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 장 이슬람의 일상 생활에서의 적용

이슬람은 그저 명목상 숭상하기 위해서 생각해 낸 추상적 이상이나 한 곳에서 꼼짝 못하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숭배나 받는 우상이 아니라는 무슬림의 주장은 타당하다. 이슬람은 생활 규범이며, 인간 생활의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힘이다. 무슬림이 내세우는 또 한 가지 주장은 개인이 인력의 중심이며 이슬람이나 이에 상당하는 다른 제도를 완전히 가동시킬 수 있는 시동기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항상 개인에게서 시작되고 양보다 질을 우선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이슬람이 시작되는 곳인, 개인부터 시작하자. 개인의 본성을 고찰하고 이슬람이 이러한 본성을 어떻게 보는 지를 알아보자. 철학적 논쟁이나 추상적 논의에 빠져들지 않고 가급적 명료를 기하기 위해, 아주 긴밀하게 서로 관련되고,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두 가지 상보적 본성이 있다고 규정한다. 이 두 가지 본성은 내면성과 외면성이다. 혹은 두 부분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실상은 한 가지 본성만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내면적이고, 다른 하나는 외면적이다. 인간의 내면성이란 루흐(영혼이나 자아 혹은 마음)와 아끌(지성이나 추리력 혹은 지능)을 가리킨다. 인간의 내면성을 설명하자면,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1)영적·윤리적 측면과 (2)지적 측면, 나머지 인간의 활동과 거래는 외면성으로 갈라야 할 것이다. 결국 인간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사실이다.

내면성 (up)

1. 영적 생활 (up)

이슬람은 경건과 정의·안전과 평화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온갖 영적 자양을 인간에게 공급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간의 영적·윤리적 생활을 조직한다. 이슬람의 영적 생활 규정에 충실히 따르면 인간의 영적 성장과 성숙에 관한 한 최대한의 긍정적인 결과가 부여된다. 이러한 이슬람의 주요 내역은 다음과 같다.

1. 예배(쌀라)

2. 자카 혹은 자선, 기부

3. 단식(싸움)

4. 순례(핫즈)

5.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와 인류를 사랑할 것.

6. 항상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것.

7. 비 이기심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할 것.

이들 내력의 여러 측면은 상당히 자세하게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다만 이슬람에 관한 한 이런 기본적 요소 없이 진정한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부언 하는데 그치기로 한다. 독자는 본서의 앞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2. 지적 생활 (up)

인간의 지적 본성은 전술한 바와 같이 지성이나 지능 혹은 추리력으로 이루어진다. 이슬람은 이러한 측면에 각별히 유의하여 인간의 지적 구조물을 아주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운다. 이러한 기초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

1."경험"이나 실험 혹은 양자에 의해 획득한, 명백한 증거나 논의의 여지가 없는 근거에 바탕을 둔 정확한 지식·이점에 관하여, 꾸란이 실험과 명상과 관찰은 물론 "경험"을 통하여 지식을 열심히 탐구하라고 명한 최초의 전거(典據)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지식을 추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무슬림 모두에게 과해진 하나의 명령이다. 자연과 온 세계는 지식과 진리를 끊임없이 계시하는 공개된 보물이며, 꾸란은 이러한 지식의 풍부한 원천을 지적한 최초의 책이었다. 꾸란은 전래의 "진리"라든가 증거나 근거에 의해 실증하지 않고 주장하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저자가 지금까지 아는 한 꾸란이 다음과 같이 지적으로 말한 최초의 경전이었다. "이유가 뭐냐" 확신이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할 증거를 대 보라(꾸란, 2:111과 21:24).

꾸란 자체가 특출한 지적 도전이다. 꾸란은 그 속의 진리와 다투거나 자신을 모방해 보라고 인간의 지능에 도전한다. 꾸란의 아무 장이나 펼쳐 보라. 자연이라는 무한한 원천을 통하여 지식을 탐구하라는 가장 열렬한 호소가 그 속에 있을 것이다. 이슬람은 정확한 지식에의 헌신을 가장 보상이 풍부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에의 헌신으로 간주한다.

2. 두 번째 지적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식의 끊임없는 계시원천이며, 사고의 무한한 장(場)을 파고드는 영적인 통찰이다. 이슬람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종교라는 건물 전체의 초석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유효케 하기 위해서, 이슬람은 그 신앙을 부동의 확신과 신념 위에 구축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지성의 적절한 투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침체하고 무관심한 정신, 보잘 것 없는 상상력으로서는 애당초 지고한 진리-하나님-의 정상에 도달할 수 없거니와 신앙의 정말 깊은 곳에 이를 수도 없다.

이슬람은 맹목적으로 모방하여 아무런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인간의 지적 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슬람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며 꾸란도 아주 여러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서재에서 혹은 마음속에서 뒷전으로 밀려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게 아니다. 지성에 대해서 깨어 생각하며, 숙고하고 명상하라는 열렬한 권유와 절실한 호소를 한다는데 이러한 말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꾸란이 하나님에 대한 필수적 진리와 제 사실을 보여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상속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꾸란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점 역시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꾸란은 사람이 진지하게 노력하고 정직하게 벌어서 지적인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지적으로 든든해지기를 바란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없어지는 법"이어서 이슬람은 쉽게 없어지게 마련인 쉽게 얻은 신앙을 부정한다. 이슬람이 바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효과적이고 영속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비추고, 생활 곳곳에서 드러나는 신앙인 것이다. 쉽게 얻은 신앙으로서는 전혀 그것이 불가능하며, 이슬람은 이보다 못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은 지식과 연구에 바탕을 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는 동시에 지성 앞에,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데까지 침투해 볼 수 있도록 온갖 드넓은 사고의 장(場)을 활짝 펼쳐 놓는다. 이슬람은 지식을 추구하여 시야를 확장하고 정신을 폭넓게 하려는 자유 사상가에 대하여는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든, 혹은 실험적인 것이든 가리지 말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지식을 추구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 이렇듯 지성을 요청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존중하고 그것을 신뢰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답답한 속박과 유형성의 한계로부터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키려는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을 향상시키고 정신의 범위를 온갖 사고의 장-물리적·형이상학적·과학적·철학적·조직적 기타 등등-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이슬람이 바라는 바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지력(智力)에 자양을 주는 한편, 지적 생활은 풍요해지고 생산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적·지적 활동이 전술한 이슬람의 가르침에 따라 조직될 때, 인간의 내면성은 건전하고 튼튼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내면적으로 건전하고 튼튼해질 때, 외면성 역시 건전하고 튼튼해질 것이다.

외면성 (up)

인간의 외면성 역시 내면성만큼이나 복잡·미묘하고 광범위하다. 전자의 건전성이 후자의 건전성에 의존하는 바 크며, 전자의 건전성 역시 후자의 건전성에 의존하는 바 크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완전한 본성은 양측 면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명료를 기하기 위해, 인간의 외면성을 또 다시 상위와 하위로 구분한다. 그러나 항시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은 인간성의 체계가 균형을 잃으면,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인즉 인간의 내면성과 외면성은 상호작용·반작용하는 것이며, 이슬람은 생활의 내면과 외면으로 그 거룩한 손길을 뻗쳐 왔던 것이다.

1. 사생활 (up)

이슬람은 개인의 순수성과 청결성을 보장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물을 섭취하게 하는 한편 예외에 맞는 복장·품행·몸치장·스포츠 등으로 이끌 수 있는 방향으로 인간의 사생활을 다룬다.

1. 순수성과 청결성 (up)

무슬림은 앞서한 세정이 유효한 상태에 있지 않는 한,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의 명령이다. 이러한 의무적 세정은 상태에 따라 일부 세정이 될 수도 있고 전부 세정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무슬림이 순수한 마음과 정신으로 깨끗한 몸에 깨끗한 옷을 입고, 순수한 동기와 의향을 가지고 매일 적어도 하루에 다섯 번 의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한 가지 행위가 인간에게 미치는 중대한 영향과 유익한 결과를 금방 깨달을 수 있다.(비교, 꾸란, 4:43, 5:7)

2.음식물 (up)

순수한 마음과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열망하는 영혼과 깨끗하고 건강한 신체에 자양을 주기 위해서, 먹고사는 음식물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슬람이 바로 이렇게 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배를 규칙적으로 채우는 사람의 전체 상태에 아무런 직접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일부 피상적이고, 자기를 속이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슬람의 견해가 아니다. 이슬람은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본다. 이 점에 대한 이슬람의 일반 원칙은 다음과 같다 : 깨끗하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적당하게 섭취하는 한 모두 음식으로서 적법하다. 그리고 불결하고 해로운 것을 정상적인 상황 아래에서 섭취하는 것은 모두 위법이다. 항상 예외를 허용하는 여유와 융통성으로써 절대적인 필요에 대처한다.(꾸란, 7:157, 전기 이슬람의 윤리참조)

이러한 일반 원칙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금기로 지정하신 음식과 음료가 있다 : 이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죽은 짐승이나 새의 고기, 돼지고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빌어 도살한 것의 고기(꾸란, 2:173, 5:4), 이슬람이 인간의 정신이나 도덕, 체격과 사기에 유해하다고 여기는 음료가, 취하게 하는 것과 도박이나 내기를 전부 금지한 꾸란의 구절 속에 포함되어 있다.(꾸란, 5:93-94)

이러한 음식과 음료를 금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신 행위가 아니며, 또 하나님께서 독단적으로 내린 명령도 아니다. 이러한 금지는 최우선적으로 바로 인간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다. 꾸란이 이렇게 금지된 것들을 나쁘고 불결하고 해롭다고 말하는 것은 곧 인간의 도덕성과 지혜, 건강과 재산, 경건과 공유행위-이 모든 것을 이슬람에서는 아주 귀중한 재산이라고 본다.-를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간섭 배후에는 많은 이유가 숨어 있다. 이들 이유는 지적·영적·윤리적·정신적·경제적 성격을 띤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오직 인간에게 올바른 생활을 통한 자기 향상의 방법을 보여 가족의, 나아가 사회의, 궁극적으로는 인류 전체의 건강한 구성 단위가 되게 하려는 데 있다. 믿을 만한 의사나 사회 과학자는 이제 틀림없이 이러한 이슬람의 법령이 이롭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은 인간의 영적 건전성과 지적 성숙에 대한 큼이나 사람이 먹는 음식물의 질에 대하여도 정통적이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점은 어떤 음식물은 전술한 바와 같이 종류에 있어서 금지되고 또 어떤 음식물은 정도에 있어서 금지된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무슬림에게 적법한 것이라도 적당량을 섭취해야 한다. 거기에 탐닉해서도 안 되고 도에 지나쳐도 안 된다.(꾸란, 7:31) 종류나 정도에 있어서 금지된 모든 것을 피한 연후에야 무슬림은 하나님께 초대되어 그 분의 은혜가 깃든 양식을 즐기고, 자비로운 부양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느껴보게 된다.(꾸란, 2:168,172, 5:90-91)

