정시에 씻어내야 할 신체 부위에 상처를 입었거나, 그 부위를 씻어내면 유해할 경우에는 위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맨 붕대를 젖은 손으로 닦아내도 된다.

전부 세정(구슬/목욕)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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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각 경우에는 예배에 들어가기 전에 콧구멍, 입, 머리를 포함하여 전신을 목욕에 의해 완전히 씻어내야 한다.

1. 성교 후

2. 몽정 후

3. 여자의 경우, 월경기간이 끝나자마자

4. 산후수유로 자리를 뜰 수 없는 기간(산욕기)-최장 40일로 추산-이 끝날 때, 이 전에 끝나도 전부 세정을 해야 한다.

지적해 둘 점은, 목욕과 세정을 시작할 때 청결과 숭배를 위해서 한다는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일부나 전부 세정을 하는 사람은, 세정과 동시에 말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올바른 인도를 간구 해야 한다. 이 때 하는 말의 유형이 정교한 원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는 법을 말하다면 자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여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배 알리는 소리(아잔)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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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에 설명한 대로 세정을 마친 예배자는 예배를 올릴 준비가 된 것이다. 예배시간이 되면 무함맏의 관습(전통)을 따라, 소리를 내어 예배를 알리는 것(아잔)이 좋은 관습이다. 소리를 발하는 사람은 끼블라(멕카의 카바 방향)를 향하여 서서, 양손을 양쪽 귀로 올려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 (4번 반복) ;

2. 아쉬하두 안 라 일라하 일랄라(나는 유일신 하나님 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하노라), (2번 반복)

3. 아쉬하두 안나 무함마단 라수룰라(나는 무함맏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언하노라), (2번 반복)

4. 하이야 알랏-쌀라(어서 예배를 보러 오라). (2번 반복 :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5. 하이야 알랄-팔라(어서 오라, 형통하리니). (2번 반복 :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다)

6.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 (2번 반복).

7. 라일라하 일랄-라 (유일신 참 하나님 외에 신은 없도다). (한번)

이른 아침 예배를 알릴 때는 소리내는 사람은 위(5) 직후에 한 마디를 추가한다. 이 때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앗-쌀라 뚜 카이룸 미난-나움

(예배는 잠자는 것보다 나으리라), (2번 반복)

다음에 소리를 말하는 사람은 (6) (7)로 계속한다. 아침예배에 이런 예외를 둔 것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여서 예배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 들어가기(이까마) (up)

예배를 알리는 소리가 나면 예배자는 예배 준비를 하고 예배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이것을 이까마라 함)-예배를 거행한다. 이 때 하는 말은 위 아잔의 경우와 같지만, 두 가지이 차이점이 있다.

(ㄱ) 이까마는 보다 빠르지만 낮은 목소리로 낭송하며 (ㄴ) (5) 직후에 다음과 같이 두 번 말한다.

꺼드 꺼맛디-쌀라

(예배 볼 준비가 되었다.) 다음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7)로 끝까지 계속해 나가야 한다.

예배의 거행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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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가 세정을 마치고, 아잔과 이까마가 낭송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예배를 시작한다.

1. 이른 아침 예배(쌀라뚤-파즈르)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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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에서는 추가의무(순나)로 먼저 두 라카를 올린다. 다음에 다시 의무(파르드)로 두 라카가 따르게 된다. 추가의무 라카와 의무 라카는 같은 방식으로 올린다. 다만 예배 의사를 밝힐 때 둘 중 어느 쪽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거행 방법은 다음에 설명한다.

동작1. 공손하고 겸허한 자세로 서서 끼블라를 향하고 양손을 양쪽 귀로 올려 이렇게 말한다.

“나와이뚜 쌀리 순나따 쌀라띨-파즈르 혹은 파르다 쌀라띨-파즈르(각 경우에 따른다) ; 알라후 아크바르.”

뜻은 다음과 같다. 아침의 추가의무 혹은 의무(각 경우에 따른다.) 예배를 드리고저 하나이다 ;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다음에 양 팔을 내려 배꼽 바로 아래에서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갠다.[3]

동작2. 다음에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수브하나깔-라훔마와 비함디까, 와 따바라까-쓰무까, 와 따알라 잣두까, 와 라일라하 거이루크 아우주 빌라히 미낫-샤이따니르-라지임 비스밀-라히-르-라흐-마니르-라히-임”

뜻은 다음과 같다 : “오 하나님, 영광을 누리소서, 찬미가 당신 것이오며 당신의 이름은 복되며 당신의 위엄은 홀로 뛰어나니, 당신 외에 신은 없나이다. 저주받은 마귀로부터 당신께 피하고자 하나이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4])

동작3. 다음에 나지막하거나 혹은 들릴 수 있는 목소리로 꾸란 서장(알-파티하)을 낭송하고 이어서 성귀를 낭송한다.(서장과 짧은 장절의 예가 본장 말미에 나와 있다.)

동작4. 다음에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면서 머리를 직각으로 구부려,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지막하게 이렇게 말한다.

“수브하나 랍비얄-아지임”

(나의 주 위대하신 이여 영광을 누리소서“3번 반복)이것을 일컬어 루크라고 한다. 그 다음에 다시 기립자세를 취하며 이렇게 말한다.

“싸미 알-라후 리만 하미다 ;랍바나 라칼-함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감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이시나니 ;우리의 주여 찬미를 받으소서) 이 말을 할 때 손은 양편에 그대로 둔다.

동작5. 다음에 예배자는 “알라후 아크바르”라고 말하며 양발의 발가락과 양 무릎과 양손과 이마를 바닥에 닿게 한다. 이것은 수주드 자세인데 다음과 같은 말이 따른다.

“수브하나 랍비얄-알라”

(나의 주, 지고하신 이여 영광을 누리소서, 3번 반복)

동작6. 다음에 “알라후 아크바르”라고 말하며, 줄루스 곧 앉은 자세의 짧은 휴식에 들어간다 : 왼발 바깥쪽 그리고 오른발 발가락-곧추 세운다-을 바닥에 닿게 하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그 다음에 처음 할 때와 같은 말을 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다시 부복한다. 이로써 예배 한 라카가 끝난다.

동작7. 첫 번째 라카가 끝나면 예배자는 일어나면서 알라후 아크바르라 말하고 기립자세를 취하여 두 번째 라카를 준비한다. 그리고 첫 번째 라카에서와 마찬가지로 꾸란 서장(파티하)을 낭송하고 이어서 꾸란 한 구절을 더 낭송한다.

동장8. 첫 번째 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경배와 두 번의 부복을 마쳤으면, 줄루스 때처럼 앉은 자세를 취하고 2부로 되어 있는 따쉬아후드(장말(章末)에 나와 있다)를 낭송한다.

동작9. 끝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이렇게 말한다. “앗 쌀라무 알라이 꿈 와 라흐마 뚤-라”(평화와 하나님의 자비가 당신에게 깃들기를),

다음에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같은 인사말을 한다.

이것이 예배 두 라카를 거행하는 방식인 바 의무냐, 추가의무냐를 불문한다. 이 예배를 제대로 거행할 줄 알면 다른 예배는 모두 거의 쉬워진다. 이슬람 예배에서는 동작 하나 하나 말 한마디가 큰 의의를 수반하여 매우 심오한 의미를 상한다는 것을 밝혀 둔다.

2. 정오 예배(쌀라뚤-주흐르)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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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는 순나 네 라카 그 다음에 파르드 네 라카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순나 두 라카로 이루어진다. 이 예배에서 파르드는 다음과 같이 거행한다.

(ㄱ) 처음 두 라카는 아침 예배와 같은 식으로 거행한다. 파티하와 꾸란 한 귀절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낭송한다. 경배와 부복 자세를 취하는 방식은 같다.

(ㄴ) 두 번째 라카 이후 따쉬아후드를 낭송할 때, 예배자는 제 1부 끝에서 멈추고 다시 기립자세를 취한다.

(ㄷ) 다음에 세 번째 라카에서는 파티하만 낭송하고 꾸란 구절을 덧붙이지 않는다.

(ㄹ) 세 번째 라카가 끝나면 일어서서 네 번째 라카를 준비하고 세 번째 라카에서 처럼 파티하만 낭송한다.

(ㅁ) 경배, 부복한 후, 줄루스의 앉은 자세를 취하고 따쉬아후드 1부 2부를 모두 낭송한다.

(ㅂ) 다음에 오른쪽과 왼쪽을 향하여 평화의 인사를 한다.

(ㅅ) 순나 두 라카를 드리는 방식은 아침 예배와 같지만,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한다.

3. 이른 오후 예배(쌀라뚤-아스르)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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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는 순나 네 라카 그 다음에 파르드 네 라카로 이루어진다. 거행 방식은 정오 예배와 같으며 역시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한다.

4. 해질녘 예배(쌀라뚤-마그립)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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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는 파르드 세 라카 그 다음에 순나 두 라카로 이루어진다. 처음 두 라카를 올릴 때는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할 수도 있고 들릴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세 번째 라카에서는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한다. 거행 방식은 정오 예배나 이른 오후 예배와 같지만, 네 번째 라카가 빠지고, 파티하 낭송과 경배, 부복에 이어지는 마지막의 앉은 자세를 여기서는 세 번째 라카 이후에 취한다는 점이 다르다. 세 번째 라카는 평화의 인사로 끝난다. 순나 두 라카는 이른 아침 예배와 같은 방식으로 올린다.

5. 밤 예배(쌀라뚤-이샤)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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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는 파르드 네 라카 순나 두 라카 그리고 위뜨르[1])(순나 보다는 높고 파르드 보다는 낮다) 세 라카로 이루어진다. 파르드 네 라카 중에서 처음 두 라카를 올릴 때는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할 수도 있고 들릴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그 이외에는 정오 예배나 이른 오후 예배와 같은 방식으로 거행한다. 순나 두 라카를 거행하는 방식은 이른 아침 예배와 꼭 같다.[5]

위뜨르 세 라카는 해질녘 예배와 똑같이 거행되나 두 가지 예외가 있다 :

(ㄱ) 세 번째 라카에서 파티하 다음에 꾸란 한 구절이 따른다. 그리고

(ㄴ) 경배 이후 부복 이전 예배자는 이렇게 말한다.

“알라 훔마 인나 나쓰따이이누까, 와 나쓰따흐디까, 와 나쓰따그피루까, 와 나뚜부 일라이까, 와 누우미누 비까, 와 나따왁 칼루 알라이까, 와 누쓰니 알라이칼-카이라쿨라후나쉬쿠르까, 와 라 나크푸루까, 와 나클라우 와 나뜨루쿠 만 야프주르크 알라훔마 이야카 나아브드, 와라카 누쌀리 와 나쓰주드, 와 일라이카 나쓰우-와 나흐피두 나르주 라흐마따까, 와 나크쉬아 아자-바까, 인나 아자-바카 빌-꾸파리 물하꾼 와 쌀릴-라훔마 알라 싸이이디나 무함맏 와 알라 알리히 와 싸흐비히 와 쌀림.”

이것을 꾸누트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오 하나님! 저희가 당신의 도움과 인도를 간구하오며, 당신의 보호를 구하나이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의지하며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감사하며, 당신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 하리이다. 정녕코 당신께 불순종하는 자와 상존 하지 아니하고 저의 곁을 떠나리이다.”

“오 하나님! 당신께 저희가 엎드려 비오며 당신을 향해 나아가며 당신께 속히 복종하여 당신의 자비를 저희가 바라옵고 당신의 형벌을 저희가 두려워하옵니다. 당신의 형벌이 불신자들에게 내려짐이나이다.”

