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 장 이슬람에 대한 왜곡

본 장에서는 일부 무슬림이 망각하고 사실상 여타의 모든 사람들이 왜곡해 온 이슬람의 몇 가지 측면들을 다룬다. 이들 측면에 진리의 빛을 투시하여 진상을 밝히는데 역점을 둘 것이다. 진상을 밝히되 누구를 달래거나 비난하거나 혹은 누구에게 아첨할 생각도 없다. 이슬람은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직선적인 사고와 행동을 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측면의 진상을 발견·제시하여 비무슬림의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지적이고 책임을 질 줄 아는 합리적인 존재답게 각자가 스스로 보고 결정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 본 논의의 의도다.

서양에 살고 있거나 서양의 문헌에 친숙한 무슬림들은 일부 서양인들이 내놓은 놀라운 연구 내용과 충격적인 논평에 종종 접한다. "성전", "반 그리스도 이슬람", "일부 다처제", "이혼", "이슬람에서의 여자의 지위" 등이 가장 자주 거론되는 문제 등이다. 진리를 위하여 그리고 오해하고 있는 악의 없는 연구자들 가운데 정직한 사람들을 위하여 이 문제들을 간단히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성전(지하드) (up)

이슬람이 칼로 전파되었을까? "꾸란이 아니면 칼"이라는 것이 무슬림의 상징이었을까? 무슬림들은 세속 권력 혹은 전리품이나 추구하는 제국주의자들이었을까?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꾸란은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무함맏의 전기가 나타내는 바는 무엇인가? 진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정직한 사람 모두에게는 스스로 답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알려 주는 일이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에 불의와 압제와 변덕스러운 야심과 독단주인 주장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존재의 필연이요, 삶의 현실임을 꾸란은 분명히 한다. 이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가-역사의 먼동이 틀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국지전·내란·세계 대전으로 고통을 당해 왔다는 것은 역사 기록의 문제가 아닌가? 그리고 승리한 동맹국은 흔히 자기네 이익과 패전한 적의 지위에 대한 분쟁을 전쟁이나 전쟁의 위협을 통하여 처리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닌가? 오늘날까지도 인류는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에서 전쟁의 끊임없는 공포와 소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삶의 현실을 간과하실 수 있었을까? 혹은 꾸란이 현실적이고 효과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었을까? 단연코 아니다! 이것이 이슬람이 전쟁을 자기를 방위하고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회복하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수단으로 인정하는 까닭이다. 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에게 싸울 것을 명하나 너희는 싸움을 싫어하는 도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로운 것을 너희가 싫어 할 수도 있고, 너희에게 해로운 것을 너희가 좋아 할 수도 있나니, 하나님은 아시나 너희는 알지 못하느니라.(꾸란, 2:216)

하나님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다른 무리로 저지하지 않으신다면 땅은 정녕 해악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대한 자비로 충만하시도다.(꾸란, 2:251)