3.복장과 몸치장 (up)

남자의 복장과 몸치장에 있어서 이슬람은 품위, 겸손, 정숙, 남자다움이라는 원칙들을 신중하게 고려한다. 이슬람은 이러한 자질의 달성, 유지, 향상에 반하는 복장과 몸치장을 금한다. 오만한 마음이나 터무니없는 자만심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옷감과 옷차림새는 엄금이다. 남자의 도의심을 악화시키거나 남자다움을 해치는 몸치장 역시 엄금이다. 남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정해 준 남자의 천성에 충실해야 하며, 자신의 성격을 나약하게 하거나 위태롭게 하는 것은 모두 멀리 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은 남자에게 비단 등의 옷감이나 금 등의 보석으로 몸치장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런 것들은 여자의 천성에만 어울린다. 남자의 멋은 보석을 소지하거나 비단 옷을 입고 으스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고결한 덕성과 매력 있는 그리고 건실한 품행에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 남자에게 금지되고 여자의 천성에만 어울리는 것을 여자가 사용하도록 허락했다고 해서, 여자가 방정치 못하게 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두려는 것은 아니다. 여자의 천성에 어울리는 것을 허락하는 동시에, 그 천성을 남용하거나 망칠 우려가 있는 것을 삼가도록 주의시킨다. 여자가 옷을 입고, 아름답게 하고, 걷고, 쳐다볼 때 취해야 하는 방식은 아주 미묘한 문제인 바, 이슬람은 이 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이슬람은 특히 여자가 자신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유지·향상시키고, 실없는 험담이나 악의에 찬 소문 그리고 의심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남자와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를 베풀어 오고 있다. 꾸란은 이렇게 충고한다. :

믿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내리고 겸손을 지키라고 말할지니라. 그리하면 저희의 순수함이 더해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하는 모든 일을 익히 알고 계시느니라. 또 믿는 여자들에게 말하되, 시선을 내리고 겸손을 지키며, 저의 아름다움과 장식을 (평소에)보여야 하는 것 말고는 드러내지 말며, 너울을 가슴에 드리워, 저의 남편이나 아버지…(그리고 집안의 다른 식구들)앞이 아니라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말며, 발을 굴러 눈에 안 띄는 장식에 주의를 끌려하지 말라고 할지니라(꾸란, 24:30-31)

이슬람은 옷차림새와 몸치장하는 방법에 매우 민감하다. 남자나 여자가 제각기 자신의 천성을 지켜 타고난 본능을 보호하고, 겸손과 고결한 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이슬람은 아주 분명히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맏은 여자처럼 행동하는 남자들과 남자처럼 행동하는 여자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무해하고 품위 있는 복장과 몸치장에 대해서는 아무 제한도 가하지 않음을 유의해야 한다. 사실, 꾸란도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이라 일컫고 있으며 그것들을 금기로 여기는 자들을 꾸짖고 있다. (꾸란, 7:32-33)

4.스포츠와 오락 (up)

대부분의 이슬람의 숭배 형식, 예를 들어 예배·단식·순례가 근본적으로는 원래 영적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상당히 스포츠 적인 특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나면 유쾌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사람의 체격과 사기가 부단히 상호 작용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스포츠와 오락에 대해 이슬람이 할 말을 다 한 건 아니다. 이슬람은 건전한 사색을 자극하거나 정신을 상쾌하게 하고 몸의 생기를 회복시켜 건강한 체형을 유지케 하는 것은 무엇이나 권장한다. 또 그것이 범죄 행위를 내포하거나 그것을 부를 소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하며, 해를 초대하거나 다른 의무의 이행을 지체시키거나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점에 관한 일반적 교훈은 무함맏의 언명이다. 무함맏은 이 언명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모두는 선한 성격을 가지나, 강한 성격이 약한 성격보다 낫다고 말했다. 또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무함맏은 체격을 강인하게 하고 사기를 돋우는 스포츠와 오락을 인정하였다.

스포츠답지도 오락답지도 않은 것을 스포츠와 오락에 관련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박이나 음주를 스포츠와 오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슬람의 견해가 아니다. 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으며 분명한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부여된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기 생을 남용하거나 전적으로 요행이나 단순한 우연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그 거룩한 손길을 뻗쳐 극히 사사로운 데 까지 생활을 조직하는 것은 인권 침해가 아니다. 생명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고상한 목적들을 지향하도록 만들어 졌기에, 이슬람은 생을 올바르게 즐겁게 사는 방법을 인간에게 제시하여 왔다. 도박의 금지가 이런 관점에서 취해진 조처 가운데 하나다. 도박은 사실상 긴장을 풀어 주기는커녕 긴장을 촉진시킨다. 요행이나 단순한 우연에 생을 맡겨 버리는 것은 심각한 남용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박 기구에 운을 걸거나 도박판의 예측을 불허하는 움직임에 자기 능력을 바치려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로부터의 이탈이다. 이런 모든 불필요한 정신적 긴장과 신경 파탄을 미연에 방지하고, 목적은 물론 수단에 있어서 자연스런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슬람은 형태와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도박을 금지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벽에 빠지거나 알콜의 악성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은 부끄러운 현실 도피인 동시에 인간 최고의 자질인 지성에 대한 무책임한 모욕이다. 술에 취해서 생기는 위험과 비극은 너무나 뻔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매일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있으며, 이런 위협 때문에 많은 가정이 붕괴하고 있다. 술 마시는데 들어가는 돈만 해도 매년 수 십억 달러에 달한다. 음주 습관이 불러온 곤궁과 불행 때문에 결단나는 집안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건강은 파괴되고, 정신은 피폐해지며, 재산은 줄어들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인간 존엄성이 훼손되고 도의심이 없어지며 부끄럽게도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소위 교제상 술을 마신다는 사람은 모두 알콜에 중독될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은 이런 위협을 좌시하거나, 인간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자기 생의 의미를 남용하도록 방관할 수도 없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슬람은 도박과 음주를 훌륭한 스포츠와 기분을 전환시키는 오락에 관련시키지 않고 이들을 단호하게 금하였다. 뉴스매체를 조사하고 의학에 관한 기사를 읽어보거나 사회사업 기관을 방문하고 재판 절차를 지켜보기만 하면, 이 점에 있어서 이슬람의 견해가 옳다는 것은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고민스러운 사회 문제 중에서 알콜 중독이 단연코 가장 심각하다. 매년 130만 이상의 미국인들이 알콜 중독자가 되고 있다. 어느 해에 열 내지 열 두 명이 처음으로 술을 마신다고 할 경우 그 중에 한 명은 앞으로 알콜 중독에 걸린다는 얘기다. 구태여 이론이나 거래 액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이러한 모든 고통스런 비극과 당면한 손실이 현실을 더 잘 대변하는 터이다.

2.가정 생활 (up)

가족에 대해서는 많은 정의와 기술이 나와 있다. 편의상, 다음의 단순화된 정의를 택한다. 가족이란 그 성원들이 혈연이나 혼인 관계를 유대로 하여 결속된 인간의 사회 집단이다.

가족의 유대는 종교에 의해 규정되고, 법에 의해 시행되며, 집단 성원에 의해 준수되는 권리와 의무에 대한 상호적 기대를 수반한다. 따라서 가족 성원들은 일정한 상호적 책임을 공유한다. 일체감·대비·상속·의논·연소자에 대한 애정·연로자의 안전·가족의 계속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의 극대화가 이러한 책임의 내용이다.

이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슬람에서의 가족의 기초는 혈연이나 혼인의 서약 혹은 이 두 가지다. 입양, 상호결연, 예속자(家臣), 성교에서의 은밀한 동의, 그리고 "시험"("commonlaw" or "trial")은 이슬람적 의미에서 가족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합리적 계속성과 진정한 안전 그리고 무르익은 친밀감을 제공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 위에 가족을 세운다. 가족의 기초는 진정한 상호성과 도덕적 만족감을 키워 줄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슬람은 혈연 관계가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이며 도덕적 만족이 결합된 성교가 가장 건전한 성교임을 인정한다.

이슬람은 결혼의 종교적 미덕과 사회적 필요성과 도덕적 장점을 인정한다. 무슬림 개개인에게 있어 정상적인 행로는 가족을 지향하고, 자기 자신의 가족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혼인과 가족은 이슬람제도의 핵심이다. 꾸란의 많은 구절과 예언자가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을 정도다. 결혼한 무슬림은 그로써 자기 종교의 절반을 완성한 것인즉, 저는 하나님을 염원하며 나머지 절반에 유념할지니라.

결혼은 종교적 의무며 도덕적 안전 장치며, 사회적 약속이라는 것이 꾸란의 결혼관에 대해 무슬림 학자들이 내린 해석이다. 종교적 의무로써 그것은 이행되어야 하지만, 이슬람의 여타의 의무가 그렇듯이, 그것은 관련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에게만 과해진다.

1.결혼의 의미 (up)

사람들이 결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관계없이, 이슬람은 결혼을 강한 유대(미싸꾼 갈라즈), 가장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도전적인 서약이라고 본다. 그것은 삶 자체와 사회와 인류의 존엄하고 의미 있는 생존에 대한 서약인 동시에, 결혼 배우자들이 하나님과 서로에 대하여 한 서약이다. 결국 배우자들은 이런 서약 속에서 상호적 의무 이행과 자아 실현, 사랑과 평화, 동정과 평온, 위안과 희망을 확인한다. 이 모든 것은 이슬람에서의 결혼은 최우선적으로 의로운 행위, 신뢰할 수 있는 헌신의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성적 통제가 도덕적 승리, 생식이 사회적 요구 혹은 봉사, 건강이 만족스러운 정신 상태라고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의 제 가치와 목적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읽혀지고 또한 종교적 서약으로 여겨지며, 신선한 축복으로 내재화된다면, 그것들은 특별한 의의를 지니고 새롭게 강화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슬람에서의 결혼의 초점이 아닌가 한다. 다음에 꾸란 구절 몇 개를 말을 바꿔 제시한다. 하나님께 충실하자.

-이는 인류에 대한 외침이다.

하나님은 한 영혼으로부터 인류를 창조하셨으며, 또 그 한 영혼으로부터 그 배우자를 창조하셨으며, 저들 둘로부터 많은 남녀를 널리 퍼뜨리셨음이라(꾸란, 4:1).