“오 하나님! 저희의 지도자 무함맏과 그분의 백성과 그분을 진실하게 따르는 자들을 높여 주옵소서.”

이 꾸누트를 기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것을 터득할 때까지 그와 유사하게만 낭송해도 족하다. 모든 순나(추가의무) 예배는 개별적으로 올려야 한다. 이-드 예배나 라마단 달의 위뜨르를 제외하고는 집단적으로 올릴 수 없다.

파르드 예배를 놓친 사람은 순나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 대신 놓친 예배를 벌충하여 의무예배를 올려야 한다. 또(순나 예배를 수반하는)파르드 예배가 끝난 경우에도 역시 순나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예배를 놓쳐 벌충하고자 한다면, 파르드만 올려야 한다.

예배자가 전혀 아랍어를 낭송할 줄 모르는 경우에는, 자기가 아는 다른 말을 써도 된다. 다만 그렇게 해서 아랍어와 같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아랍어의 낭송의 편의를 위해 음역을 제시해 두고 있다.

파르드 예배는 이맘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올리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집회는 마스짇에서 여는게 최적이지만 다른 장소에서 열 수도 있다.

회중(자마아) 예배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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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배 참석자들 중에서 뽑은 이맘이 회중을 인도한다. 이맘은 종교적 지식과 경건성에 의거하여 뽑아야 한다.

2. 회중의 이맘은 혼자 앞에 나와 서고 피인도자들은 이맘의 뒤에 직선으로 도열하여 전원 끼블라를 향한다. 두 사람 곧 이맘과 피인도자 한 명으로 회중을 이룰 수 있다.

3. 이맘은 예배 의사를 밝히고 나서 파티하와, 보충으로 꾸란 구절을 들릴 수 있게 낭송한다. 이는 이른 아침 예배와 처음 두 라카의 해질녘 예배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맘이 꾸란을 큰 소리로 낭송하면 피인도자들은 잠자코 겸허하게 경청한다. 이맘을 쫓아서 파티하나 다른 귀절을 낭송하지 않는다.

4. 이맘이 파티하를 마치면 피인도자들은 ‘아민’하고 말한다. 이맘이 경배 자세에서 기립한 후 “싸미알-라후리만 하미다”(하나님은 당신께 감사하는 자들을 받아들이시느니라)라 말하면 피인도자들은 이렇게 회답한다 : “랍바나 라칼-함드”(우리의 주여 찬미를 받으소서)

5. 피인도자들은 이맘을 따라 움직여야 하며 이맘을 앞질러 행동해서는 안 된다. 만약 피인도자가 어느 한 동작에서라도 이맘 행세를 하면, 이 사람의 예배는 무효가 될 것이다.

6. 집단 예배는 이맘이 이맘의 자격으로 예배를 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무효다. 피인도자들 역시 자기가 지금 같이 올리고 있는 예배에서 이맘의 인도를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혀야 한다.

7. 예배가 시작된 후에 와서 회중에 들어갈 경우, 한 라카 혹은 그 이상을 놓쳤더라도 이맘을 따라야 한다. 이맘이 마지막 평화의 인사를 하여 예배를 끝마치더라도 늦게 온 사람은 여기에 상관없이 기립자세를 취하여 처음의 놓친 라카를 벌충한다. 경배 자세에서 일어나기 전에 회중에 들어갈 경우에는 그 라카에 한하여 처음부터 참석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경배 이후의 자세에서 참석한 경우에는 그 라카는 놓친 것이 되고, 이맘이 예배를 끝낸 직후에 개별적으로 이를 보충해야 한다.

8. 무슬림은 집단 예배를 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집단 예배는 통일된 목적과 행동, 하나님 앞에서의 복수적 경건과 겸손, 무슬림 상호의 효과적 결속 그리고 공공질서와 상호 호응의 멋진 현현(顯現)이다.

이슬람 회중은 인종 차별, 사회적 특권계급, 인간의 편견에서 야기되는, 인류가 당면한 첨예한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이다. 이슬람의 회중 예배에서는 왕과 신하, 부자와 빈자, 백인과 유색인, 일등계급과 이등계급, 앞자리와 뒷자리, 특별석과 일반석이 따로 없다. 세속적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예배자 전원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일사 분란 하게 움직인다.

6. 금요 예배(쌀라뚤-주므아)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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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일상 예배를 다루었다. 이제 금요일의 주 회중 집회로 넘어간다. 이 예배는 다른 예배를 올리도록 되어 있고 또 면제의 합당한 사유가 없다면 무슬림 누구나가 지켜야 할 의무다. 이 예배는 매주 금요일에 보게 되는데 특히 다음의 이유로 해서 중요하다. 금요 예배는:

1. 무슬림이 집단적인 헌신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기회다.

2. 지난주를 영적으로 결산하고 다음 주를 준비하기 위한 약속이다. 사업하는 사람의 경우나 꼭 같다.

3. 무슬림들이 새 힘을 얻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유대와 사회적 결속을 윤리적 영적 토대 위에 다짐하기 위한 집회다.

4. 무슬림들이 다른 어떤 관심사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금요 예배의 하이라이트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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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예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예배 시간이 정오 예배 시간과 같고, 정오 예배를 대체한다.

2. 이맘이 인도하는 회중에서 드려야 한다. 한 사람이 혼자서 이 예배를 드릴 수는 없다.

3. 이 예배는 놓치고 나면 벌충할 수 없다. 대신, 통상 이 예배에 의해 대체되는 원래의 정오 예배를 드려야 한다.

4. 금요일에도 다른 요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상 업무와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 예배가 끝난 이후 세속활동을 다시 시작해도 좋다.

5. 금요 예배는 마스짇을 사용할 수 있다면 마스짇에서 거행해야 한다. 마스지드가 없다면 다른 장소 예를 들어 집, 농장, 공원 등에 모여서 거행해도 된다.

6. 예배 시간이 되면 아잔을 부른다. 다음에 순나 예배 네 라카는 개별적으로 드린다. 정오 예배와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한다. 이 부분이 끝나면 청중을 향하여 서서 설교(꾸뜨바)를 한다. 설교는 예배의 필수부분이다. 이맘이 설교하는 동안, 누구도 말하거나 기도해서는 안 된다. 참석자는 제각기 앉은 자세에서 설교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경청해야 한다.

7. 설교(꾸뜨바)는 2부로 이루어지는데 각각 하나님을 찬미하는 말과 예언자 무함맏을 축복하는 기도로써 시작된다. 제 1부에서는 꾸란 구절 하나 하나를 낭송 설명하여 훈계와 충고를 베풀어야 한다. 제 1부가 끝나면 이맘은 앉은 자세에서 잠시 휴식하고 다시 일어서서 전반적 관심사를 거론할 수 있다. 특히 설교 2부에서 이맘은 모든 무슬림의 전체 복지를 간구한다.

8. 그 후에 이까마를 하고 이맘의 인도를 따라 의무 두 라카를 올린다. 이맘은 꾸란의 파티하와 다른 구절을 들릴 수 있게 낭송한다. 이로써 예배가 끝나게 된다. 다음에 두 라카를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하여 개별적으로 올린다.

순나의 처음 네 라카와 나중 두 라카는 집에서 올려도 된다. 또한 먼저 번에 놓쳐서 벌충해야 하는 의무 예배로써 이를 대신할 수도 있다.

주집회 혹은 이드 예배 참석자는 각별히 신경을 써서 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말쑥하게 해야 한다. 전부 세정을 해야 할 의무적 이유는 없지만 목욕을 하도록 특히 권하는 바이다. 목욕을 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상쾌해지기 때문이다.

축제(이-드) 예배의 의의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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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는 행복의 회귀를 뜻한다. 이-드 예배는 무슬림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앞에 설명한 일상 예배의 장범과 주집회(주므아)의 효과와 무슬림 간의 연례 재회의 특성을 아울러 갖는 것이 바로 이-드 예배다. 이러한 이-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것을 이둘-피뜨르(破斷祭)라 부른다. 이날은 이슬람 력 10월 곧 샤우왈월 초하루다. 꾸란이 계시되고, 단식을 하는 날인 라마단 달의 다음이다. 두 번째 이-드를 이둘-아드하(희생제)라고 부른다. 이날은, 이슬람력 마지막 달 곧 줄-힛자월 10월이다. 핫즈(멕카순례)여정이 끝난 다음이다. 핫즈는 순전한 헌신의 여정이다.

이슬람의 이-드는 모든 점에서 특이하다. 여타의 종교나 사회 정치제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각 이-드는 숭고한 윤리적, 영적 특성을 갖는 외에도 다음과 같이 비길 데 없는 특성을 지닌다.

1. 각 이-드는 무슬림 각자가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서 해낸 괄목할 만한 성취를 기리는 건전한 축전(祝典)이다. 첫 번째 이-드는, 한달 전체에 걸쳐 낮 동안에 “절대적으로” 단식하는 기간이 지난 후에 돌아온다. 두 번째 이-드는, 멕카 핫즈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 핫즈의 여정은 무슬림의 세속적 관심사를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원한 음성에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 준다.

2. 각 이-드는 감사의 날이다. 무슬림들은 이날 모여 형제의 정이 오가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드에 앞서 자기들의 영적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러한 감사 형식은 영적 헌신이나 언어적 표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을 훨씬 초월하여 사회적 인도주의적 정신의 당당한 모습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라마단의 단식을 마친 무슬림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첫 번째 이-드 일에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푼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에 있는 무슬림은 물론 멕카의 핫즈 여정을 마친 무슬림도 제물을 도살하여 희생을 바치고 나서 이 제물을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 자선을 베풀고 제물을 나누어주는 것은 이-드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감사 형식은 영적 헌신과 인도주의적 자선의 건전한 결합인 바 이러한 결합은 이슬람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3. 각 이-드는 기념의 날이다. 무슬림들은 아무리 즐거운 시절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숭배의 복수적(複數的) 회기에 즈음하여 이날을 새롭게 시작한다. 무슬림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 자신들이 그 분의 은총을 기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와 더불어 고인이 된 자를 기억하여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가난한 자를 기억하여 도움의 손길을 뻗치며, 슬퍼하는 자를 기억하여 동정과 위로를 베풀고 병든 자를 기억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문안하여 쾌차를 빌어 주며 부재자를 기억하고 충심으로부터 안부인사를 하고 진정어린 친절을 보인다. 따라서 이날의 기념의 의의는 한계를 전부 초월하여 인간생활의 광범위한 차원으로 퍼져 나간다.

4. 각 이-드는 승리의 날이다. 자기의 영적 권리와 성장을 확보하는데 성공하는 사람은 승리의 정신으로 이-드를 맞이한다. 이-드에 관련된 영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은 승리자가 된다. 자기의 욕망을 엄하게 다스리고 건전한 자제력을 행사하며 수련 생활의 묘미를 맛보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런 자질을 획득한 사람은 최대의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런 자질을 획득한 사람은 최대의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자제하고 욕망을 훈련할 줄 아는 사람은 죄와 악, 공포와 비겁, 악덕과 무례, 질투와 탐욕, 굴욕과 기타 온갖 예속의 원인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의 성취를 특징으로 하는 이-드를 맞이하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자기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드는 승리의 날이다.