하나님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다른 무리로 저지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수다히 기념하는 수도원과 교회와 회당과 성원이 정녕코 무너졌으리라.(꾸란, 22:40) 이슬람은 그 접근 방법이 현실적이기 하지만 자기편이나 상대편이 침략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침략 전쟁이나 침략 전쟁의 개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에게 전쟁을 시작하거나 전쟁 행위에 착수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명을 받고 있다. 앞장에서 이미 말한 내용에 더하여 꾸란의 특별한 몇몇 귀절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을 위하여, 너희와 싸우는 자들과 싸우되 한계를 위반하지 말아라(전쟁을 시작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위반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심이라. 그리고 너희가 어디에서 저들을 잡든지 죽일 것이요 저들이 쫓아낸 곳에서 저들을 쫓아낼지니라. 폭동과 압제가 살육보다 더 나쁨이라. 그러나 저들이 (먼저)너희에게 싸움을 걸지 않는 한 성원에서 저들과 싸우지 말라. 그러나 저들이 싸움을 걸어온다면 살해하라. 이것이 신앙을 억압하는 저들의 댓가이니라. 그러나 저들이 그친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자비로우사 용서하시느니라. 그리고 저들과 싸우되 더 이상의 박해가 없을 때까지, 정의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편안해 때까지 하라. 그러나 저들이 그친다면 압제를 자행하는 자들 말고는 적대 행위를 하지 말라.(꾸란, 2:190-193) 전쟁이 이슬람의 목적은 아니며 무슬림의 정상적인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수단이 통하지 않는 비상 사태 아래에서만 사용되는 최후의 수단이다. 이것이 이슬람에서 전쟁이 차지하는 사실상의 위치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다. 이슬람의 의미는 평화이며 하나님의 이름 중의 하나가 평화다. 무슬림과 천사의 일상의 인사말도 평화다. 낙원은 평화의 집이며 '형용사'로서의 무슬림은 '평화로운'을 뜻한다. 평화는 이슬람의 본질이요, 의미의 상징이요, 목적이다. 모든 사람은 종교적·지리적·인종적 이유를 불문하고 이슬람이나 무슬림들을 공격하지 않는 한 이슬람의 평화와 무슬림의 친절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비무슬림들이 무슬림들과 평화를 유지하거나 이슬람에 무관심하다면 그들에게 선전을 포고할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비무슬림에게 이슬람을 강요하기 위한 종교 전쟁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안으로부터의 깊은 확신에게 우러나오지 않는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가납하시지도 않거니와 그 신앙 고백자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의 평화로운 자유를 보장하고 종교의 강요를 금하는 종교나 헌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슬람이며 또 이슬람뿐일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종교를 강요하지 말라. 진리는 오류와 뚜렷이 구별되매, 누구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결코 부서지지 않는 가장 믿을 만한 손잡이를 잡은 것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듣고 아시느니라.(꾸란, 2:256)

이슬람을 전파하는 경우에도 무슬림은 무력을 쓰는 것이 금지될 뿐만 아니라 가장 평화적인 방법을 쓰라는 명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함맏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지혜를 다하고 아름다운 선교를 펴 (모든 사람을)너의 주의 길로 초대하며 최선을 다하여 가장 정중하게 저들과 의논하라. 너희 주께서 누가 당신의 길에서 벗어났으며 누가 인도를 받아들이는지 가장 잘 아심이라.(꾸란, 16:125)

(단순한 논쟁보다)더 낳은 방법이 아니라면 악행과 해를 가하는 자들을 상대하지 않는 한 성서의 백성들(유태인과 기독교인)과 논쟁하지 말고 이렇게 말할지니라. 우리에게 임한 계시와 너희에게 임한 계시를 믿노라. 우리의 하나님이요, 너희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우리(이슬람)는 바로 그 분께 경배하느니라(꾸란, 29:46) 그런데 이슬람이 그처럼 평화로 일컬어지고 무슬림들이 그처럼 평화에 헌신한다면 그리고 꾸란이 평화를 지지한다면 무함맏이 전쟁을 개시하고 전투를 명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꾸란은 '저들을 죽이고' 저들과 싸우라고 말하는가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이 질문을 검토하려면 불가불 이교도에 대한 무슬림의 전쟁에 수반되고 그 전쟁을 예견한 역사적 사실 몇 가지를 언급해야 한다.