살아 있는 한 영혼으로부터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 영혼으로부터 한 배우자를 창조하시어 저가 그 여자에게서 위안과 안식을 찾게 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꾸란, 7:107)

하나님의 표징은 이것이니 곧, 당신께서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을 위하여 배우자를 창조하사, 저들이 함께 거하여, 평화와 평온을 찾게 하시여, 저들 사이에 사랑과 자비를 두신 것이다. 진실로 그 가운데 생각 깊은 자들을 위한 표징이 있느니라(꾸란, 30:21)

결혼 생활이 아무리 어려운 시련기에 부딪치더라도 또 법적 분쟁과 소송의 와중에서도 꾸란은 당사자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상기시킨다. 꾸란은 이들에게 서로 다정하게 대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용서해 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충실하라고 명한다.

이슬람의 결혼 규정이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예를 남자에게는 독신 생활을 권하지 않는다면, 여자에게도 그것을 권하지 않는다. 이것은 여자의 요구도 동등한 합법성을 가지며, 진지하게 고려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이슬람은 결혼이 남자에게 있어서와 꼭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있어서도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로라고 간주한다. 아마 여자에게 더욱 그러할지도 모른다. 결혼은 무엇보다도, 여자에게 상대적이긴 하지만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 쪽에 이처럼 무시할 수 없게 유리한 면이 따른 다고 해서 결혼을 순전히 경제적 거래로 볼 수는 없다. 사실, 경제적 요인은 그것이 아무리 우세하더라도 이슬람이 중시하는 결혼의 측면 중 최하위를 차지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는 여자를 아내로 맞을 때, 통상 여자가 가진 재산·아름다움·혈통의 고귀성·종교적 품성을 보게 되지만 무엇보다도 경건을 앞세워 배우자를 고르는 자가 복 받은 행운아라고 말했다. 꾸란은 독신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비록 가난하거나 노예 신세일지라도 결혼하라고 명한다.(꾸란, 24:30) 한편, 남자가 앞으로 아내가 될 여자에게 주는 결혼 예물은 무엇이나 다 여자의 소유가 된다. 여자가 결혼 전 후에 얻은 것은 모두 다 여자만의 소유다. 남편과 아내의 재산 공유는 "필요로 하지"않는다. 더구나 가족의 부양과 경제적 안정에 대해 책임이 있는 쪽은 남편이다. 심지어 남편은, 아내가 결혼 전에 남의 시중을 받았다면 결혼 후에도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 몇몇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아내에게는 매일 되풀이되는 집안 일에 매달려야 할 의무가 없다. 협동이나 절약 등의 이유로 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고 또 통상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2. 결혼의 영속성 (up)

이슬람은 결혼을 매우 중대한 서약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인력으로 결혼의 유대를 영속시키기 위해서 몇 가지 수단을 규정하였다. 결혼 당사자들은 다음의 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적정한 연령, 전체적인 조화, 분수에 맞는 결혼예물, 호의, 자유로운 동의, 헌신적 보호, 명예로운 결혼의식, 적절한 분별, 결혼계약을 맺을 때는 그 유대를 영속 시켜 일시적·임시적인 것이 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험 결혼과 기한부 결혼 그리고 실험적이거나 일시적·임시적 성격을 띠는 결혼 모두가 이슬람에서는 금지된다.

예언자(P. B. U. P)는 자신의 가장 단호한 언명 가운데 하나에서, 배우자를 자주 바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즉 얼마 동안은 한 배우자를 즐기다가 다른 배우자로 바꿔치는 식으로 "맛만 보는"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저주를 받는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결혼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것이 곧 결혼 계약은 해체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무슬림들은 꾸란에 의해 중앙의 민족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슬람 또한 참으로 중용의 종교요, 균형과 통합을 잘 이룬 제도다. 이것은 결혼의 경우에 특히 분명하다. 이슬람은 결혼을 성례나 단순한 일반 계약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슬람에서의 결혼은 성례적 성격과 계약적 성격을 동시에 갖는 독특한 것이다. 또 이러한 일시적·임시적이라는 극단에 대한 대안이 결혼 계약 해제의 절대 불가능이라는 또 다른 극단이 아니라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이슬람은 공평하고 현실적인 중용의 길을 걷는다. 결혼계약은 중대하고 영속적인 유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결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친절과 명예를 견지하며 공평하고, 평화롭게 결말지을 수도 있다.

3.남편과 아내의 관계 (up)

경건을 배우자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결혼의 제조건을 진지하게 만족시킨다면, 당사자들은 틀림없이 행복하고 본분을 다하는 결혼생활로 순조롭게 인도될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여기서 한층 더 아나가 남편과 아내의 행동 방식을 규정한다. 꾸란과 순나에는 친절과 공평, 연민과 정과 사랑, 동정과 이해성, 인내와 호의를 명하는 말이 많다. 예언자는 자기 가족에게 가장 친절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무슬림이며, 인생에 있어 가장 크고, 가장 복된 기쁨은 착하고 의로운 아내라고까지 단언까지 하고 있다.

신방을 치르고 나면,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진다. 각 역할은 공평하고, 비례적인 일단의 권리와 의무다. 남편의 역할은 자기 아내를 인내심으로써 친절하고 명예롭게 대우하며, 아내를 명예롭게 보살펴 주든지 아니면 결혼의 유대로부터 명예롭게 해방시켜 주며, 아내에게 해나 슬픔을 끼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남편의 엄숙한 의무라는 윤리원칙을 중심으로 한다.(꾸란, 2:229-232, 4:19) 아내의 역할은 여자는 의무를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권리를 가지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다는 꾸란 구절로 요약된다.(꾸란, 2:228). 무슬림 학자들은 통상 이 지위를 다른 구절과 관련시켜 해석한다. 이 귀절이 특히 지적하고 있는 점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뛰어나게 하셨으며, 남자가 자기 재산으로 여자를 부양하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의 수탁자, 감시자, 보호자라는 것이다. (꾸란, 4:34) 이 지위는 분업과 역할 분화에 따라 가정 내에 생긴, 사회학자들의 소위 "수단적 리더십" 혹은 외적 권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절대적 차별이나 남자의 여자에 대한 우월을 뜻하지는 않는다.

(1) 아내의 권리 : 남편의 의무

이들 윤리원칙이 행위규칙으로 구체화되면, 이에 따라 여자에게 권리와 이에 상응하는 의무가 배당된다. 꾸란과 예언자의 순나가 여자에게 친절하라 명했으므로 자기 아내와 화합하여 공평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남편의 의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의 한 가지 특별한 결과로서, 남편은 자기 아내를 전적으로 부양할 책임을 진다. 남편은 이 부양 의무를 기꺼이 이행하되,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며,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생색내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부양의 내용, 부양은 의식주와 전체적인 보살핌, 안녕에 대한 아내의 논쟁의 여지없는 권리를 수반한다. 아내의 주거는 아내에게 합리적 수준의 프라이버시·안락 ·독립을 보존하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아내의 안녕과 결혼의 안정이 급선무다. 주거만 그런 게 아니라 의복·음식·전체적인 보살핌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는 남편의 재산과 자신의 생활 양식에 맞춰 남편에 의해 입혀지고, 먹여지고, 보살핌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의 행사가 무절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을 행사하는데 인색해서도 안 된다.

물질외적 권리, 물질적 권리만이 아내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는 이외에도 윤리적 성격을 띠는 권리를 가지며 이러한 권리 역시 마찬가지로 구속력이 있고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법은 남편에게 자기 아내를 공평하게 대우하고 아내의 감정을 존중하며 아내에게 친절과 이해심을 보이라고 명한다. 남편은 아내를 혐오해서는 안 되며 아내가 불확실하고 어중간한 상태에서 불안을 느끼게 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규정의 당연한 결과로서, 남자는 아내에게 해를 입히거나 아내의 자유를 가로막을 작정으로 아내를 데리고 있을 수 없다.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거나 동정하지 않을 경우 여자는 결혼의 유대를 풀어 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가지며 누구도 그녀의 사생활을 방해할 수 없다.

(2) 아내의 의무 : 남편의 권리.

결혼관계에 있는 배우자로서 아내가 지켜야 할 주된 의무는 가급적 결혼 생활을 원만하고 행복하게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의 안락과 안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남편을 화나게 하거나 남편의 기분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아마 다음의 꾸란의 말씀보다 핵심을 더 잘 찌를 말은 없을 것이다. 이 꾸란의 말씀은 의로운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주여! 우리에게 아내와 자식을 주사 우리 눈의 기쁨과 위안이 되게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의의 본이 되게 하소서.(꾸란, 25:74)

이것이 아내의 모든 의무가 의거하고 발원하는 기초다. 이러한 기초적 의무를 이행하려면 아내는 충실하고 신뢰할 만하며 정직해야 한다. 특히 남편이 적출(嫡出)을 갖지 못하게 할 양으로 임신을 고의적으로 회피하여 남편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아내는 전적으로 남편의 권리인 동침을 타인에게 허락해서도 안 된다. 이의 당연한 결과로서, 아내는 남편이 모르게, 남편의 승낙 없이 낯선 남자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거나 접대해서는 안 된다. 또 낯선 남자가 주는 선물을 남편의 허락 없이 받아서도 안 된다. 이는 필시 질투·의심·험담 등을 피하고 관련 당사자 모두의 결백을 지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남편의 재산은 아내의 신용이다. 남편의 재산이 일부라도 자기에게 달려 있거나 자금 등이 맡겨진 경우에는 슬기롭고 알뜰하게 자기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남편의 허가 없이 그 재산을 빌려주거나 처분할 수 없다.