5. 각 이-드는 결실의 날이다. 하나님께 봉사하여 훌륭하게 일한 모든 사람들, 모든 충실한 신자들은 이날 자기들이 베풀 선행의 결실을 거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와 축복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슬람 사회는 종교적 형제애와 사회적 책임을 위하여 응당 치러져야 할 기부금을 거둔다. 기부금은 이러한 형제애와 책임을 의식하여 사랑과 동정과 관심이 교차하는 속에서 지불된다. 이슬람 사회의 성원 각자는 어떠한 식으로든지 결실을 거두거나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동료신자들의 전체 복지에 진정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무한히 베풀어주신다. 베풀 수 없는 수혜자는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베풀어주는 것에 대하여 동료 기부자들이 내놓은 기부금을 받게 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모두가 서로 어울려 하나님의 마련을 향유하는 것이니 이날은 정녕 훌륭한 결실의 날이 될 것이다.

6. 각 이-드는 용서의 날이다. 이날의 집회에 모인 무슬림 모두는 온 마음을 다하여 용서와 강한 신앙심을 간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을 다하여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보증하신 터이다. 이 순수한 대회, 고도로 영적인 집회에서 무슬림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적으나마 악감을 품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가 부끄러워 질 것이다. 진정한 무슬림이라면 이 형제끼리의 영적인 대회에 깊이 감동되어 어떤 악감이 생기더라도 이를 극복하게 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란히 이 날의 정신에 호응하여 자기의 마음과 영혼을 순화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누가 자기에게 해를 입혔더라도 그를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신도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며 용서를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고도로 헌신적인 대회의 정신이 용서해야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용서를 베풀 때 하나님의 용서의 미덕이 자비롭게 시현되고 또 무슬림 상호간에 이런 미덕이 오고 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용서의 날로서의 이-드의 특징이다.

7. 각 이-드는 평화의 날이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수련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이룩한 무슬림은 하나님과 신성 불가침의 평화조약을 굳게 체결한 것이다. 일단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사람은 자신과 평화를 이루고 결국 세계와 평화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이-드를 올바로 경축하는 무슬림은 실제로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평화협정의 체결을 경축하는 것이니, 이것이 평화의 날로서의 이-드의 특징이다.

평화와 감사의 날, 용서와 도덕적 승리의 날, 훌륭한 결실과 주목할 만한 성취의 날, 그리고 기념 축제의 날이 곧 이-드인 바, 이것이 이슬람의 이-드의 본연의 의의인 것이다. 이슬람의 이-드는 이 모두이면서 동시에 그 훨씬 이상이다. 그것은 이슬람의 날이며,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이다.

축제(이-드) 예배(쌀라뚤 이-드)의 거행 (up)

1. 금요예배를 볼 때처럼 예배자 각자는 각별히 신경을 써서 단정하고 말쑥한 차림새로, 활기차게 이-드 집회에 임해야 한다. 마스짇 혹은 대회장소에서 실제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구두로 예배를 올린다. 이것을 따크 비-르라 하는데, 장말(章末)에 보면 나와 있다.

2. 이-드 예배 시간은 일출 시간 이후와 정오 이전의 사이다. 아잔이나 이까마는 할 필요가 없다. 예배는 두 라카로 이루어지는데 매 단위에서 이맘은 꾸란의 파티하와 다른 한 구절을 들릴 수 있게 낭송한다.

3. 이맘은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라 말하며 예배를 인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 다음에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한다. 손을 양쪽 귀로 올렸다가 말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양편으로 내린다. 세 번째 따크 비-르(말하기)가 끝나자 이맘은 다른 예배를 볼 때처럼, 배꼽아래에서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갠다. 예배자는 한 동작 한 동작씩 이맘을 따라 행하며 말과 행동을 이맘과 정확히 일치시킨다.

4. 첫 번째 라카가 끝나면 이맘은 일어서서 두 번째 라카를 준비하며 알라후 아크바르라 말한다. 다음에 첫 번째 라카에서 한 것처럼 같은 동작을 취하면서 같은 말을 세 번 더 한다. 그리고 회중도 같은 방식으로 따라 한다.

5. 예배 두 라카가 끝나면 이맘은 설교를 행한다. 설교는 이부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 잠깐 휴식한다. 제 1부는 알라후 아크바르라는 말을 아홉번 되풀이함으로써 시작되며, 제 2부는 같은 말을 일곱 번 되풀이함으로써 시작된다. 이어 설교에 들어가면 금요일 설교에서 하는 것처럼 훈계와 충고를 펴 나간다.

6. 그해 첫 번째 이-드 설교에서 이맘은 싸다까 뚤-피뜨르(단식의 자선)문제를 주지시켜야 한다. 이것은 의무적인 세금인 바, 이것을 낼 수 있는 모든 무슬림은 그것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끼의 정식 식사나 그에 상당하는 대가를 베풀어야 한다. 식구가 딸린 경우, 매 식구마다 같은 식으로 베풀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기와 식구를 합해서 네 명인 경우, 최소한의 네 끼의 정식 식사나 그에 상당하는 대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배보다 아주 일찍 이러한 자선을 베푸는 것이 훨씬 보람있고 바람직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축제의 즐거운 기분으로 그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7. 두 번째 이-드의 설교에서 이맘은 희생의 의무를 주지시켜야 한다. 이둘-아드하(희생제)일에 자력이 있는 모든 무슬림은 제물을 바쳐야 한다. 한 가구 당 양이나 염소 한 마리면 족하다. 이-드일에 예배를 보고 나서 희생동물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이틀째 혹은 사흘째 잡는 것도 인정된다. 희생동물의 고기에 관하여 성꾸란은 이렇게 지시한다.

‘그 고기를 먹고, 가난하나 만족하는 사람과 구걸하는 자…에게 먹일지니라’(꾸란, 22:36)

같은 곳에서 성 꾸란은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고기에 관심이 없으며 또 그 고기를 취하지도 아니 하시는 바, 그 분이 취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숭배자들이 보이는 경건함이라고 단언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드 예배는 이른 아침의 의무(파르드)예배를 대신하지 않으며 그 자신 역시 다른 예배에 의해 대신될 수 없다.

두 이-드 예배 이전 그리고 두 번째 이-드에 이어 삼일동안 거행되는 정규집회 이후에 올려지는 따크 비-르를 일컬어 따크비-룻 따쉬리-끄라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알라후 아크바르,(3번)

라 일라하 일랄-라.

알라후 아크바르(2번) 왈 릴-라힐-

함두

알라후 아크바르 카비-라

왈-함두릴-라히 까씨-라

와 수브 하날 라히 부끄러딴

와 아씨-란

라 일라하 일랄-라후 와흐다

싸라까 와 아드하, 와 나싸라

압다,

와 아 앗자 준다후 와 하자말 아흐자바

와흐다후 라-일라하 일랄-라후 와라

나흐부두 일라-이-야후 무크리씨-나

라훗 디-나 왈라우 까리할-까피룬

알라훔마 쌀리 알라-싸아디나-무함맏

와왈라-아-리 싸이디나-무함맏

와알라-아스하-비 싸이디나-무함맏

와알라-안싸-리 싸이디나-무함맏

와알라-주르리-야띠 싸이디나-무함맏

와 쌀림 따쓰리-만-까씨-란

이 따크 비-르의 뜻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외에 신은 없도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니(2번), 찬미가 그분의 것이다.

정녕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

넘치는 찬미가 그분의 것이로다.

주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하나님 곧 한 분이신 참하나님 외에 신은 없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당신의 종(무함맏)을 후원하시며

당신의 용사들에게 빛나는 승리를 안겨 주고, 동맹한 적군을 가차없이

무찔러 버리시도다. 하나님 외에 신은 없나니 우리는 오직 그분만을

숭배하여 진정으로 헌신하노라 비록 불신자들이 분을 낸다 하더라도.

오 하나님! 우리의 주인 무함맏과,

우리의 주인 무함맏의 백성들과,

우리의 주인 동료들과,

우리의 주인 무함맏의 지지자들과,

우리의 주인 무함맏의 아내들과,

우리의 주인 무함맏의 자손들을 높이사, 축복하여 주옵시며

저들 모두를 큰 화평으로 맞이하여 주옵소서

약식 예배 (up)

1. 집을 떠나 48마일 이상을 갈 작정으로 여행 중이라면, 의무 예배 네 라카를 각 두 라카로 줄여야 한다. 이러한 약식 예배는 정오(주흐르) 예배, 이른 오후(아스르) 예배, 밤(이샤) 예배에 적용된다. 이른 아침(파즈르) 예배와 해질녘(마그립) 예배는 변함없다.

2.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도 거기에 15일 이상 머물러 있을 작정이 아니라면 이러한 편의는 그대로 유효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약식 이전의 예배를 원래의 라카대로 올려야 한다.

3. 이런 조건에서 여행하는 동안 이른 아침 예배(파즈르)의 순나 두 라카와 밤 예배(이샤)에 따르는 위뜨르를 제외하고는 모든 추가 의무 예배(순나)가 면제된다.

예배를 금하는 때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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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의무 혹은 추가 의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금지된다.

1. 해가 떠오르고 있을 때

2. 해가 남중에 있을 때

3. 해가 떨어지고 있을 때

4. 월경기간이나 해산, 수유로 인해 행동이 부자유스러운 기간에 있을 때

5. 부정을 탔을 때, 일부 전부를 불문한다.

예배 지체의 벌충 (up)

1. 일반적으로 무슬림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은, 지체하는 합당한 사유가 없을 경우 벌받을 죄에 해당한다.

2. 해산하였거나 월경 중인 여자 그리고 정신이상이거나 한동안 의식불명인 사람을 제외하고 무슬림 각자는 지체된 의무 예배를 벌충해야 한다.

3. 지체된 예배를 벌충할 때는, 원래의 형태대로 올려야 한다. 예를 들어 지체 예배가 바로 약식 예배라면, 약식대로 올려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정식 예배를 올려야 한다.

4. 지체 예배 상호간 그리고 지체 예배와 현재 예배 상호간에는 순서를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간상 맨 처음 예배를 맨 먼저 올려야 한다. 다만 예배를 너무 많이 놓쳐서 일일이 그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거나, 지체 예배와 현재 예배를 다 올릴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경우에는 현재 예배를 먼저 올리고 지체 예배를 나중에 올려도 된다. 아무튼 무슬림은 자기가 아는 한 자신의 기록에 오점이 없으며 놓친 예배도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위 예배 (up)

이 예배는 라마단 달의 특징인 바, 밤(이샤) 예배 다음에 올려진다. 여덟 내지 스무 라카로 이루어지는데 두 라카씩 올리고 각 두 라카 사이에 잠깐 휴식하게 된다. 이 예배는 집단적으로 그리고 밤 예배의 마지막 부분인 위뜨르 이전에 올리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예배의 무효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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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행위 중 어느 하나라도 하면, 그 예배는 무효가 된다.

1. 예배 행위나 동작에서 이맘을 앞지르는 행위

2. 예배 중 먹거나 마시는 행위

3. 예배의 진행규정에서 벗어나는 말을 하는 행위

4. 멕카 방향으로부터 위치를 바꾸는 행위

5. 예배의 행위나 동작 이외의 행위나 동작을 노출시키는 행위

6. 세정을 무효화시키는 배설행위, 예를 들어 소변, 대변, 방귀, 혈액 유출 등

7. 기립 꾸란 낭송, 루꾸, 수주드 등과 같은 예배의 필수적 행위 중 어느 하나를 지키지 않는 행위

8. 남자의 경우, 예배 도중 배꼽과 무릎 사이를 노출시키는 행위, 여자의 경우, 손 얼굴 발 이외의 신체부분을 노출시키는 행위

무효가 된 예배는 제대로 다시 올려야 한다.