동침에 대하여 말하자면,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보면 마음이 끌리게 해야 하고, 매력적이고 민감해야 하면, 협조적으로 나와야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을 거부할 수 없다. 꾸란이 부부는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과 체면을 마땅히 고려해야 한다. 또한 아내는 자기와 동침하고 싶은 생각이 가시게 하거나 만족을 빼앗을 여지가 있는 행위를 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행위를 하거나 자신을 소홀히 할 경우, 남편은 아내의 자유에 간섭하여 사태를 바로잡을 권리를 가진다. 양 당사자에게 최대한의 자기 달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남편 역시 아내의 만족을 방해할 소지가 있는 행위를 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4.부모와 자녀의 관계 (up)

(1) 자녀의 권리 : 부모의 의무

이슬람의 자녀에 대한 접근 방법은 몇 가지 원칙으로 요약된다. 첫째, 자녀가 부모에게 해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둘째, 부모는 넌지시 반응을 보여야 하며, 자녀를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 꾸란은 부모에게 과잉 보호나 무관심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인정한다. 이런 인정을 근거로 하여 셋째, 꾸란은 몇 가지 지침을 확립하고 자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였다. 꾸란은 자녀가 자만의 근원, 허영과 허망의 씨앗, 고난 유혹의 원천일 뿐 아니라 삶의 기쁨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꾸란은 서둘러, 심령의 보다 큰 기쁨을 강조하고 부모에게 과신하거나 터무니없이 자만하지 말고 자녀가 저지를지도 모르는 비행을 방지하라고 경고한다. 이런 입장이 가지는 종교적 윤리 원칙은 부모와 자녀를 막론하고 각 개인은 하나님께 직결되며, 자기 행위에 대해 개별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심판날에는 자녀가 부모를 사면할 수 없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위하여 나설 수도 없다. 끝으로 이슬람은 자녀가 부모에게 결정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에 특히 민감하다. 자녀 인격형성에 부모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슬람은 분명히 인정한다. 예언자는 매우 시사적인 언명 가운데서 자녀는 모두 피뜨라(이슬람의 순수한 자연 상태)라는 진정한 의미의 순응성을 제각기 타고나는데, 부모가 나중에 자기 자식을 유태교나 기독교도 혹은 이교도로 만드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들 지침에 의하면 이슬람에서 가장 양도 불가능한 자녀의 권리 중 하나는 생존과 동등한 삶의 기회를 누릴 권리이다. 자녀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이슬람의 세 번째 계명이다.(꾸란, 6:151 비교 17:28ff)

마찬가지로 양도 불가능한 또 하나의 권리는 자녀마다 오직 한 아버지를 가질 것을 주장하는 적출(嫡出)의 권리다. 세 번째 부류의 권리에 해당하는 것은 사회화와 양육 그리고 전반적인 보살핌이다. 자녀를 잘 보살피는 것은 이슬람에서 가장 높이 칭찬하는 행위 중 하나다. 예언자는 아이들을 가장 좋아하였고, 자신의 무슬림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들 사이에서 아이들에게 친절하다는 것으로 유명해지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자녀에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자녀의 영적 복지, 교육의 필요 그리고 전반적 안녕 임이 최우선의 과제인 것이다. 예언자의 지시에 의하면, 일곱째 날까지 자녀에게 훌륭하고 호감이 가는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하며, 머리를 깎고 아울러 건강하게 자라는 데 필요한 기타 위생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런 날은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축일이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에 대한 책임과 동정은 사회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부모의 생사나 동거여부에 관계없이 또 부모를 알거나 모르거나 어린아이에게는 최적한 보살핌이 베풀어져야 한다. 아이의 복지를 책임질만한 유언 집행자나 친척이 있는 경우에는 우선 이들에게 이러한 의무가 부과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친척이 없으면, 그 아이를 보살피는 것은 당해 관리와 일반 대중 다시 말해서 전체 무슬림 사회의 공동 책임이 된다.

(2) 자녀의 의무 : 부모의 권리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이슬람에서의 부모와 자녀는 상호적 의무와 상호적 책임에 의해 결속된다. 그러나 연령 차이가 너무 벌어져 부모의 심신이 이미 나약해져 가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흔히 조급해지고 기력이 쇠퇴하며 신경이 예민해진다. 그리고 어쩌면 판단을 그르칠지도 모른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부모의 권위가 남용되거나 요새말로 "세대격차"와 유사한 세대간이 소원과 불안이 야기될 수도 있다. 이슬람이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하고 개인의 부모와의 관계를 규율하는 기본 규정을 만드는데 있어서 필시 이러한 점들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부모가 나이가 더 많고 대체적으로 경험이 더 풍부하다는 사실 자체가 부모의 견해를 정당화시키거나 그 기준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젊은 그 자체가 활기나 이상주의 혹은 지혜의 유일한 원천인 것도 아니다. 꾸란은 여러 곳에서 자신과의 대립에서 부모가 잘못된 경우와 자신이 부모의 입장을 그릇 판단한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참고, 꾸란 6:74, 11:42, 19:42-48)

어쩌면 관습이나 민습, 전통 혹은 부모의 가치 체계와 기준이 그 자체로서 진리와 정의를 구성하지 않는 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꾸란은 몇몇 구절에서 진리가 자기들에게 새롭거나 친숙한 것에 반하거나 부모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진리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엄히 꾸짖는다. 더 나아가서 꾸란은 부모에게 충실하거나 복종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될 경우에는 말하자면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부모에게는 마땅히 고려와 동정과 사랑과 자비가 베풀어져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적정 선을 넘어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한계선을 긋고 그것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꾸란은 의와 선과 미를 이흐싼이라는 최상위 개념으로 문제 전체를 요약한다. 이흐싼의 개념이 부모에 대하여 실제 내포하고 있는 사항은, 적극적 감정 이입과 인내, 감사와 동정, 부모에 대한 존경과 그분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 그분들의 정당한 서약에 대한 존중과 그분들에 대한 진지한 조언이다.

이흐싼의 한 가지 기본적 차원은 복종이다. 부모는 자신들이 자녀들에게 해 준 데 대한 부분적인 보답의 의미에서라면 자녀들이 복종해 주기를 기대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부모가 불의를 명하거나, 부정한 일을 요구하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복종을 하든, 하지 않든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태도가 절대적인 복종이나 무분별한 반항이 될 수는 없다.

끝으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이흐싼의 중요한 일면은 자녀들이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요긴할 때에 부모를 부양하고 가급적 편안한 여생을 누릴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은 절대적 종교의 의무다.

5. 가족 생활의 기타측면 (up)

"종"이나 다른 식구, 친척 그리고 이웃에 대한 대우는 가족 생활과 밀접히 관련된다. 예언자 무함맏은 종신 하녀를 거느린 사람들에게 충고와 좋은 소식을 아울러 주었다. 자기 종을 노예가 아니라 형제처럼 대우하라는 것이 "주인"에게 내려진 명령이다. 예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누구든지 자기 종을 잘 대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통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임종의 순간을 쉽고 평안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종(하인)들도 정의·친절·자비·의식주와 기타 개인 비용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예언자는 종들도 주인이 먹고 입는 것과 같은 것으로 먹이고 입혀져야 하며, 주인은 종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의 일부로서 이런 마련을 해 주어야 하는 말까지 하고 있다. 종들을 학대하거나 멸시하거나 너무 부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규정은 인간을 존엄하게 하고,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부르지 않고, 노동을 존중하는 방법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종이나 노동자라로 해서 그 권리가 박탈되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또 종이나 노동자라고 해서 공상적 프롤레타리아라는 아편에 빠져들게 되는 것도 아니다. 참다운 무슬림 사회의 시민 모두는 동등한 입장에 선다. 이슬람은 카스트 제도나 2등 시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인정하는 유일한 우월성은 하나님을 섬기는데서 나타나는 경건과 선행의 우월성이다. (꾸란, 9:105, 49:13)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른 식구나 친척에 대해 최대한의 도움과 친절을 베풀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관심을 보이라고 명하신다. 아랍어로 친척이라는 말이 자비(라힘과 라흐마)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한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친척에 대한 친절은 낙원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이와는 달리 이런 의무를 소홀히 하는 자들에게는 낙원이 허락되지 않는다. 예언자는 친척들을 친절하게 대우하는 것을 가리켜 자신의 삶에 대한 신성한 축복이며, 규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친척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신성한 의무다. 비록 그 친척이 똑같이 대해 주지 않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 의무는 하나님의 명인 바, 친척의 반응에 상관없이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이웃의 지위를 아주 높게 본다. 이웃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이슬람이 부여하는 많은 특권을 누린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맏은 그 누구도 자기 이웃이 자기에게서 안전을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자기 이웃은 굶주려 밤을 보내는데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들도 역시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이웃에게 가장 친절한 사람은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이웃이 될 것이다. 이웃간에는 선물을 주고받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또 다른 언명 가운데서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 "이웃의 권리가 무엇인지 아느냐? 이웃이 네 도움을 구하면 도와주며, 네 구원을 청하면 구원하고, 빌려 달라는 게 있으면 빌려 주라, 걱정거리가 생기면 염려해 주며, 병들면 간호해 주고 초상이 나면 장례에 참석하라. 경사를 만나면 축하해 주고 재난을 당하면 위로해 주라. 이웃의 허락 없이 네 집을 높이 올려 하늘을 막지 말라. 이웃을 괴롭히지 말라. 과일을 사거든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 나누어 주지 않으려면 네가 산 것을 남이 눈치 안체게 집으로 바로 가지고 들어가되, 네 자녀들이 그것을 들고 나가 옆집 자녀들이 보고 샘내는 일이 없게 하라." 게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는 이웃에게도 상속에 참여할 권리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자신에게 들 정도로 천사 가브리엘이 이웃의 권리를 누누이 강조했다고 말했다.(또한 앞 문단의 꾸란 구절 참조)

3. 사회 생활 (up)

진정한 무슬림의 사회 생활은 최고의 제 원칙에 입각하여, 사회는 물론 개인의 행복과 번영을 보상하는데 그 의의를 둔다. 계급투쟁, 사회적 특권 계급, 그리고 개인지배는 이슬람의 사회생활과 그 질을 달리 한다. 꾸란이나 무함맏의 전승의 어디에도 계급이나 출신(혈통) 혹은 재산을 근거로 우월성을 인정한 말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인류에게 살아가는데 있어 지극히 중요한 제사실을 상기시키는 꾸란 구절과 무함맏의 말씀은 많이 있다. 이러한 제 사실은 동시에 이슬람 생활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제원리를 이룬다. 이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은 인류는 같은 한 부모에게서 나서 같은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를 공통 부모로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인류의 통일성을 생각한다. 사람은 모두 첫 아버지와 첫 어머니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 가족의 일원이며, 따라서 공통의 책임이 과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통의 이익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사람들이 자기들 모두가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종적 편견이나 사회적 부조리 혹은 2등 시민의 지위라는 것이 발붙일 여지를 잃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통 부모라는 유대에 의해 본성이 통일되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 사회적, 행동에 있어서 통일될 것이다. 꾸란과 무함맏의 관습은 인류가 본성과 기원에 의해 통일되어 있다고 하는 이 중요한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는 곧 인종적 자만과 민족적 혹은 종족적 우수성에 대한 주장을 타파하고 형제애를 향한 탄탄대로를 여는 것이 아닐 수 없다.(꾸란, 4:1, 7:189, 49:10-13)

인류는 그 기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궁극적 목적에 있어서 통일된다. 이슬람에 의하면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 분으로부터 와서 그 분을 위해 살다가 모두 그 분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사실 꾸란이 말하는 창조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만을 숭배하고, 진리와 정의·사랑과 자비·형제애와 도덕이라고 하는 그분의 대의에 이바지하는 것이다.(꾸란, 51:56-58)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이슬람의 사회 생활의 배경을 이루는 이러한 기원과 궁극적 목적의 통일성에 기초한다. 개인의 역할은 사회의 역할을 보완한다. 양자 사이에 사회적 결속과 상호적 책임이 자리한다. 개인은 사회의 공공복지와 번영에 책임을 진다. 이러한 책임은 사회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하여 개인은 건전한 사회성을 갖추고 외면할 수 없는 책임을 올바로 의식하여 활동에 임하게 된다. 사회를 위해 최선을 그 공공복지에 기여하는 것이 개인의 역할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 역시 개인의 복지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진다. 개인에게 능력이 있을 때, 그 개인은 기부자가 되고 사회는 수혜자가 된다. 그 대신 그 개인이 무능해진다면 안전과 보호의 권리를 누리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개인이 수혜자가 되고 사회가 기부자가 된다. 그러므로 의무와 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책임과 의무는 상호적이다. 국가가 개인을 지배하고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말살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개인이나 계급이 사회를 착취하고 국가를 부패하게 할 수도 없다. 개인과 사회는 건설적으로 상호 작용해야 한다.

기원과 궁극적 목적에 있어서의 인류의 통일성, 그리고 이러한 상호적 책임과 관심 이외에도 이슬람의 사회 생활은 선하고 경건한 일을 하는데 서로 협력한다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개인과 개인이 가지는 생명·재산·명예에 대한 신성한 권리를 충분히 인식하는 것과 아울러 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측면에서 개인이 수행하는 효과적 역할이 이슬람 사회생활의 특징을 이룬다. 이슬람 사회의 개인은 무관심할 수 없다. 이슬람 사회의 개인은 선을 권하고, 또는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온갖 악과 마음대로 싸울 수 있도록 사회의 도덕과 윤리를 확립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명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할 뿐 아니라 타인도 그와 같이 하도록 돕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 무관심한 개인은 이기적인 죄인이다. 도덕은 문란해져 있고 양심은 혼란에 빠져 있으며, 신앙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사회생활의 구조는 매우 고상하고 건전하며 포괄적이다. 이러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실질적 요소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동료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 젊은이에 대한 자비, 웃어른에 대한 존경, 고통 당하는 자의 위안과 격려, 슬퍼하는 자의 위로, 진정에서 우러난 형제애와 사회적 결속감, 타인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에 대한 권리의 존중·개인과 사회 사이의 상호적 책임, 다음과 같은 언명을 흔히 접하게 된다.

누구든지 사람에게서 이 세상의 슬픔을 덜어 주면, 하나님께서 심판날에 저의 슬픔을 덜어 주시리라.

연소자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고 연장자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 무슬림 가운데 들지 않는 자라.

너희 중 누구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이슬람의 진정한 신자가 아니니라.

다른 사람을 선으로 이끄는 사람은 누구든지 선을 행하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즉 응분의 보상이 따르리라. 그리고 악을 충동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악을 행하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즉 응분의 처벌이 따르리라.

한편, 꾸란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교훈이 많이 나온다.

오, 너희 믿는자들아! 하나님을 유념하되 온당하게 하며 이슬람의 상태 밖에서 죽지 말라. 다 함께 하나님의 밧줄을 굳게 잡아 흩어지지 말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네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라. 너희가 적이었으나 그 분이 사랑으로 너희 마음을 맺어, 그 분의 은총으로 너희가 형제가 되었으며, 너희가 불구덩이 옆에 있었으나 그 분이 거기서 너희를 구해 냈음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표징을 너희에게 분명히 하시나니, 이는 너희를 인도하려 하심이라. 오직 선을 권하고 의를 명하며 악을 금하는 사람의 무리를 너희에게서 일으키라. 저들이야말로 지복을 누릴 자들이니라.(꾸란, 3:102-104)

오, 너희 믿는자들아! 모든 의무를 이행하며…의롭고 경건한 일에는 서로 돕되, 죄를 짓고 원한을 짓는 일에는 서로 돕지 말라. 하나님을 유념하라. 하나님은 엄히 벌하심이라.(꾸란, 5:1-2)

전술한 내용에 더하여 순례의 여정 중에 예언자 무함맏이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이슬람의 사회 생활 양식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 수만 명의 순례자들에 대한 설교에서 무함맏이 특히 언급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오,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후에 한 해가 더 내게 허락되어 이 곳에서 너희를 다시 대하게 될 지 알 수 없음이라. 이 달 이 날이 모두에게 신성한 것처럼, 너희가 주님 앞에 나타날 때까지 너희 생명과 재산은 너희 사이에서 신성 불가침한 것이니라. 그리고 기억할지니, 너희는 너희 모든 행위의 회개를 너희에게 요구하실 주님 앞에 나타나야 하리라.

오, 사람들아! 너희는 아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아내는 너희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느니라. 너희 아내를 사랑스럽고 친절하게 대하라. 정녕 너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으로 너희 아내를 맞이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몸이 너희에게 합법적이 되게 하였느니라. 언제나, 하나님께서 맡기사 너희에게서 안주하고 있는 아내에게 성실을 지키고 죄를 피할지니라.

이제부터 무지와 이교의 시대에 횡행하던 유혈보복을 금하며 모든 피의 복수를 폐하노라.

그리고 너희 종들이 있으니, 너희는 살펴 너희 종들에게 너희가 먹는 음식을 먹이고 너희가 입는 것으로 입히라. 만약 너희 종이 잘못을 저질러 용서해 주고 싶지 않거든 저를 떠나 보내라. 저는 하나님의 종인지라 학대할 수 없음이라.

오, 사람들아! 내 말을 듣고 이해하라. 무슬림은 모두 형제임을 알라. 너희는 한 형제이니라. 호의로 그냥 준 것이 아니라면 다른 형제의 것을 취함은 불법이니라. 너희 자신을 지켜 불법을 행치 말라.

이 성역에서의 이 달 이 날처럼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 주를 만날 때까지 너희 각인의 생명과 재산을 다른 사람에 대해 신성 불가침한 것이 되게 하셨느니라.

여기 있는 사람은 여기 없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도록 하라. 아마 직접 듣게 될 자가 소문으로 들은 자보다 더 잘 기억할 수 있으리라.

진실로 나는 나의 사명을 이루었노라. 이제 그것을 너희 가운데 남기나니 곧 분명한 명령이요, 하나님의 성서요, 명백한 법령이라. 너희가 굳게 지키면 결코(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4.경제 생활 (up)

이슬람의 경제 생활 역시 확고한 기초와 하나님의 교훈에 입각하나. 버젓하게 일해서 생계비를 버는 것은 의무일 뿐 아니라 큰 미덕이기도 하다. 능력이 있으면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해서 사는 것은 종교적 죄요, 사회적 오명이며 수치스런 자기비하다.

하나님께서는 무슬림에게 남에게 짐이 되지 말고 제 힘으로 살아가라고 명한다. 이슬람은 떳떳하지 못하거나 나쁜 일이 아닌 한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하는 일은 모두 존중한다. 깨끗한 양심으로 사회에서 합당한 존경을 받으면서 무슬림은 자신과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일에나 나설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맏은 주거나 말거나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보다 새끼줄을 들고 나무를 베어 팔아 자기도 먹고살고 남에게 자선도 베푸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 이슬람에 의하면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의 지위를 그 사람의 생업의 종류를 보고 격하시킬 수 없다. 오히려 노동자들도 아무런 제약 없이 능력껏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켜 나갈 수 있다. 노동자들도 자기 뜻대로 균등한 기회를 누리며 사업의 자유를 향유한다.

개인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벌어들인 것은 모두 그 개인의 사유재산이다. 국가나 그 어느 누구도 이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함은 부당하다. 이러한 사유 재산권에 대한 보답으로 사회에 대하여 일정한 의무를 이해하고 국가에 세금을 바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누리게 되며 사업의 자유가 보장된다. 이슬람 제도 아래서는 탐욕적인 자본주의와 파괴적인 공산주의가 결코 고개를 쳐들 수 없다. 기업정신이 왕성한 개인은 국가의 번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역으로 국가는 개인의 안전에 대해 책임을 진다. 협동과 조화가 계급투쟁을 대신하여 상호의 안정과 신뢰가 공포와 의심을 제거한다.

산술적 계산과 생산능력만을 보고 이슬람의 경제 제도를 도출할 수는 없다. 이슬람의 경제 제도는 도덕과 원칙의 포괄적인 체계에 비추어 도출되며 또 이러한 체제에 비추어 그 제도를 생각한다. 하나님은 개인이나 회사 혹은 기관에 고용된 사람에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능률적이고 정직하게 수행하라고 명하신다. 예언자는 누구든지 일단 어떤 일을 맡았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맡은 일을 제대로 능률적으로 해 나가는 것을 보고 싶어하신다고 말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일한 사람은 자기가 일한 대가로 공정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고용주가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거나, 깎아 내리려고 하거나 주기를 망설이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벌받을 행위다.

이슬람은 특히 상거래에 주목한다. 하나님은 정직한 거래를 허용하시며 또 그것을 축복하신다. 거래는 개인, 회사, 대리점 등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데 모든 거래 관계는 숨김없이 정직하게 맺어져야 한다. 속이거나, 상인이 상품의 흠을 숨기거나, 고객의 필요를 악용하거나 자기 가격을 강요하기 위해 매점을 하는 것은 모두 범죄 행위이며, 이슬람법에 의해 처벌된다. 떳떳한 생활을 하려면 정직하게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없어져 버린다. 그 뿐만 아니라, 예언자의 말씀에 의하면 부정한 양식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날에 지옥 불에 탈것이다. 사기와 이기적 악용을 막기 위하여 이슬람은 거래에 있어서 정직을 요구하고 사기꾼에게 경고하며 떳떳하게 일할 것을 권하고, 고리 대금업을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이자를 받는 것을 금한다. 이는 곧 자신이 일해서 얻은 것만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요, 타인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하는 것은 비종교적이요, 비인간적이며, 부도덕한 처사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꾸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

고리(高利)를 받아먹는 자들은 서지 못하리니, 저들이 선다 하더라도 악마가 건드려 광기(狂氣)들리게 한 자들 같으리라. 저들의 장사도 고리대금과 마찬가지라고 말함은 이런 연고에서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사는 허락하셨으되 고리대금은 금하셨느니라. 주님에게 명을 받은 후 그치는 자들은 그 지난 일을 용서받으리니, 이들의 처지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일이라. 그러나 이(죄)를 되풀이하는 자들의 불의 친구인 즉 저들은 (영원토록)그 속에 거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고리에 대해서는 모든 복을 제하실 것이나 자선에게는 (복을)더하시리라. 하나님은 감사할 줄 모르는 악한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심이라(꾸란, 2:274-276)

그분은 하늘을 높이 올리사 (공정한)균형을 이루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합당한)균형을 범치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런 즉 공정하게 무게를 달아, 모자람이 없게 하여 균형을 지키라.(꾸란, 55:7-9)

이는 곧 공정과 정직에 의거하여 모든 거래를 하도록 인간을 인도하려는 것이다. 사기꾼의 앞날은 냉혹하며 그 운명은 끔찍스럽다. 꾸란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본다.