장례예배(쌀라둘-자나자) (up)

1. 고인이 된 무슬림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공공의 의무(파르드 키파야)다. 이것은 무슬림 여러 명이 예배를 올려야 하며, 당시에 참석한 몇 명의 무슬림이 예배를 올리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다른 무슬림들에게는 책임이 면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2. 무슬림이 죽으면, 전신-세정(우두)하는 노출부분에서 시작한다-을 비누나 다른 세제 혹은 소독제로 여러 차례 씻어내어 눈에 띄는 불결물을 모두 없애야 한다. 시신을 아주 깨끗하게 씻어 냈으면 흰 무명 천으로 시신을 감싸서 신체의 모든 부위를 가린다.

3. 다음에 시신을 영구차나 관에 넣어 예배장소로 운구한다. 예배장소는 마스짇이나 기타 깨끗한 구내로 한다. 시신의 위치는 멕카쪽으로 얼굴을 향하게 잡는다.

4. 예배 참석자 전원은 먼저의 세정이 유효한 상태에 있지 않는 한 세정을 해야 한다. 이맘은 시신 옆에 서서 멕카의 끼블라를 향하고 피인도자들은 이맘 뒤에 도열한다.

5. 이맘은 손을 양쪽 귀로 올려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인을 위해 예배드리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라 말한다. 예배자들은 이맘의 인도를 따라서 이맘이 먼저 한 다음에 다른 예배처럼 배꼽 아랫부분에서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갠다.

6. 다음에 이맘은 다른 예배에서 통상 낭송되는 “싸나”와 파티하 만을 나직한 목소리로 낭송한다.

7. 이 단계에서 이맘은 양손을 올리지 않고 알라후 아크바르라 말하고 따쉬아 훗 제 2부(“알라 훔마 쌀리 싸이디나 무함맏”에서 시작하여 끝까지)를 낭송한다.

8. 다음에 양손을 올리지 않고 알라후 아크바르라 말하며 세 번째 따크비-르를 올리고 적당한 말을 생각해서 기도(두아)를 드리되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좋다.

알라훔마 그피르리 하이이나-와 마이이띠나-와 샤히디나-와거-이비나-, 와자까리나-와운-싸-나 와써기-리나와 까비리나-. 알라훔마 만 아흐야이 따후 민나-파아흐이히 알랄-이슬람와만 따와파이따후 민나-파따와파후 알랄-이슬라-미 알라훔마라-따흐림나-아즈러후 와라-따프 띤나-나바아 다후.

“오 하나님! 저희의 삶과 죽음에 용서를 베푸시며, (여기에)있는 이들과 없는 이들, 젊은이와 노인들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게 용서를 베푸소서. 오 하나님! 저희들 중 당신께서 삶을 허락한 사람은 누구든지 이슬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어 주시오며, 저희 중 당신께서 죽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앙 안에서 죽을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고인을 잃음에 당하여 저희가 인내하오니 그 보상을 저희에게 거두지 마시오며 저희로 고인을 따라 시련을 당하지 않게 하옵소서”

9. 다음에 양손을 올리지 않고 네 번째 따크비를 하고 이어 다른 예배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좌우를 향하여 평화의 인사말을 한다. 기억해 둘 것은 뒤에 도열한 예배자들은 이맘의 인도를 따라 단계적으로 동작하고 저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같은 내용을 낭송해야 한다는 점이다.

10. 예배를 마친 후, 얼굴을 멕카 방향으로 두고 시신을 내려 매장한다. 시신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비쓰밀-라히 와빌-라히, 와알라-밀라띠 러쑤-릴라-히 쌀랄-라-후 알라이히 와 쌀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사도의 순나(전통)에 따라 고인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평화가 내려지이다.”

이것 말고도 달리 적절한 기원을 할 수도 있다. 고인이 사춘기 이전의 아이인 경우에는 같은 방식으로 예배를 올린다. 세 번째 따크비르 이후 앞에서처럼 길게 기도하는 대신, 예배자는 이렇게 말한다.

“알라훔마-즈알후라니-파라딴-, 와즈알후라나-두크란-, 와즈알후라나-싸-피안 와무싸파 안”

“오 하나님! 저를 우리의 선구가 되게 하시고 저를 우리의 상, 우리의 보배가 되게 하시며 우리의 탄원자가 되게 하여 저의 탄원을 들어 주업소서”

장례예배는 시작부터 끝까지 선 자세로 올린다. 장례순서 하나가 지날 때마다, 그것이 무슬림이 하는 순서들이니, 무슬림 모두는 선 자세로 고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남자의 염(殮)은 남자가 하고 여자의 염은 여자가 한다. 여자라도 자기의 남편은 염할 수 있고 남녀를 불문하고 어린 자식은 염할 수 있다. 염할 때는 손에 장갑을 끼거나 헝겊을 감아야 한다. 그리고 시신의 음부는 눈에 띄지 않게 염해야 한다.

무덤은 표가 나게 세우되 소박하게 해야 한다. 시신은 규격에 맞는 흰 무명천으로 덮어야 한다. 무덤을 사치스럽게 만들거나 시신에 좋은 옷 등을 입히는 것은 이슬람식이 아니다. 그 것은 가당치 않는 허영이며 여러모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재산을 낭비하는 것이다. 고인을 매장할 때는 비용을 많이 들여 연회를 크게 여는 북미의 일부 무슬림들의 관습 역시 이슬람식이 아니며, 다른데 바치면 더없이 유익한 시간과 돈을 무책임하게 낭비하는 것이다.

예배 총론 (up)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무슬림의 정신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차 있어야 하며 그 혀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예롭게 하는 말로 분주해야 한다. 전술한 예배 유형 말고도 예언자 무함맏이 예배를 강권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런 경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비가 과도하게 내릴 때

2. 가뭄이나 비가 모자랄 때

3. 일식할 때

이런 경우 무슬림은 권고대로 자기가 원하는 라카 수와 시간만큼 예배를 올린다. 때에 따라서는 일반 예배에 규정한 식에 따르지 않고 달리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할 때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도움을 의지하며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자비를 간구함을 나타낸다.

1. 해산할 때

2. 결혼식을 올릴 때

3. 취침할 때와 기상할 때

4. 출타할 때와 귀가할 때

5. 화장실을 출입할 때

6. 여행을 떠나거나 도시에 들어갈 때

7. 승마하거나 승차할 때

8. 승선할 때

9. 재난을 당할 때

10. 거울을 대할 때

11. 목욕이나 세정 후에

12. 첫 수확물을 받을 때

13. 묘를 방문할 때

각 경우에 무슬림은 권고를 따라 적절하고 합당한 말로써 하나님을 기념하고 자기의 느낌과 깊은 사례를 표시한다.

이 경우에도 기도하는 식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아무 것이나 자기가 아는 기도를 올려도 된다. 다만 그 내용이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념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음에 적절한 기도 유형으로 쓰이는 특별한 실례 몇 가지를 들어 둔다.

1. 식사하거나 마시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비쓰밀 라히 와 알라-바러 까띨-라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더불어)

또 식사하기 전에 파티하를 낭송하는 습관을 들여도 좋다.

2. 식사를 마친 후에는 이렇게 말한다.

“알-함두릴라 힐-라디-아뜨아미나-와싸꺼-나-와자알라나-무슬리민-”

(찬미는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나니, 그분은 우리에게 베푸사 먹고 마시게 하시며 우리로 무슬림이 되게 하셨음이라.)

3. 문병갔을 때는 이렇게 말한다.

“아즈히빌-바으싸 럽반-나씨. 와쉬피 안딴-샤피, 라쉬파-아일라쉬파-우까 쉬파-안 라 유거-리 싸거만”

(병을 물리치사 쾌차하게 하소서 오 만인의 주님이시여! 당신은 치료하는 분이시니 당신이 치료하지 않으시면 치료할 수 없나이다. 쾌차를 주사 병이 떨어지게 하옵소서)

이제 파티하 따쉬아 훗 그리고 짧은 꾸란 귀절 몇 개를 다룰 차례다.

1.파티하(서장 혹은 알-함드) (up)

비쓰밀-라히르-라흐마-니-르-라히임,

알함두릴-라히럽빌-알-라미-인

아르러흐마-니르러 히임-,

말리끼 야우믿-디인.

이이야카 나으부두 와이이야카

나쓰따이-인,

이흐디낫-시러-딸-무스따까-임.

시러-딸-라지나 안암따 알라이힘

거이릴 마그두-비 알라이 힘

와랏-돠-라인. (아민)

이것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 이름으로 찬미를 받으소서. 온 세상을 소중히 하사 유지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분이시며 심판 날의 주인이시로다.

당신만을 저희가 숭배하오며, 당신의 도움을 저희가 구하오니 저희를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당신이 자비를 베푸신 사람들, 진노를 사지 아니하는 사람들, 길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길로… (아민)

2. 따쉬아 훗 (up)

(ㄱ) 제 1부

앗-따히야 뚜릴-라히 왓 썰라와뚜

왓 따이이 받뚜,

앗 쌀라-무 알라이까 아이유한 나비이유

와러흐마 뚤라-히 와바러 까-뚜후

앗쌀라-무 알라이나-와알라-이바-

딜라-힛 썰-리히-인.

아쉬하두 알라일라-하 일라-라-후

와흐다후라 싸리이깔 라후

와 아쉬하두 안나 무함마단-아브두후

와러쑤-루후.

해석

모든 존경과 모든 숭배와 모든 신성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마땅하도다.

오 예언자시여 당신에게 평화와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이 내려지이다.

우리 모두와 하나님의 의로운 종들에게 평화가 깃들어지이다.

저는 우직 하나님 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하오며,

무함맏은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언하나이다.

(이 부분은 세·네 라카로 이루어지는 예배에서 그 각 두 번째 라카 후에 낭송된다. 그 다음에 예배자는 기립하여 세 번째 라카를 준비한다.)

(ㄴ) 제 2부

알라훔마 쌀리 알라-싸이디나-무함맏

와 알라-알-리 싸이디나-무함마딘

까마-썰라이따 알라-싸이디나-

이브러-히-임.

와 바-리까 알라-싸이디나-무함

마딘-와 알라-알-리 싸이디나-

무함마딘-

까마 바럭크따 알라-싸이디나-

이브러히-임

와 알라-알-리 싸이디나-이브러

히-임.

필알-라미-인 인나까 하미-둔

마지-둔.

해석

오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의 지도자(주) 아브라함과 우리의 지도자 아브라함의 백성을 높이셨듯이, 우리의 지도자 무함맏과 우리의 지도자 무함맏의 백성을 높여 주옵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지도자 아브라함과 우리의 지도자 아브라함의 백성을 축복하셨듯이 우리의 지도자 무함맏과 우리의 지도자 무함맏의 백성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진실로 당신은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고, 영예로운 분이시나이다.

(2부로 된 따쉬아훗은 예배를 마치는 마지막 단위에서 낭송된다. 제 2부가 끝나면 평화의 말이 이어지고 예배는 완결된다. 장례 예배에서는 세 번째 따크비이르 이후에 제 2부만 낭송된다.)