속이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저들은 재서 받아야 할 때는 한치도 어긋남이 없으면서 재거나, 달아서 주어야 할 때는 제대로 주지 않는 도다. (온)인류가 주님 앞에 설 권능의 날에 자신들이 헤아려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느뇨.(꾸란, 83:1-6)

그 외에도 예언자 무함맏의 많은 전승이 진실한 무슬림이 대열에서 사기꾼·착취자·독점자·부정직한 상인을 제외시키고 있다. 부정이나 사기 혹은 착취가 개입된 상거래는 엄히 금지되며 거래 관계가 맺어진 후에라도 이슬람법에 의해 취소할 수 있다. 경제와 상업에 관한 이슬람법의 주목적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의 결속을 유지하며 실업계의 고도의 윤리를 세우고 그 분야에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다. 이슬람이 이러한 제측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논리 일관의 귀결이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영적 신조뿐 아니라 각 분야를 총괄하는 완전한 생활 제도이기 때문이다.

소유주들에게 부단히 주지되는 사실은 소유주들은 실상 단지 하나님께서 그 소유물을 관리하기 위해 임명한 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무슬림이 합법적인 수단과 떳떳한 경로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물질적 풍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진짜 소유주인 것이다. 다른 소유주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대리자요 수탁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삶의 현실일 뿐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중대한 관련을 갖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소유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베풀고, 가치 있는 대의 명분에 기여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항상 갖추고 있게 한다. 소유주로 하여금 사회의 필요에 호응하게 하며 그에게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 이행해야 할 신성한 사명을 부여하는 한편, 이기심과 탐욕과 부정의 수령에서 소유주를 구해내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에서 말하는 재산의 올바른 개념이며, 그 것이 소유주가 자처하는 사실상의 지위다. 꾸란은 재산의 소유를 뛰어난 덕과, 특전이 주어진 고귀한 신분의 증거, 혹은 착취의 수단이 아니라 참기 어려운 시험으로 간주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대리지로 땅의 상속자로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라. 그분은 너희 중 어떤 사람의 지위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셨나니, 이는 당신께서 너희에게 베푸신 선물로 너희를 시험하려 하심이라. 진실로 너희 주는 속히 처벌하시나, 참으로 관대하고, 지극히 자비로운 분이시라.(꾸란, 6:165)

또한, 꾸란은 모세와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오고 간 흥미 있는 대화를 인류에게 권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세가 이렇게 말하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인내하며 변치 말고 기다리라. 땅이 하나님의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원대로 그 종들에게 땅을 유산으로 주시나니 의로운 자의 결말이 가장 좋은 것이니라'

백성들이 말하되, '당신이 우리에게 오기 전이나 후나 우리가 고생만 하는 도다' 하니 모세가 이렇게 말 하니라 : 너희 주께서 너희 적을 멸하시고 그 땅에서 너희를 상속자로 삼으시리니 그런 즉 그 분은 너희 행위로 너희를 시험하실 지 모를 일이다.' (꾸란, 7:128-129)

모세와 백성이 주고받은 이 대화가 종족의 기원이나 민족의식을 내세워 인류 가운데 특권 받은 족속을 인정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꾸란이 후대의 모세의 추종자들이 한 행위나 생각을 전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본문의 어조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비판하는 투다.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상속받은 신탁물이나 시험물의 형태로 그것을 당신의 종들에게 나누어준다는 사실을 재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꾸란 전체를 통하여 되풀이 확인한다. 예를 들어 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

천지의 주권이 하나님의 것이며 만사가 그분께로 귀일하는도다…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믿고 그 분이 너희에게 상속해 준 것으로 자선을 베풀라. 너희 중 믿고 자선을 베푸는 자들에게는 큰 보상이 있음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나니, 천지의 유산이 하나님의 것임이라.(꾸란, 57:5,7,10)

공산주의와는 달리 이슬람은 하나님의 유익한 주권으로 공산주의 국가의 인위적인 전체주의 주권을 대신하게, 건전한 윤리와 상호적 책임과 화합으로 공산주의의 계급투쟁 이론을 대신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은 탐욕적인 자본주의와 가진 자들의 무자비한 착취를 최대한 억제한다. 이슬람의 경제제도는 개인이라는 "독립된" 실체가 일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개인의 타고난 열망을 충분히 인식한다. 그러나 개인이 하나님이나 세계(우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인간이나 인간이 가진 자본을 신격화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를 신성시하고 자유기업을 폐하지도 않는다. 이슬람의 경제제도는 인간을 창조된 그대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걸맞게 인간을 다루고 인간의 타고난 열망과 능력 한계를 고려에 넣는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므로 인간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또 그렇게 다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절대의 권력과 의문의 여지가 없는 무류성을 주장하는 신이나 반신반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찮고 미천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본연의 지위와, 과장되거나 무시되지 않는 본성의 테두리 안에서만 인식되는 존재다. 자신을 제외한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 체계의 일부분이요, 세계의 전체적인 바탕을 이루는 한 요소인 것이다.

인간에게 일을 권하고 사업의 자유와 벌어서 소유할 권리를 부여하지만 인간이 단순한 수탁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인간이 신탁물로서 가지고 있는 재산의 정직한 관리를 보증하는데 필요한 조처를 요구한다. 벌어서 투자하고 소비할 권한이 인간에게 있지만, 일탈을 방지하기 위한 고도의 원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면 요점이 충분히 설명된다. 소유주에게는 아무 제한 없이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돈을 쓰거나 재산을 처리할 자유가 없다. 지출은 일정한 규정에 따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꾸란의 말씀 가운데서 소유주에게 같은 인간들에 대한 재정적 의무를 이행하고 검소한 소비를 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이 진정한 공급자요, 사실상의 소유주라는 것이 소유주에게 항상 주지되는 사실이다. 꾸란은 이렇게 단언한다 :

가난한 사람과 여행자에게 하는 것처럼 친척들에게도 저들의 정당한 권리대로 해 주라. 그러나 방탕한 자처럼 너희 재산을 낭비하지 말라. 진실로 방탕한 자들은 악마의 형제이니, 악마는 저의 주께 감사할 줄 모르느니라.…

(인색한 사람처럼) 네 손을 목에 매이게 말며 (어리석은 탕자처럼)네 손을 쭉 뻗지도 말라. 너희가 질책을 당하고 곤궁해질까 함이라. 진실로 너희 주께서는 당신이 베풀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식물을 풍성히 베푸시나니, 그분은 또한 공평히 베푸시느니라. 그분은 당신의 모든 종을 알고, 주시하고 계심이라. (꾸란, 17:26-27, 29-30)

5. 정치 생활 (up)

이슬람의 정치 생활은 사회·경제 생활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영적·도덕적 기초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교훈에 의해 인도된다. 이슬람의 정치제도는 그 구조와 기능과 목적이 독특하다. 그것은 실용주의나 도구주의가 아니다. 이슬람의 정치제도는 특정계급이 신적인 세습 혹은 비세습권리를 사칭하여 국민 위에 군림하고 책임을 초월한 듯한 태도를 취하는 신정이 아니며 복수심에 불타는 일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중적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도 아니다. 이슬람의 정치 제도는 이 모든 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이슬람의 정치관은 그것이 다음의 제원칙에 의거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올바로 인식된다 :

1. 무슬림 개인이나 집단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법인 꾸란에 의해 고무·인도되어야 한다. 꾸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실한 종들을 위해 택하신 헌법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판결하지 (혹은 다스리지)않는 자는 누구든지 불신자요…행악자요…반역자니라. (꾸란, 5:47-50) 이 꾸란이야말로 지고한 의라 선으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꾸란, 17:9)

2. 이슬람 국가의 주권은 통치자나 국민에게 속하지 않는다. 주권은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법제화하기 위해, 국민전체가 하나님의 신탁을 받아 그 주권을 행사한다. 통치자는 누구든 하나님의 법에 따라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국민에 의해 선출된 행정관 대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의 기초인 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유일한 주권자로 계시는 세계에 대한 이슬람의 전체적 소망과 일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꾸란을 보면 다음과 같은 언명에 접하게 된다 :

권위와 권력과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라, 축복을 받으소서, 하나님이시여, 주권이 그 수중에 있으며 만물을 지배하시는 도다.(꾸란, 67:1)

진실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 수탁물을 응당 받아야 할 자에게 되돌려 주라. 그리고 너희가 사람들 사이에서 판결할(혹은 다스릴)때는 공정하게 판결할지니라. 그 분이 너희에게 베푸시는 가르침이 정녕 우월하지 아니한가!(꾸란, 4:58)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의 주권이 하나님의 것이며 (만사의)궁극 목적이 그분께로 향하는 도다(꾸란, 5:18)

3. 이슬람 국가의 목적은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교의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헌법인 꾸란의 규정과 일치하게 모든 국민에게 안전과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다. 종교적 혹은 인종적 소수의 문제를 이들이 법을 준수하고 평화를 지키는 국민으로 있는 한, 생기지 않는다. 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

오, 너희 믿는 자들아! 공정한 처리의 증인으로서 어디까지나 공명정대 하라. 남들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악으로 빗나가지 말며 공정에서 벗어나지 말라. 공정 하라. 그것이 경건에 아주 가까우니라. 하나님을 유념하라. 하나님은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을 익히 알고 계심이라(꾸란, 5:8, 비교 4:135)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과…우리가 그 땅에 안주시키면 예배를 거르지 않고 제 때에 자선하며 의를 명하고 악을 금하는 자들을 수호하시리라. 만사의 끝과 (결정이)하나님께 달려 있느니라.(꾸란, 22:38-41)

4. 전술한 목적을 위해 형성되고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기 위해 세워졌기에 이슬람 국가는 비이슬람적 강령의 정당에 의해 지배되거나 타 강대국에 종속될 수 없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리고 그 분을 위하여 정당한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이슬람 국가는 독립국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무슬림이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그 분의 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며, 법을 시행하고 그 규정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최대한의 협조와 지지를 해 주는 자라는 원칙에서 연원한다. 그러므로 무슬림 국민이 비이슬람적 강령의 정당을 지지하겠다고 서약하거나 그 근본이나 목적이 외국적인 비이슬람 정부를 따르는 것은 이슬람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이기거나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꾸란, 4:141) 하나님께서 신자들 사이에서 판단(혹은 지배)케 하기 위해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에게 소환될 때 신자들은 다만 이렇게 답할 뿐이다 :

저들은 말하되, '우리가 듣고 우리가 복종하나이다.' 하리라. …너희 가운데 믿고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 하셨나니, 그 분은 정녕코 저들보다 앞선 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을 그 땅에서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시며, 저들이 두려움 속에 살았던 지난날의 형세를 안전과 평화의 형세로 바꾸시리라 : '저들이 나만을 숭배하여 나에게 어떤 동반자도 붙이지 않으리라.'(꾸란, 24:51,55)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하셨다 : 나와 나의 사도들이 정녕 이기리라. 진실로 하나님은 힘에 충만하고 당신의 뜻을 시행할 수 있는 분이시라. 너희가 하나님과 마지막 날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들을 적대하는 자들을 비록 저들이 자기 아버지나 아들이나 형제나 친척이라 하더라도 사랑함을 보지 못하리라. 이런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 분께서 저들의 마음속에 신앙을 기록하셨으며 친히 영으로 저들을 강하게 하셨느니라.(꾸란, 58:21-22)

5. 통치자는 누구든 국민에 대한 주권자가 아니다. 통치자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국민을 대표하는 고용인이며, 하나님께서 감독하시는 엄숙한 계약에 의해 통치자와 피치자를 다함께 구속하는 하나님의 법에 통치자 자신이 복종함으로써 권위를 부여받는다. 이슬람의 정치적 계약을 정부와 국민 사이에서만 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계약은 정부와 국민 그리고 그 상대로써 하나님 사이에 체결되며 그것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경우에 한하여 도덕적으로 유효하며 구속력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행하기 위하여 국민에 의해 선출된 통치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한 국민으로부터 협조와 지지를 받을 권리가 있다. 국민이나 어떤 사회 성원이 어떤 행정관들에 대해 지지와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면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은 물론 정부에 대한 무책임한 범죄로 간주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하나님이 길에서 벗어나거나 그 분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똑같이 죄를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지지와 충성을 받을 권리를 잃게 된다. 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

오, 너희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의)사도와 너희 가운데 권위가 부여된 자들에게 순종하라. 너희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생기거든, 하나님과 마지막 날을 믿는다면 그 일을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에게 맡기라. 그렇게 함이 최선이며 종래에 가장 온당하니라. (꾸란, 4:59)

권위가 부여된 자들에 대한 순종은 이들 자신이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의 전승에 순종한다는 것을 그 조건으로 한다. 무함맏은 결정적인 언명 가운데 하나에서 그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법에 구속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통치자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순종이나 충성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무함맏의 초기 계승자들은 이런 원칙을 아주 분명하게 하였던 바, 정책을 처음 발표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한 백성은 자신들에게 복종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다면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6. 통치자나 행정관은 덕성과 적성과 능력을 근거로 하여 최선의 자격을 갖춘 국민들 가운데서 선출되어야 한다. 출신 인종이나 가문의 위광 혹은 경제적 지위 그 자체는 결코 후보자의 고위 공직에 대한 자격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각 입후보자는 그 자신의 실적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며, 가문의 위광·재산·인종·연령 따위는 이런 실적의 유의적 부분이 아니다. 후보자는 총선거를 통하여 국민의 동의에 의하여 선출하거나 사회 여러 분야의 자유 동의에 의해 리더십이 위임될 민중의 지도자가 뽑아서 권한을 부여해 줄 수도 있다. 따라서 이슬람 국가는 원하는 만큼의 대의원회 혹은 시의회를 둘 수 있다. 선거권과 행정 행위는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으며, 사회 전체의 최선의 이익을 그 목표로 해야 한다. 예언자 무함맏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 사회에 더 적임자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공직을 맡기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와 무슬림들의 신뢰를 배반한 것이니라.'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유권자들이 도덕적으로 말하면 공사에 무관심할 수 없으며 투표할 경우에는 반드시 신중히 알아본 다음에 투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면 국가는 현대의 많은 민주국가들이 하지 못하고 있는 안전과 책임이 따르는 시민권에 대한 최대한의 보장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7. 국민이 선거를 통하여 통치자를 선출한 다음에 국민 각자에게는 자기 자력으로 정부 행위를 감독하고 공사에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항시 그 처리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 요구된다. 만약 정부가 하나님과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다면 직무 수행을 할 권리를 상실한다. 그 정부는 축출되고 다른 정부로 대체되어야 한다. 국민을 위해 이런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민 모두의 의무다. 그러므로 세습정권이나 종신통치의 문제는 이슬람국가에 해당이 없다.

8. 통치자는 국민에 의해 선출·임명되지만 통치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지며 그 다음으로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 통치자의 직책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그 역할 역시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통치자는 문서에 서명이나 하고 국민의 의사를 그 시비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집행하는 것을 일삼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국민 최선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게 실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 통치자다. 통치자는 이중의 책임을 짊어지기 때문이다. 자기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께 책임을 지는 일과, 자기를 신뢰하는 국민에게 책임을 하는 것이다. 국민이나 국민의 대표자들을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대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실직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국민은 또한 꾸란을 어떻게 취급했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속력을 가진 그 분의 법을 어떻게 여겼느냐에 대해서도 이실직고해야 할 것이다. 국민에 대한 책임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이슬람의 정치 제도는 인류가 알고 있는 여타의 모든 정치 제도와 교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통치자가 자기 마음대로 국민을 지배하지 못한다. 통치자는 정의를 불문율로 하고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님에 대한 진정한 복종을 국가의 정식 기능으로 하며 건전한 윤리를 행정부의 고상한 사업으로 하여 국민에게 봉사해야 한다.

9. 꾸란이 이슬람 국가의 헌법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슬림들에게 협의의 방법을 통하고 공사를 처리하라고 명하신다. 이는 국가적·국제적 차원은 물론 지방적 차원에서 입법회의와 자문기관을 둘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의 국민 모두에게는 공사에 대하여 최선의 조언을 할 것이 요구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의무와 이행을 실천적이고 실속 있게 보증하기 위해 통치자는 학식 있고 경험 있는 국민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리낌없이 말해야 하는 일반 국민의 권리를 부정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으로 이슬람 국가의 국민 모두는 어떤 자격으로든 이행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으며 공사의 처리에 직·간접적으로 깊이 관여한다. 이슬람의 역사는 최고 통치자와 칼리프들이 남녀를 불문한 일반 국민에게 추궁 당하고 조언과 시정을 받은 믿을 만할 기록을 보여 준다. 상호 협의의 원칙은 이슬람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인 만큼 자기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말해야 할뿐만 아니라 가장 진지하고 효과적으로 사회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정치 혹은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는 다른 분야에 있어서의 협의의 방법은 민주적인 통치 방식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명령이요 피치자는 물론 통치자에게 부과되는 도덕적인 의무다. 예언자는 그 자신 어떠한 원칙을 부단히 실천한 데 더하여, 훌륭한 조언을 제시하는 것을 가리켜 종교의 필수요소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조언의 목적은 하나님의 법의 준수와 국민의 권리의 존중과 그 의무의 이행을 보호하는데 있다. 직업적인 정치가 발흥하는 것을 막고 기회주의적 정강을 가진 지하의 정치가들을 꺾기 위해 예언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그것이 조언의 형식이든 다른 형식이든-옳고 선한 말을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려거든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고문과 조언자에게 이기적인 성향이냐 유혹을 제어하라고 경고하는 것이며, 조언은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며 그 분을 대신하여 이루어지고 공공복리를 그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가장 진정한 의도로써 최선의 공익을 위해 그것이 제시됨을 보증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조언을 구하고 국민이 조언을 주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자발적인 조치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조요, 종교적인 법령이다. 무함맏 자신이 지혜롭고 "무류하며 헌식적"이긴 했지만 이러한 처세훈을 초월해 있지 않았으며, 이러한 규정에 대한 예외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무함맏에게 이렇게 지시하신다 :

네가 저들 (너희 백성들)을 온유하게 대함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이라, 네가 가혹하거나 매정하다면, 저들이 네 곁에서 벌써 떠났으리라, 그런 즉 저들의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며 저들을 위해 (하나님의)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중요한)일에는 저들에게 조언을 구하라. 그 다음 네가 결정을 내렸으면 (그분을)신뢰하라. (꾸란, 3:159)

꾸란은 신자의 특성을 열거하는 가운데 상호조언(의논)을 하나의 신조로써 명기하고 있다.

신자란 하나님을 믿고 주를 신뢰하는 사람이요, 더 큰 범죄와 수치스러운 행위를 피하고 화가 나더라도 용서하는 사람이며,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배를 거르지 않고 서로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고 우리가 식물로 준 것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요, 부당하게 억압당하면, (겁을 먹지 않고)스스로 일어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니라. (꾸란, 42:36-39)

10. 이슬람의 정치 제도 아래서는 국민은 저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하고 운명을 개척하며, 일하고 경쟁하고, 벌어서 소유하며, 자신의 정직한 판단에 따라 찬성하거나 반대할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는 혼돈과 무정부 상태로 화해 버린다. 자유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 보증되며, 같은 하나님의 법에 지배된다. 이 자유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는 한, 그것은 국민 모두의 정당한 특권이 되지만, 법의 한계를 벗어나고 공익과 충동할 때는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은 우주 전체의 일부이므로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한편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민족의 일원이므로 피차에 유익하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고려하여 조절해야 한다. 그러나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소요를 일으키거나 견강부회하는 일이 없이 타인을 설득하여 자신의 신념을 믿게 할 충분한 자유가 있다. 다수가 다른 길을 택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개인은 다수를 따라야 한다. 제기된 문제는 더 이상 개인적인 심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집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꾸란, 3:102-105, 8:46)