3. 꾸란의 짧은 구절 (up)

(ㄱ) 수러뚤 이크라스

비쓰밀-라 히르러흐마-니르러히-임

꿀후왈-라후 아하드

알-라훗-싸마드

람야리드 와람유우라드

와람 야쿨라후 꾸푸완-아하드

해석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하라 :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곧 한 분이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만인의 간구를 받으시는 분이시라

그분은 낳지도 태어나지도 아니 하시나니 그분과 동등한 자 없도다

(꾸란, 112장)

(ㄴ) 수러뚤 아스르

비쓰밀-라히르러흐마-니르러히-임

왈-아쓸르

인날-인싸 나라피-꾸쓰르

일랄-라디-나-와마누-와 아밀룻-쌀

리하-띠 와따와-써우빌-학끼 와따와-

써우 빗-써브리

해석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금을 통하여) 시간을 증거하나니

진실로 사람은 손해를 보고 있음이라

그러나 신앙을 지니고 의를 행하며 뜻을 같이 하여 진리와 다함 없는 인내를 서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 하도다.(꾸란 103장)

이런 짧은 구절 중의 하나가 처음 각 두 라카에서 파티하 이후에 낭송된다. 셋째, 넷째 라카에서는 파티하 이외의 낭송은 요치 않는다.

꾸란에는 짧고 쉬운 구절이 많이 있다. 무슬림 각자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가급적 많은 꾸란 구절을 암기해야 한다. 또한 꾸란의 가르침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꾸란을 읽는 것 자체가 고상한 숭배 형식이며 헌신의 보람찬 시간이다.

단식(싸움) (up)

또 하나의 이슬람 특유의 윤리적 영적 특징은 단식제도의 규정이다. 단식은 문자적 정의에 의하면, 이슬람 력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달의 전체에 걸쳐 동트기 전부터 해질녘까지 음식, 음료, 성교, 그리고 흡연을 “완전히” 삼감을 뜻한다. 그러나 이슬람 단식의 의의를 이런 문자적 의미에 한정시키는 것은 몹시 잘못된 생각이다.

이슬람이 이런 비길 데 없는 제도를 도입한 것은 마치 항상 자라며 무한한 덕과 아주 귀중한 산물을 생출하는 나무를 심은 격이었다. 다음에 이슬람 단식의 영적 의의를 설명한다.

이슬람 단식은:

1. 진정한 사랑의 원칙을 가르쳐 준다. 단식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곧 사랑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아는 사람이다.

2. 창조적 희망감과 낙천적 인생관을 갖게 해 준다. 단식을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싶어하며, 그분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진정한 덕, 곧 효과적으로 헌신하고 정직하게 봉납(捧納)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덕을 심어 준다. 단식은 하나님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방심함이 없는 건전한 양심을 배양시킨다. 단식하는 사람은 누가 보든, 안 보든, 단식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단식을 할 때는 세속적 권위에 의해 행동이 저지되거나 단식이 강요되는 일이 없다. 단식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남이 보든, 안 보든, 충실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한다. 건전한 양심을 배양시키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5. 인내심과 비이기심을 고취시킨다. 단식을 할 때는 박탈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인내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박탈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확실히 이렇게 직접 체험해 봄으로써 몇 날,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생필품을 박탈당한 사람이 당하는 극심한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인도주의적 의미에서 이런 체험이 갖는 의의는 이런 체험을 해 본 사람이 누구보다도 빨리 같은 인간으로서의 처지를 동정하여 필요한 도움을 베푼다는 데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비이기심과 진정한 동정심을 웅변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6. 절제와 의지력의 효과적인 실습이다. 단식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욕을 훈련하고 육체적인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곧 인격자요, 의지력과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다.

7. 투명한 영혼으로 초월의 경지에 들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여 경쾌한 몸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이 모두가 위를 가볍게 해서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인 바 의학적 지식과 생물학적 법칙 그리고 지적인 경험이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8. 현명한 저축과 건전한 가계 예산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덜 먹고 덜 마시면 그만큼 돈과 노력도 덜 드는데 상례(常例)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식은 가정경제와 가계예산을 익히는 영적인 학기(學期)다.

9. 노련한 적응 기술을 터득시킨다. 단식할 경우, 일상생활의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는데 주목하면 이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활 방식의 변화를 통하여 새로운 체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새로운 규칙에 순응하여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결국 현명한 적응감각과 예기치 않은 곤경을 이겨낼 수 있는 자발적인 힘이 길러지게 되는 것이다. 건설적인 적응력과 동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이점에 있어서 단식이 미치는 효과를 쉽게 인식할 것이다.

10. 심신 단련과 건강한 생존의 기초를 닦아준다. 성월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또 매년 성월 마다 단식을 규칙적으로 지킨다면 확실히 고도의 단련과 훌륭한 질서감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를 쉬게 하여 소화기관을 이완시키면 위를 혹사시켜 초래되는 해가 영혼은 물론이고 신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완시킴으로써 신체가 평소의 무질서와 단절에서 해방되고 영혼이 계속해서 순수하고 평화롭게 빛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11. 사회적 귀속, 화합과 형제애, 하나님과 법 앞의 평등의 참다운 정신을 진작시킨다. 이러한 정신은 단식을 하는 사람이 그 자신 전체 무슬림 사회의 일원으로서 같은 방식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동기로, 같은 목적을 위해 같은 의무를 이행하고 있음을 의식한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당연한 결과다. 이처럼 훌륭한 이슬람의 제도에 견줄만한 것이 역사상 어느 시대인가에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회학자는 아무도 없다. 고금을 막론하고 귀속 화합, 형제애, 평등을 외쳐오기는 했지만, 이러한 외침에 대한 반향은 미미하였고 또 그 성과라고 해 봐야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슬람의 인도의 빛이 없다면 사람들이 어디서 자신들의 목표를 찾을 수 있겠는가?

12. 자기 안정과 자제,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보존, 승리와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처방이다. 이러한 결과는 생생한 현실로써 단식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속에 반드시 나타난다. 단식을 제대로 하면, 자제하고 정욕을 완전히 다스리며 욕망을 훈련하고 모든 악의 유혹을 물리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안정시키고 그 존엄성과 성실성을 회복하며 악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입장에서는 것이다. 일단 이 모든 것을 달성하면 마음의 평화를 이룬 것인 바, 마음의 평화는 하나님과, 결과적으로 온 우주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루는 원천이다.

이제 혹자는 이런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질지 모른다. 이슬람의 단식 제도가 그런 것이라면 또 그것이 이 점에 있어서의 이슬람의 실상이라면, 어째서 무슬림들은 유토피아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의에 대해서는 다만 무슬림들이 역사상 어느 시대에 유토피아에서 삶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유토피아 실현은 역사상 한 현상으로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업적이었다.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이슬람 이외의 어떤 종교나 사회제도도 일찍이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종교나 사회제도의 유토피아는 항상-때로는 분명하지만 때로는 막연한, 때로는 가깝지만 대부분이 요원한-이론 혹은 소망과 꿈의 범주에 머물렀지만 이슬람의 유토피아는 실현되었고 능력을 한껏 발휘하여 연출 실천되었다. 인간적 실천적 의미에서 이것은 이슬람의 유토피아가 바로 지상에서 재현될 수 있으며, 확고한 기초와 실천성 있는 제 원칙 위에 세워짐을 뜻한다.

오늘날 이슬람의 유토피아가 건설되고 있지 못한 이유는 복잡다난하지만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논의를 단식제도에 한정시켜 설명하면, 많은 무슬림들이 자신들에게 불행하게도 단식을 하지 않으며 고작 한다는 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단식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진정한 의의를 알지 못하여 결국 단식을 하면서도 거의 혹은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무슬림 들이 전체적으로 단식의 특권을 제대로 누리고 있지 못한 이유다.

또 혹자는 이슬람의 단식만 그런 게 아니다. 유태교의 유월절, 기독교의 사순절, 간디형 등과 같은 다른 유형의 단식도 마찬가지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무슬림들은 자기네 단식에 대해서만 독단적인 주장을 펴는 것인가?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예언자 중 그 누구라도 비방하거나 진리를 배척하거나 신성한 종교를 왜곡시키는 것은 무슬림으로서의 우리의 종교적 원칙과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아무 거리낌없이 이런 무책임한 죄를 범할 수 있겠지만 우리 무슬림은 그렇지 않다. 일단 이런 저급한 윤리 아니 부도덕에 빠지면 사실상 이슬람의 대열에서 벗어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단식의 제도가 역사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무슬림에게 이런 제도를 규정하셨듯이, 이슬람 이전의 사람들에게도 규정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타의 단식 유형을 규정하신 정확한 형태와 고유의 방식을 알지 못한다.-아는 사람이 많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고 사실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이러한 이슬람의 제도를 다른 유형의 단식과 비교함으로써 우리의 주장을 실증할 수 있다.

비교 단식론 (up)

1. 타종교나 교의, 철학이나 교리의 경우에 단식하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음식물 혹은 물질을 삼가지만 그 대신-역시 물질적 성격을 띠는-다른 것을 섭취하여 자기 마음대로 배를 한껏 채울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영적 기쁨과 도덕적 자양을 얻기 위해서 물질적 성격을 갖는-음식, 음료, 흡연 등을 삼간다. 무슬림은 물질을 전혀 섭취하지 않고 공복 상태를 유지한다. 영혼을 평온과 축복으로, 마음을 사랑과 동정으로, 심령을 경건과 신앙으로, 정신을 지혜와 결의로 채우기 위해서다.

2. 타종교나 철학에서의 단식의 목적은 항상 부분적이다. 영적 목적이나 신체적 필요 혹은 지적 수련을 위한 단식이지 결코 이 모두를 통틀어 그 목적으로 하는 단식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단식은 이러한 모든 유익과 기타 많은 목적 곧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인도주의적, 사적, 공적, 개인적, 집단적, 내적, 외적, 지방적, 국가적, 제목적 모두를 위한 것이다.

3. 비이슬람 단식은 어떤 물질을 부분적으로 삼가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만, 이슬람식 이 외에도 헌신과 숭배, 자선과 꾸란 연구, 사교성과 활기, 자기수양과 양심의 자각을 수반한다. 따라서 단식하는 무슬림은 자신이 전혀 딴 사람이 됨을 느낀다. 내면과 외면 모두가 순수하고 깨끗해지며 영혼이 투명해져서 완전에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나님과 아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아는 한, 또 일상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건대, 다른 도덕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세속의 인연을 뿌리뽑지 않는 한 자신의 도덕적 목적을 이루거나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세속적 관심사와 이혼하고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등한시하며, 단식이 반드시 끼게 되는 모종의 고행이나 엄한 수도생활에 의지할 필요가 생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하는 이런 종류의 단식은-여태까지 그래 왔듯이-정상적인 생활을 등진 굴욕적인 은둔 생활을 감추기 위한 구실로 이용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슬람의 단식은 실생활과의 이혼이 아니라 그것과의 행복한 결혼이며, 은둔이 아니라 영적으로 무장한 침투며 등한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풍요케 함인 것이다. 이슬람의 단식은 종교를 일상 생활과 이혼시키지 않으며 영혼을 육체와 분리시키지 않는다. 깨뜨리지 않고 조화시키며, 풀어지게 하지 않고 배어들게 하며, 해체하지 않고 메우고 벌충하는 것이 바로 이슬람의 단식이다.

5. 이슬람의 단식 시간표까지도 주목할 만한 현상을 보인다. 단식시기가 일년 중 어느 때에 고정되어 불변하는 경우와는 달리, 이슬람에서는 그 시기가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달과 더불어 온다. 이슬람력은 태음력인데 달의 경과는 달의 위상변화(位相變化)에 따른다. 이럴 경우, 이슬람의 단식은 특정 연수에 걸쳐 일년 네 계절을 포함하여 가을과 봄을 거쳐 여름과 겨울 사이를 교대로 왕복 순환하게 된다. 음력의 성격상 라마단 달이 예를 들어 어느 해에는 1월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느 해에는 12월이 될 수도 있다. 두 해에 걸쳐 있는 경우도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무슬림이 다양한 차원에서 단식의 도덕적인 경험을 하고, 상이한 기후의 상이한 계절 곧, 때로는 낮이 짧고 추운 겨울에 때로는 낮이 길고 무더운 여름에 때로는 그 사이에 영적인 묘미를 맛보게 됨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의 다양성은 언제나, 활기에 찬 이슬람 제도의 인상적 특징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무슬림의 준비성 역동성, 적응성을 끊임없이 보여 준다. 이것은 확실히 이슬람의 가르침을 구성하는 건전하고 주목할 만한 요소다.

단식 기간 (up)

이미 지적한 대로, 단식 의무기간은 라마단 달이다. 하루의 단식 기간은 동트기 전에 시작해서 해가 떨어진 직후에 끝난다. 보통은 달력을 보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지만, 이런 달력을 이용할 수 없으면, 자기가 찬 시계나 태양의 위치 혹은 지방신문을 보든지 기상대 등에 문의해야 한다.

라마단의 단식은 책임을 질 수 있고 건강한 무슬림(무 칼리프) 모두의 의무다. 한편 이외에도 예언자 무함맏의 관습(전통)을 따라 단식을 강권하는 경우가 있다. 매주의 월요일과 목욕일, 라마단의 도래를 예고한 두 개의 달 곧 라잡 달과 샤반 달의 각 며칠, 이둘-피뜨르일 다음의 6일이 이에 해당한다. 더욱이 이-드일과 금요일-무슬림은 이날 단식할 수 없다-을 제외하고 일년 중 어느 달 어느 날에 단식하든 항상 보상이 따른다. 그러나 되풀이 말하지만 라마단의 단식-달의 위상에 따라 29일이 될 수도 있고 30일이 될 수도 있다.-만이 의무 단식이다. 라마단의 단식은 이슬람의 지주이며, 합당한 사유 없이 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은 벌받을 중죄다.

하나님께서는 단식이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바를 아시기에 맹세를 파하는 사람에게 대안으로서 3일간의 단식을 명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가 자기 어머니처럼 자신에게 금기라고 선언-이슬람 이전의 낡은 풍습-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경솔하고 무책임한 언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속죄하려면 대안으로서 두 달 동안 계속해서 단식을 해야 한다.(꾸란, 2:183-185, 5:92, 58:1-4[6])

누가 단식해야 하나 (up)

라마단의 단식은 남녀를 불문하고 다음의 자격을 갖춘 무슬림 모두의 의무다.

1.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할 것, 다시 말하면 정신이 온전하고 신체적으로 능력이 있을 것.

2. 성년이거나 사춘기, 분별연령-보통 14세 내외-에 달해 있을 것. 이 나이가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쉬운 데서부터 이러한 좋은 습관을 시작하도록 권해야 한다. 그리하면 아이들이 사춘기에 달할 때, 정신적 단식을 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

3. 주소지, 고향의 도시, 농장, 점포 등에 머물러 있을 것. 다시 말해서 50마일 이상 여행 중이 아닐 것 ;

4. 단식을 하면 건강이 악화될 염려가 있는 환자들. 이 사람들은 병에 걸려 있는 동안에는 단식을 후일로 연기했다가 나중에 빠질 날 수 만큼 벌충하면 된다.

5. 50마일 이상의 거리를 여행 중에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여행 중에만 일시적으로 단식을 파하고 후일에 빠진 날 수 만큼 벌충하면 된다. 그러나 꾸란의 언급대로 특별한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 한 될 수 있는 대로 단식을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좋다.

6. 임산부와 수유기의 산모 역시 단식을 하면 자기 자신이나 유아의 건강에 해로울 염려가 있는 경우, 단식을 파할 수 있다. 그러나 뒤로 미뤘다가 빠진 날 수 만큼 단식을 벌충해야 한다.

7. 월경기간(최장 10일)이나 산욕기간(최장 40일)중의 부녀자들 이런 부녀자들에게는, 설사 단식을 할 수 있거나 하기를 원하더라도, 단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회복할 때까지 단식을 연기했다가 다음에 빠진 날 수 만큼 벌충해야 한다. 이슬람에서 하는 여타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이 경우에도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 분의 명에 응하여 그 분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행동에 착수한다는 의사를 밝혀야 한다.

라마단의 단식 중 고의적으로 먹거나, 마시거나, 흡연하거나, 또는 성교를 하면, 그날의 단식은 무효가 된다. 무엇이든지 입을 통하여 몸 속으로 들어가게 해도 그날의 단식은 무효가 된다. 합법적인 사유 없이 고의적으로 이런 행위를 하면, 벌로 60일 동안 계속해서 단식을 하거나 두 번째 대안으로서 단식이 무효가 된 날 수 만큼 단식을 하는 외에 60명의 가난한 사람들을 흡족하게 먹어야 한다.

라마단 기간 이외의 단식이 전기 “면제”라는 표제 하에 나열된 사람들처럼 합법적 사유 때문에 파해지는 경우에는 당사자는 나중에 빠진 날 수만큼 그 단식을 벌충해야 한다.

누구든 실수로 통상 단식을 파하는 행위를 한 경우 자기가 하는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은 순간에 그 행위를 멈추면 단식은 무효화되지 않으며 그대로 유효하다.

라마단의 단식을 마치는 즉시 싸드까뚤-피뜨르(파단의 자선)라고 하는 특별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일반적 권고 사항 (up)

특히 라마단 기간 중에는 다음의 습관을 지키라고 예언자 무함맏은 강권한다.

1. 동트기 전에 가벼운 식사를 할 것. 이것을 수흐르라고 한다.

2. 해가 떨어진 직후에 대추야자 세 개를 먹고 물 한잔을 마시며 이렇게 기도할 것. 알라 훔마 라카숨나, 와 알라 리즈끼까 아프 따르나(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저희가 단식하였사오며 이제 당신께서 저희에게 주신 음식으로 단식을 파하나이다.)

3. 가급적 식사는 가볍게 할 것. 예언자 무함맏이 말씀하셨듯이 사람이 채울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나쁜 것이 배(위)이기 때문이다.

5. 서로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고 인도주의적 봉사에 열을 올릴 것.

6. 꾸란 연구와 낭송에 더욱 힘쓸 것.

7. 최선을 다하여 인내하고 겸손하게 행할 것.

8. 오감과 정신 특히 혀의 사용에 각별히 유의할 것 ;

9. 부주의한 잡담을 삼가고 수상쩍은 거동은 모두 피할 것.

자선(자카) (up)

또 하나의 뛰어나게 주목할만한 이슬람의 제도이자 중요한 지주(支柱)는 자카다. 우리가 아는 한 꾸란의 자카라는 말과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에 상당하는 말은 타언어에 없다. 그것은 일종의 자선이나 희사 혹은 세금이나 십일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친절의 표시도 아니다. 자카는 이 모두를 합친 것이어서 그 훨씬 이상이다. 자카는 자기 재산에서 일정 비율을 공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다 풍요케 하는 영적인 투자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나 대의 명분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도 아니요, 약삭빠른 사람은 안내고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국가 세금도 아니다. 오히려 자카는 사회 전체를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무슬림들이 떠맡은 의무다. 꾸란의 자카라는 말은 자선, 희사, 십일조, 친절, 국세, 자발적 기부 등을 포함할 뿐 아니라, 이러한 모든 하나님을 지향하는 마음과 영적 및 윤리적 동기를 아울러 내포한다. 이것이 자카에 상당하는 말이 없는 까닭인 바, 이러한 특징은 하나님의 성서 꾸란의 비길 데 없는 독창성에서 연유한다.

자카의 문자적 의미는 단순한 청결이다. 이 말의 기술적 의미는 재산을 가진 무슬림이 정당한 수령자들에게 분배해 줘야 하는 현품이나 현금의 액수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카의 종교적, 영적 의미는 이보다 한층 심오하고 한층 생생하다. 자카의 인도주의적 사회 정치적 가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음에 자카의 광범위한 효과를 설명한다.

1. 자카는 재산가의 재산을 정화시키며, 그 재산에 더 이상 속하지 않고 정당한 수혜자들에게 분배해야 하는 몫을 공제하여 그 재산을 깨끗하게 한다. 자카를 지불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일정 비율의 재산을 즉시 올바로 분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제 그 몫에 대한 도덕적 법적 소유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리적, 영적 관점에서 보든 법적, 상업적 관점에서 보든 어느 모로 보나 부패요, 명백한 강탈이나 이는 불법적으로 소유한 몫 때문에 전체 몫이 부정해지고 위태롭게 됨을 뜻한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정당한 수령자들에게 고루 분배되면 몫의 나머지 부분도 깨끗하고 떳떳해진다. 깨끗한 자본과 떳떳한 재산은 영구적인 번영과 공정한 거래의 제 1요건이다.

2. 자카는 기부자의 재산을 정화시킬 뿐만 아니라 이기심과 재산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기부자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카는 질투와 시기, 미움과 불만을 제거하여 수령자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 대신에 기부자에 대한 선의와 따뜻한 호의를 마음속에 심어 준다. 결국 사회 전체가 정화되어 계급 투쟁과 의혹, 악감과 불신, 부패와 분열, 그리고 이런 류의 모든 해악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3. 자카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회선원들의 고통을 최소한도로 덜어 준다. 자카는 불운한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게 위로가 되겠지만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자기 재산을 늘려 가는 사람 모두에게는 성가신 간청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이것은 자카는 원래 비상조처에 불과하므로 여기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되고 자신과 남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기부자에게 있어서 자카는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득을 보라는 따뜻한 권유다. 관련 당사자 모두에 대해 자카는 직·간접적으로 보상이 풍부한 만큼 영적으로 투자해 볼만한 공개된 보물이다.

4. 자카는 이기적 탐욕과 사회적 불화, 파괴적 이데올로기의 침투에 대한 건전한 형태의 내부적 방위 수단이다. 기부자에게 사회적 책임의 정신을, 수령자에게는 안전감과 귀속감을 길러 주는 효과적인 도구의 구실을 한다.

5. 자카는 개인과 사회가 서로 화답하여 상호 작용하는 영적 인도주의적 정신의 생생한 시현이다. 자카는 이슬람이 개인 기업을 막거나 사유 재산을 죄악시하지는 않지만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본주의는 관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실증이다. 개인과 사회, 시민과 국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물질주의와 영성 사이에 온건하고 중도적이긴 하지만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노선(路線)을 취하는 이슬람의 일반 철학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 자카다.

자카율 (up)

연말에 현금이나 상품으로 대략 15달라 이상에 상당하는 재산을 소유한 모든 무슬림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최소한 2.5%의 비율로 자카를 내야 한다. 재산 액수가 현금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간단하다. 그러나 소유 재산이 증권이나 상품인 경우에는 매년 말에 자기 재산을 시가로 평가하여 최소한 재산 총가액의 2.5%의 비율로 자키를 내야 한다. 임대료 건물이나 산업과 같은 부동산에 투자한 경우에는 자카율은 재산 전체의 총가액이 아니라 총순수입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건물이나 가옥을 팔려고 내놓으면, 자카율은 재산 전체의 총가액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채권자의 경우, 채무자가 신용할 만한 사람이면 자기가 빌려 준 액수에 대해 자카를 지불해야 한다. 그 역시 확실한 자기 재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나 기억해야 할 것은 자카는 차감 순잔액에 대해서만 지불한다는 점이나 개인비용, 가족 용동, 필요 경비, 이행기채무(履行期債務)를 먼저 모두 지급하고 나서 자카는 차감순잔액에 대해서만 따진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2.5%라는 비율은 최소한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긴급사태가 발생하거나 구호의 필요가 생기는 경우에는 자카율에 한계가 없다. 많이 베풀수록 당사자 모두에게 그만큼 더 좋다. 자카의 배분은 수많은 기금 모금운동이 전개되는 제반 목적에 이바지한다. 자카 기금은 다른 모든 기금을 대신한다. 믿을만한 보고에 의하면, 이슬람통치의 역사상, 자카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대 이슬람 제국의 신민-무슬림, 기독교인, 유태인-모두가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가진 게 충분하였으며, 통치자는 거두어들인 자카를 국고에 보관해 두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카의 법이 올바로 시행되면 가난하거나 불쌍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막대한 잉여액마저 생길 정도로 국민에게는 부족한 것이 극소화되고 국고는 넉넉해진다.