11. 이슬람 국가의 통치자의 직위는 공적인 신탁물인 바, 국민 공통의 동의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행정관들에게 위임된 것이다. 하나님이 국가의 최고 주권자이므로 최고위직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는 누구든지 수탁 권리에 충성해야 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여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대다수가 무슬림이므로 대통령이나 칼리프 직위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진실한 무슬림이어야 한다. 이러한 조처를 취하는 것은 공익에 이바지하고 국민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국가의 모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다. 또한 이러한 조처는 이른바 종교적·인종적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고 존중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통치가 곡해·왜곡된 것은 인류에게 유감스러운 일이다. 실상인 즉 이슬람의 통치는 소수를 차별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주장한다. 법을 준수하는 이슬람 국가의 국민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렇게 할 자유가 있으며 책임을 다하는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특권을 타인과 공유한다. 그가 관습법에 복종하고 권리를 행사하되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이행하는 한, 무슬림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지위가 격하되거나 이등 국민의 신분으로 낮아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만약 그가 국가의 존속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안전과 복지에 대한 대가로 무슬림 국민과 마찬가지로 종교세(자카)와 기타 국세를 바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세금(자카)을 바치는 것이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거나 자신이 무슬림이 아니라서 기분이 상한다고 생각한다면 "공물" 혹은 지즈야로 알려진 다른 형태로 세금을 바칠 수도 있다.-그러므로 그는 사실상 그 국가의 무슬림들이 누리지 못하는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기여하는데 대한 대가로 그는 국가 공무원과 사회에 의해 보호와 안전을 제공받을 충분한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국민이 혼인·이혼·음식·상속 등의 사생활을 이슬람의 법에 따라 관리하고자 한다면, 그의 희망은 인정되고 그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 교리에 따라 이런 일들을 처리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가 있으며 누구도 거기에 대한 그의 권리를 훼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적인 혹은 감정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의지할 수도 있고 공적 규정에 의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익과 공사의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의 법 곧 하나님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하거나 안전과 보호의 권리가 다른 국민보다 못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한갖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천국의 꿈이 아니다. 그것은 꾸란의 가르침이요, 무함맏의 관습이며 이슬람 역사의 기록이다. 예를 들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무함맏 이후 제 2대 칼리프인 우마르 이븐 알-까따브가 한 번은 어떤 곳을 지나다가 가엾은 처지에 있는 한 늙은 유대인을 보게 되었다. 우마르는 그 사람에 대해 물어 보고는 그 처지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감이 섞인 말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 "그대가 능력이 있을 때 우리는 그대에게서 공물을 징수했다. 그런데 이제 그대가 돌보는 이 없어 버려져 있으니 진정 이 우마르가 그대에게 불공평하였도다!" 말을 마치자 우마르는 연금을 정기적으로 그 노인에게 주라고 명했고 그 명은 즉각 시행되었다. 우마르를 비롯한 통치자들은 무함맏이 이룬 정치적 정향(定向)을 수용하였으며, 이 무함맏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 가르침이 다음의 꾸란 구절에 적혀 있다 :

너희 신앙을 인하여 너희와 싸우지 아니하며 너희 집에서 너희를 쫓아 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친절하고 공평하게 대함을 하나님은 금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공평한 사람을 사랑하심이라. 다만 하나님께서는 너희 신앙을 인하여 너희와 싸우며 너희 집에서 너희를 쫓아내고 남을 도와 너희를 추방하는 자들에게 우정과 보호를 금하시느니라. 저들에게 우정과 보호를 구하는 자들은 행악자들이니라. (꾸란, 60:8-9)

끝으로 이슬람 국가와 그 무슬림 원수의 필요성을 소수 집단에 속할지도 모르는 자가 이론적으로 국가 원수로 있을 법한 세속국가와 비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이다. 이러한 비교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불합리하며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첫째, 그것은 세속주의가 아무리 피상적이라 하더라도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보다 건전하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 혹은 전체는 과장된 것이다. 둘째, 이슬람하의 국가 원수의 의무와 권리는 전술한 바, 세속질서에 속해 있는 국가 원수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셋째, 현대의 세속 정신은 대부분의 경우 배상하여 구제 내지 사죄하는 것이나 이것은 이슬람에는 적합하지 않다. 더욱이 세속 국가의 원수가 진실한 사람일 수 있다 하더라도 인종적·종족적 혹은 종교적으로는 소수에 속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국가 원수는 거의 예외 없이 다수당에 가입해야 한다. 이것은 실제에 있어서 종교적 다수를 정치적 다수로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것을 소수의 지위 향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세속 논리는 전반적으로 국가 원수직을 개인에게 부여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리나 특전으로 전제한다. 이슬람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슬람에 있어서의 국가 원수직은 최우선적으로 의무요 감당하기 어려운 서약이며 두려운 책임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만약 이런 책임을 비무슬림에게 과한다면 그것은 형평을 잃은 처사가 될 것이다.

6. 국제 생활 (up)

이슬람의 국제 생활이란 이슬람 국가 혹은 민족과 타국가 혹은 민족 사이의 관계 노선이다. 이슬람 생활의 다른 측면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하나님의 인도에서 비롯하며 하나님의 모범을 따른다. 국제 생활이 세워지는 기초는 다음과 같다 :

1. 기원과 인간으로서의 지위와 목적에 있어서의 인류의 통일성을 확신한다. (꾸란, 4:1, 7:189, 49:13)

2. 무슬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타국민의 이익과 생존권, 명예와 재산을 합당하게 존경한다. 이것은 권리 침해와 범죄와 부정이 엄히 금지되기 때문이다. (꾸란, 2:190-193, 42:42)

3. 평화를 정상적인 관계 노선으로 하여 선의의 사절을 교환하고 만인의 공유하는 인간애를 위해 상호 정직하게 노력한다. (꾸란, 8:61과 전기 참조)

4. 국제 관계에 있어서 유화정책과 침략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이슬람 국가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평화를 어지럽히거나 안보를 위협하거나 평화정책을 악용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국가는 즉시 자신을 방위하고 이런 성격을 가진 모든 기도를 분쇄해야 한다. 이런 경우 이런 생활 아래서만 이슬람은 전쟁을 정당시한다. 그러나 전쟁을 할 경우에도 그 범위를 최소한도에 국한시키고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전쟁을 한다는 도덕적인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슬람에 있어서의 전쟁과 평화의 법은 자주 도덕적이고 독특하며 포괄적이고 건전하다. 이 법은 본서에서 다룰 이유는 없지만 법학자나 윤리학자들이 특히 연구해 볼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침략전쟁을 정당시하지 않으며 농작물, 동물, 집 등의 전쟁의 객체는 파손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슬람은 비전투원인 부녀자·아이·노약자의 살해는 허용하지 않으며 전쟁포로의 고문이나 패자에 대한 교리의 강요를 묵인하지 않는다. 전쟁은 세상에 부정과 불의와 침략이 존재하는 한 이슬람의 현실적인 제원칙에 의해 정당화되는 방어 조처에 불과하다.(꾸란, 2:190-195, 216-218, 22:39-41, 또한 후기의 지하드 논의 참조)

5. 이슬람 국가가 짊어질 의무들을 이행하고 이슬람 국가와 타국가 간에 체결된 조약을 존중한다. 이것은 조약 상대방이 자기 의무에 충실하고 조약을 존중하는 경우에 한하여 구속력을 가진다. 그렇지 않을 경우 조약은 효력을 상실하며 의무의 구속성은 없어진다.(꾸란, 5:1, 8:55-56,58, 9:3-4)

6. 국내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국제적 차원에서의 인간 이해와 보편적인 형제애의 실현에 진심으로 기여한다.

이상이 이슬람 국가가 국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고무적인 원천이다. 이슬람 국가는 자신과 그 국민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국제적인 장(場)속에서 넓은 활동 범위와 중요한 사명을 가지는 것이다. 이슬람의 명에 의해 이슬람 국가는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자국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또 같은 명에 의해 전체 인류에게 가치 있는 공헌을 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 우호적인 국민과 국가와의 우호관계를 마련하며, 이슬람 국가가 국제적 차원에서 인류를 위해 교육·경제·산업·정치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역할은 무함맏에 의해 친히 시작되었고 그 분의 후대 추종자들에 의해 존속되었다.

본 장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여기서 논의된 내용은 모두 꾸란과 무함맏의 관습에 언급된 건전하고 진실하며 참된 이슬람의 제원칙에 근거한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이것이 무함맏과 그 분의 충실한 추종자들이 가장 훌륭하게 실천하고 본을 보였던 이슬람이다. 어느 특정 신학자 혹은 어느 특정 법학자나 지배자의 이슬람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이슬람 본연의 이슬람이라고 필자는 믿는 바이다.

또 하나 명심해 둘 것은 이슬람의 생활 제도는 독특하며 여타의 모든 제도와 이데올로기와 다르다고 하는 점이다. 영적 혹은 도덕적, 지적 혹은 문화적·정치적 혹은 경제적 관점에서 모든 기타 다른 관점에서 모든 이슬람의 생활 제도가 독특한 성격을 띤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

1.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의 근원이 다르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게 아니다. 파괴적인 정치가나 복수심에 불타는 경제학자의 저작이 아니요, 실용주의적인 윤리학자나 이기적인 산업주의자의 작품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이며 무한하신 분의 예술품이다. 그리고 성질상 그것은 구속력을 가지며 충실한 모든 사람에 의해 존중된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는 풀기 어려운 신비나 은밀한 제한이나 특권의 사칭이 없기 때문에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를 이해할 수 있다.

2.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의 목적이 또한 다르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는 세계 지배나 물리적 팽창을 목적을 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의 뜻에 세계를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법의 한계에 세계를 묶어 두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 주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인간에게 도움을 주어 창조주의 법에 순종하고 주님의 충실한 대리자기 되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간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는 생활의 모든 측면을 다룬다. 그 의도는 인간에게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 살아있는 양심과 건전한 신체 그리고 감수성을 키워 주려는데 있다. 이러한 자질을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에게 복종하며 가장 건전한 생활의 길을 택한다. 그러므로 이슬람 이데올로기의 제 목적은 결코 인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3.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는 자체의 포괄성과 실천성, 온전성과 융통성을 보지(保持)케 하는 제반 요소와 힘을 내포한다.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한다는 것은 단지 기본적이고 불가침한 제원칙을 나타내는데 그치며, 인간의 이지(理智)가 세부(細部)를 결정하고 필요한 적응을 할 수 있는 폭넓은 여지를 허용한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보든, 포괄적이고 실천적이며, 기지에 넘치는 제원칙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이들 원칙이 어느 때든지 실천되고 실현되어 왔기 때문이며 온건하다 함은 이슬람 원칙이 자본가 개인이나 프롤레타리아를 두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원칙은 오로지 세속사 아니면 영적인 일에만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현세나 내세의 생명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극단 사이에 중도를 명시하여 온건하고 건실한 생활로 인도하는 것이 이들 원칙인 것이다. 이러한 확립된 원칙이 각 지역과 시대에 맞게 세부 사항을 결정할 수 있는 융통성이 풍부하다. 이러한 융통성은 하나의 사실이요, 필연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작품이며 그 분의 작품 모두가 그러하듯 그 속에는 인간의 정신이 활동하고 인간이 시험해 볼 수 있는 폭넓은 여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Source: Islam Fra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