공익의 실현을 위한 이러한 효과적인 수단이 발휘하는 끊임없는 힘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명이요, 법이라는 사실에서 연원한다. 그것은 사사로운 문제나 자발적인 기부가 아니라, 오히려 당사자가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지고 이행해야 하는 의무인 것이다. 자카는 일반적인 관심 속에 시행되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법이기 때문에 무슬림은 누구라도 이것을 등한시할 수 없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관계 당국이 민중을 대신하여 나서서 이 제도를 확립시키고 그것이 시행되도록 조처를 취해야 한다.

자카의 정당한 수혜자들 (up)

성 꾸란은 자카의 정당한 수혜자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불쌍한 무슬림,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

2. 가난한 무슬림, 생활비를 스스로 벌 수 있도록 자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

3. 새로 개종한 무슬림, 정착해서 생소한 필요에 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

4. 무슬림 전쟁포로, 몸값을 치르고 해방시켜 주기 위해 :

5. 빚진 무슬림, 급한 사정 때문에 진 빚에서 구해 주기 위해 :

6. 무슬림 통치자가 자카 징수를 위해 임명한 무슬림 고용인,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

7. 이슬람을 연구하거나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대의에 봉사하는 무슬림. 이들에 대한 몫은 비용을 충당하고 봉사를 계속해 나갈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8. 외국 땅에서 궁지에 빠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슬림 여행자.

자카의 정당한 수혜자는 연말에 무일푼이거나 가진 게 거의 없어서 (15달라 이하)자신의 필요에 응할 수 없는 사람이다. 가진 게 대략 15달라 이상 되면 자카의 수혜자가 아니라 기부자가 되어야 한다. 수혜자는 자기 몫을 받아서 시급한 필요에 충당하고도 15달라 정도 남는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받아서는 안 된다. 받는 대로 자격 있는 다른 수혜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자카는 전술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직접 분배할 수도 있고, 이들을 돌보는 복지 단체에 분배할 수도 있다. 총망하고 유망한 무슬림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 장학금 형식으로 분배해 줄 수도 있고, 복지 단체나 이런 대의 명분을 후원하는 공공단체에 보조금의 형식으로 분배해 줄도 있다.

무능력하거나 병약한 불쌍한 무슬림이 능력 있고 다만 얼마라도 벌 수 있는 무슬림보다 더 적격이다. 기부자는 최선의 판단으로 가장 합당한 수혜자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이 종교세를 대체하지 않는다. 이 종교세는 특별한 의무로써, 국가세금 이외의 별도로 계산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북미의 무슬림의 경우, 자선에 대해 일정액을 공제해 주는 세법을 이용할 수 있다. 먼저 자카를 합당한 수혜자에게 지불하고 나서 지불한 금액을 정당한 법적 공제액으로 청구해야 한다.

기부자는 이 의무를 이행했다고 해서 자만하거나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의무이행은 가급적 은밀하게 해야 한다. 선행을 전부 무효화시키는 위선이나 허영심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거나 기부했다는 것을 알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와 자극이 될 경우 그렇게 해도 좋다.

농축산물도 자카 의무의 대상이다. 자카로 지불해야 할 몫은 경우에 따라 다르며 자세한 논의를 요한다. 그러므로 독자는 법과 종교를 다룬 자세한 자료를 참조하기 바란다.

순례(핫즈)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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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마지막 지주이자 가장 훌륭한 제도의 하나는 핫즈 혹은 멕카 순례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 핫즈를 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정신적, 재정적, 신체적 능력을 갖춘 무슬림 모두의 의무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연령에 달해 있고 건강이 상당히 양호하며 재정적으로 능력이 있고 안전한 무슬림은 적어도 평생에 한 번 핫즈를 해야 한다. 여기서 재정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은 핫즈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자기 자신과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빚을 진 경우에는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 가진 게 충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핫즈 여정은 또 하나의 이슬람 고유의 특징이다. 그것은 여러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 그 목적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서로를 알고 공통의 문제를 연구하며 자신들의 전체적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무슬림들이 만나는 연례 최대의 신앙집회다. 또한 인류 역사에 등장한 최대의 정기 평화회의다. 핫즈 여정에서는 평화가 으뜸가는 주제다. 하나님과 자신의 영혼과 평화를 이루어야 하며, 무슬림 상호간과 동물과 평화를 이루어야 하고 새와 심지어 곤충과도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타인이나 형태를 불문하고 다른 생물의 평화를 방해하는 것은 엄금이다.

2. 이슬람의 보편성과 무슬림의 형제애와 평등을 건전하게 현현한다. 사회의 각계각층, 지구의 구석구석으로부터 무슬림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여 멕카로 모인다. 무슬림들은 똑같이 간편하게 옷을 입고, 같은 규정을 지키며 같은 시간에 같은 식으로 같은 목적을 위해 같은 기원을 드린다. 왕이 따로 없다. 하나님에 대한 모두의 충성이 있을 뿐이다. 귀족이 따로 없다. 겸손과 헌신이 있을 뿐이다.

3. 무슬림의 하나님에 대한 서약과 물질적 이익을 버리고 하나님께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더욱)굳게 한다.

4. 순례자들에게 예언자 무함맏의 영적, 역사적 환경을 숙지시켜, 뜨거운 감화를 받게 하고 신앙심을 강화시킨다.

5. 아브라함과 이쉬마엘(이브라힘과 이스라엘)이 행한 신성한 의식을 기념한다. 아브라함과 이쉬마엘은 지상 최초의 하나님의 성전 곧 멕카(막카)의 카바를 최초로 순례하였다고 한다.

6. 심판날의 대회를 상기시킨다. 이 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게 서서 자신들의 마지막 운명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인종이나 혈통의 우수성을 주장할 수 없는 날이 이 날이다. 또한 아브라함 시대부터 일신교의 중심지였고, 마지막 때까지 변함없이 순수한 일신교인 이슬람의 중심지로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오직 멕카만이 현세계에서 하나님에 의해 성역화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핫즈를 하다 보면, 그것이 영적으로 풍요케 하고 도덕적으로 재무장하는 여정, 열렬하게 헌신하고 수련의 체험을 하는 여정, 인도주의적 관심과 고무적인 지식의 여정-이 모든 것이 이슬람의 하나의 제도 속에서 종합된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핫즈 기간 중에 따라야 하는 규칙과 단계를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진다.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는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룬 저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핫즈 여정 전체에 걸쳐 항상 박식한 안내자들이 있어서 순례자들은 이들로부터 올바른 지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또 하나 지적해 둘 것은 헌신의 전 여정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무슬림들이 멕카에 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지, 돌에 입을 맞추거나, 어떤 인간, 혹은 반신 인간을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카바의 흑석에 입을 맞추거나, 그것을 만지는 것은 임의적 행동이지 의무나 명령이 아니다. 흑석을 신앙하거나 거기에 어떤 미신적 속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입을 맞추거나 만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신앙의 대상이다. 카바를 개축할 당시, 카바의 기초에 흑석을 놓았던 예언자 무함맏에 대한 존경의 증거로서 또한 그분에 대한 사랑의 상징으로서만, 흑석에 입을 맞추고 그것을 만지고 가리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이 사건은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이 사건에서 무함맏은 중재자로 지명된 사람으로 나온다. 이슬람이 도래하기 수년 전, 카바를 개축하고 있을 당시, 흑석을 그 기초 위에 놓게 되었다. 그런데 누가 흑석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영광을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부족의 족장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문제는 매우 심각하였고, 성역에는 내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흑석은 돌 한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족장들은 이것을 극진하게 숭상하였다. 이 흑석이 아마 고대에 건축한 대사원의 유물로써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돌일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존중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런 돌은 이슬람과 무슬림에 관한 한 전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족장들은 자기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을 해결할 수 없게 되자, 맨 처음 온 사람에게 그 논쟁의 해결을 맡기기로 합의했다. 무함맏이 바로 맨 처음 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함맏은 천 조각에 그 흑석을 싸기로 결정하고 논쟁자들에게 그것을 함께 들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 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각 족장마다, 그 작업에서 한 몫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들은 무함맏의 현명한 결정을 흡족히 여겨 즉시 그대로 실행하였다. 이것이 흑석의 이야기에 내포된 교훈이다. 그러므로 순례자들이 흑석에 입을 맞추거나 손으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은 경의의 표시로서 현명한 중재자인 무함맏을 기념하는 행위인 것이다. 비교하면 이점이 더 뚜렷해진다. 망명했다 귀국하는 애국자나 싸움터에서 귀환하는 군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조국의 국경선에 당도하자마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예를 들어 국경선의 땅에다 입을 맞추거나 맨 처음 만나는 동포 몇 사람을 감정이 북받쳐 포옹하거나 경계표를 보고 감탄하는 등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은 정상적이고 수긍이 가는 행동으로 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애국자나 군인이 땅을 숭배하거나 자기 동포를 신격화하거나 경계표에 신적인 속성이 있음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례자들의 행동도 이와 마찬가지로 해석해야 한다. 멕카의 카바는 이슬람의 영적 중심지이며 모든 무슬림의 영적 조국이다. 순례자가 멕카에 당도하면 망명했다 귀국하는 애국자나 결정적 전투를 치르고 개선하는 군인과 같은 기분이 들것이다. 이것은 비유적인 해석이 아니다. 역사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초기의 무슬림들은 현존하는 하나님의 지성소인 카바에서 숭배할 권리를 거부당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이들의 주 목적지는 카바였다. 기쁨에 넘쳐 성전에 들어간 이들은 거기에 있는 우상과 형상들을 모두 파괴하고 나서 순례의 의식을 끝마쳤다.

특별한 사람들이 겪은 유별난 체험을 보면 이런 해석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유명한 헝가리인 작가 한 사람이 자기 나라가 침략 당하자 흙 한 줌을 가지고 피나하였다. 문학 년보에 의하면 이 작가는 그 한 줌의 흙에서 가장 큰 위안과 가장 깊은 즐거움을 얻었다고 한다. 그것은 이 작가에게 있어 격려의 원천이었고 언젠가는 자유조국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희망의 상징이었다.[7])

이와 비슷한 예로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는 기록 영화 한편이 CBS에 의해 제작되어 1974년 6월 15일에 방영되었다. 이 영화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자의 테러를 피하여 망명한 부유한 사업가 한 사람이 베이루트에 있는 현대식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자기재산이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미소를 띠며 흙이 반쯤 찬 조그만 병을 가리켰다. 피난 올 때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것인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그 흙이 가장 소중하며, 자기의 조국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가진 재산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인터뷰에서 더욱 인상깊었던 것은 이 사람의 가족이 더 흥분해서 열을 올렸다는 점이다. 이 사람이 비슷한 처지의 많은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해서, 또 그 적은 “보물의 흙”이 앞으로 몇 년이고 아주 특별하고도 신성하기까지한 물건이 된다고 해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1973년 10월 14일 자로 낸 (미)연합통신사의 보도는 이보다 더욱 실감난다. 다음은 그 보도 내용이다. : “수에즈운하의 동쪽 둑에 있는 이스라엘군의 마지막 거점이 항복해 왔다. …지치고 흙투성이가 된 이스라엘군 포로 37명이 작은 배에 실려 수용을 위해 건너편으로 호송되었다. …이집트군 몇 명이 마침내 이 마지막 거점(바르-레브 전선)을 해방시켰다는 감격을 가누지 못하여 모래 한 줌을 움켜쥐더니 입에 집어넣었다. 땅에다 입을 맞추는 자들도 있었다.”(Dispatch observer 지 2A면)

더욱 최근에 동통신사는 시리안군 전쟁포로의 귀환을 보도하는 가운데 이같이 밝혔다. “맨 처음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앉은 채로 들것에 비행기 밖으로 나왔다.…‘두 다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영혼이라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그는 외쳤다. 그러더니 들것에서 땅으로 내려 달라고 졸랐다. 몸을 굽혀 땅에다 입을 맞추겠다는 것이었다.”(Dispatch observer지 1974.6.23A면)

이런 인간적 견지에서 흑석에 얽힌 이야기를 보아야 한다. 또 비상한 상황 아래서 겪은 이러한 인간의 체험에 비추어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결 어 (up)

메디나(마디-나)에 있는 무함맏의 묘를 반드시 의무적으로 방문해야만 핫즈가 유효하게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무덤을 찾아서 인류에게 있어 최대의 스승인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메디나에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항상 권할만한 일이며 또 그것이 강권되는 바이기도 한다.

기억해 둘 것은 하나님을 위한 제물인 희생을 바치고, 이 헌신의 여정의 완료를 축하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만인이 누리는 이-드일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함으로써 핫즈는 그 절정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순례자들에게만 이런 의무가 지워진 건 아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재산을 가진 무슬림 모두에게 지워진 의무인 것이다.

일부 무슬림 가운데서 핫즈 철에 희생으로 도살되는 동물이 너무 많아서 막대한 양의 고기가 낭비된다는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어 왔다. 날씨는 무더운데 냉동시설은 없고 운송 수단은 부족한데다가 며칠만에 고기가 과잉 공급되니까 대부분의 고기가 그대로 방치되거나 못쓰게 되어 버린다. 이것은 새로운 상황에서 야기되는 새로운 문젯거리다. 양심적인 무슬림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알고 싶어한다.

고금의 권위 있는 종교학자들의 학문적 견해를 놓고 법적으로 따져가며 토론을 벌일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슬람은 종류나 정도 여하를 막론하고 낭비를 허용하지 않으며 보다 시급한 필요에 먼저 응하고 나쁜 것은 보다 덜한 쪽을 택하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부터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에 이르기까지 또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부터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것에 이르기까지 우선 순위의 체계에 맞춰 운용되며, 기략이 풍부한 동시에 적응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입각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 해결책은 문자적인 해석에서 다소 벗어나 보일지는 모르지만, 이슬람의 정신으로부터 나온다. 여러 단계와 수준에서 이 해결책을 적용할 수 있다.

첫째, 무슬림은 최선을 다해 남은 고기를 저장할 수 있는 냉동시설을 확보하여 성역과 그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이 일년 내내 그 고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도처에 있는 가난한 무슬림들에게 남은 고기를 운반해 주는데 노력해야 한다. 희생동물을 멕카에서 잡아서 그 고기를 통조림으로 만들거나 냉동시킨 다음 세계 각지의 가난한 무슬림들에게 운반할 수도 있다.

셋째, 남은 고기를 팔아서, 거기서 생긴 돈을 지역적, 지방적, 국가적, 국제적 규모의 자선에 사용할 수도 있다. 무슬림들은 합심해서 이런 조처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런 조처가 취해질 때까지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남은 고기가 낭비되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되면 희생을 바치는 날짜를 연기하거나 앞당겨도 된다.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택해서 낭비를 피할 수 있다. 혹은 핫즈 기간 중 멕카에서 희생하게 되어 있는 동물의 값에 해당하는 돈을 합법적 명분을 위해 자선 형식으로 지불할 수도 있을 것이다.[8])

마지막으로 희생의 문제와 그것이 실제 상징하는 바에 대해 한 마디 하겠다. 앞서 이-드를 논하는 가운데 지적했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고기나 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그 분에 대한 신앙과 예언자 아브라함(이브라힘)에게 자기 아들을 희생으로 바치라는 명령이 내려진 그 역사적 사건의 확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기꺼이 이 명령에 복종할 각오가 서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들의 생명은 보존되었고 양 한 마리가 대신 희생되었다. 희생을 바치는 것은 이 때를 기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거행하는 축전이 되었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의 명에 응하여 희생으로 바쳐지게 되어 있었던 것은 이삭(이샤끄)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스마일)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그의 아버지가 기꺼이 복종할 각오를 보이자 그는 대속되었다. 이러한 신념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적어도 스무 가지는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 중 어느 하나도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적 역할이나 예언자 모세가 이들에게 전한 빛과 지혜를 흠 잡으려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꾸란도 그러한 점을 아주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는 터이다.(예: 꾸란, 2:40,47, 7:137, 17:2, 40:53, 45:16)

이들 논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꾸란(37:101-103)에 기록된 사건전체의 경위로 보아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명에 응하여 아버지가 희생으로 바치려 했던 아들임에 틀림이 없다.

2. 지금 있는 구약성서(창세기 21:5)에 의하면 이삭은 아버지가 100세일 때 태어난 반면 이스마엘은 아버지가 86세일 때 태어났다.(창세기 21:16) 그렇다면 14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스마엘이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셈이나 하시(何時)라도 이삭이 같은 위치에 있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구약성서(창세기 22:2)에 의하면 “이제 너의 아들 곧 너의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데리고…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에서 너의 아들을 번제(燔祭)로 바치라”는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내려졌다. 이 문맥 가운데 나오는 이삭이라는 이름은 분명히 삽입되었을 것이다. 또 모리아 땅이 이슬람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멕카의 마르와 산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정확한 위치가 분명치 않게 된다.

3. 사건 전체가 일어난 곳은 멕카 근방이었다. 그리고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을 따라 멕카로 가서 거기에 정착하여 아브라함을 도와 카바 신전을 세운 것은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였다.(꾸란, 2:124-130, 14:35-40)

4. 아마 다음이 이슬람의 신념을 저지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일 것이다 : 유태-기독교식 해석에 의하면 다음 같이 심히 부당한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ㄱ) 한 사람의 어머니는 종이고 다른 사람의 어머니는 자유인이라는 이유. 형제들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

(ㄴ) 인종이나 교의 혹은 피부색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

(ㄷ) 자기 조상의 이름으로 영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

(ㄹ) 어머니가 종인 자식은 정계(正系)로 인정하지 않는 것.

이런 추정과 결론은 모두 이슬람의 정신에 어긋난다. 무슬림은 이런 추정과 결론으로 유도하는 것은 다 배격해야 한다. 자기 조상의 지위, 어머니의 고귀함과 비천함 그리고 사회적 출신과 피부색의 차이는 사람의 영적, 인간적 자질과 하등 관계가 없다. 적어도 하나님에 보시기에는 그렇다.[9])

[1]) 주간의 시간 절약대의 무슬림들은 금요일의 회중 예배(주마)시간을 제대로 잡기가 어려워 혼선을 빚고 있는 모양이다. 예배 시간을 오후 1:15와 2:30분 사이에 잡아서 일년 동안 고정 시켜 두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이렇게 되면 겨울부터 여름까지 시간을 바꿀 필요가 없어진다. 저자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하기를 강권한다. 형제들이 위 예배시간을 주간 계획에 넣어 지속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일요일 정오 집회에 대해서는 이에 마찬가지로 조정할 수 있다.

[2]) 첫 번째 유형의 예배 결합은 조기형이다. 실례를 보면 이른 오후 예배가 정오 예배를 올린 직후에 제시간 전에 올려지게 된다. 두 번째 유형의 예배 결합은 후기형이다. 실례를 보면 해질녘 예배가 제시간이 지난 후에 밤 예배 직전에 올려지게 된다. 이렇게 예배를 한꺼번에 봄으로써 합법적인 사유(예, 여행, 업무변경 등) 때문에 예배를 제 시간에 행하지 못하는 무슬림의 걱정을 덜어 줄 수 있게 된다.

[3]) 여기서 손의 위치는 어느 한 법학파에 따른 것이다. 학파에 따라 내세우는 손의 위치도 다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사소한 것이어서 예배의 유효성 여부에는 상관이 없다. 사실 이러한 차이는 방해나 제한이 아니다. 편리나 편의로 간주되고 있는 터이다.

[4]) 이 부분은 권고 사항이다. 이 부분을 꼭 해야만 예배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5]) 여러 법학파들 사이에 해석상 조금씩 차이가 있다. 위뜨르를 요구하지 않는 학파들도 있다. 학파에 따라서는 약간의 변화를 가하여 이른 예배에 위뜨르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위 있는 학파 중 어느 하나를 따르면 된다.

[6]) 진지한 맹세를 파하는데 대한 속죄로 10명의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입혀야 한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그것이 안 되면 종을 해방시키거나 몸값을 치르고 종을 풀어 준다. 그것도 안 되면, 마지막 대안으로 3일간 단식을 한다(꾸란, 5:92). 불쾌한 이슬람 이전의 풍습대로 말을 경솔하게 한 경우에 죄진 자의 첫 번째 의무는 종을 해방시키거나 몸값을 치르고 종을 풀어 주는 것이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으면 아내와 다시 관계하기 전에 두달 동안 계속해서 단식을 해야 한다. 단식을 할 수 없으면 60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평균 60끼니의 식사를 나눠주어야 한다. 이외에도 처리 곤란한 일을 대신하여 단식을 요구하거나 권하는 경우가 있다.(꾸란, 58:1-4, 비교 2:196)

[7]) 저자는 50년대에 이 기사를 읽었는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정확한 출처를 찾을 수도 없고, 그 작가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9]) 위대한 이맘이었던 고(故) 마흐묻 샬투트가 자신의 저서 알-파따와(카이로 : 알-아즈하르대학 출판부, 1959)152-160면에서 매우 학문적인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저자는 삼가 그 내용 중 일부와 의견을 달리한다. 그러나 저자의 견해만이 올바른 이슬람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사회생활과 관련되는 한도 내에서 핫즈라는 제도는 무아마라트(인간사(人間事))이라고 하는 샤리아(이슬람법)의 분야에 속하는 것이다. 이 분야의 법은 핫즈 제도가 소속돼 있다고 흔히 믿는 이바다뜨(“숭배”와 의식의 문제)의 분야를 보완한다. 그러나 두 분야는 불가분의 것인 바, 아주 깊은 의미에서 핫즈는 음식과 돈과 노력이 너무 낭비된다는 현실적 문제를 감안하여 이슬람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희생 규정을 재해석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온건성, 합리성, 현실성을 보지 해야 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와 같이 해석을 내리는 바이다. 이런 해석이 하나님께 가납되고 동료 무슬림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9]) 여기에 언급한 것 이외에 다음 서적을 참고할 것. 유숲알리, 성꾸란, 원문번역과 주석(1946) p. p. 1204-1206: Ibn Qayyim al-jawazayh, Zad al-Ma' ad…(베이루트판, n. d)1권 p. p15-17.

Source: Islam Fra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