무함맏은 하나님에게 임무를 받은 후에 공개 회의를 소집하여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내용에 대해 말하면서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한 분이신 참하나님을 믿으라고 호소하였다. 무함맏이 행한 최초의 평화적이고, 논리 정연한 호소는 저항에 부딪쳤을 뿐 아니라 조롱과 냉소와 비웃음을 당하였다. 그래도 무함맏은 그치지 않고 백성들에게 축복 받을 부름을 얘기했으나 거의 성과가 없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이슬람을 전파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자 그는 소수의 추종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고생을 덜어 주기 위해 수년 동안 은밀히 선교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선교하라는 지시가 내리자 박해와 고문이 점점 심하고 무자비하게 무슬림들에게 가해졌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질수록 무슬림의 수는 늘어만 갔다. 이교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침묵시키려고 온갖 압력과 유혹을 기도했다. 그러나 이런 기도가 되풀이 될 수록 무함맏과 무슬림들은 점점 더 의연한 태도를 취했다. 이교도들은 위협·압력·재산의 몰수·조롱 등에 의해 신자들의 믿음을 깨뜨릴 수 없게 되니까 무슬림들에 대한 가혹한 보이코트와 맹렬한 추방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수년 동안 멕카인들과 매매·혼인·계약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무슬림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보이코트는 이교도들이 그것을 지키는데 지쳐서 철회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혹한 보이코트는 끝났으나 그렇다고 이교도들이 평화의 뜻을 비치거나 평온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압력과 박해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무슬림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교도들은 막후에서 수뇌회담을 열어 이슬람을 뿌리뽑고 무함맏을 단번에 제거하기 위한 차후의 대책을 논의하였다. 각 부족에서 장사 한 사람씩을 뽑아 무함맏이 잠자고 있는 틈을 타서 살해하자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무함맏의 사명이 그 장소에서 끝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함맏에게 정든 고향 멕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하여 토착 무슬림들과 멕카에서 메디나로 먼저 피신한 이주자들과 재결합하라고 지시하였다.(꾸란, 8:30, 9:40 참조) 이것이 바로 히즈라 혹은 성천의 대사건이었던 바, 이슬람 역사가 여기서 시작되며 이슬람력이 여기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멕카에서 피신할 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진 재산과 소유물 전부와 가족들까지 뒤에 남겨 놓게 되었다. 메디나에 정착하자마자 무함맏은 평화적인 선교를 재개하여 이슬람으로 정중하게 초대하였다. 일부 토착민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하여 즉시 무슬림 공동체의 어엿한 성원이 되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신념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함맏은 고귀한 평화와 개혁에 헌신하였던 것이므로, 비무슬림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고 편협한 부족적 충성 대신에 사회·국가적 양심을 그 마음속에 일깨웠다.

무함맏이 이러한 개혁을 하면서 메디나에 무슬림 공동체를 조직하고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나란히 살 수 있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의 기초를 놓는데 힘쓰고 있는 동안, 메카의 적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무슬림에 대한 증오심은 불길처럼 타올랐고 이슬람을 뿌리뽑자는 결의는 하루가 다르게 굳세어만 갔다. 그들은 전략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계획이 마무리되자마자 그 실행에 착수하였다. 대외적으로 무슬림들을 곤경에 빠뜨리자는 것이 그들의 작전이었다. 메디나를 공략하여 손에 닥치는 대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올 양으로 약탈·침략군이 조직되었다. 메디나의 비무슬림들은 이슬람이 끄는 인기와 그들로서는 경험하지도 못했고 특히나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을 눈꼴사나워하며 무슬림 상호간의 고귀한 형제애의 정신을 점점 시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멕카의 적들을 놓칠세라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무슬림에 대한 내란을 획책하였다. 시기하는 메디나의 비무슬림들의 멕카인의 선동에 대한 반응은 신속하고 뚜렷하였으며 메디나 전역에 걸쳐 심각한 분란이 있었다.

이제 무슬림들은 멕카로부터의 조직적인 침공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메디나의 새롭게 눈을 뜬 자들에 의해 내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무슬림들은 더 이상의 박해와 위협을 감당할 수 없는 막바지에 몰렸다. 가족과는 강제로 헤어졌으며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들은 피를 뿌렸고 3차에 걸친 이주 파동-두 번은 아비시니아로 한 번은 메디나로-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30여 년을 참았던 것이다. 멕카의 적이 세운 새로운 전략 앞에서 대량 학살로 전멸의 최후를 기다리거나 압제와 박해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것 외에 무슬림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역설이었다. 이슬람은 무슬림들에게 존엄과 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고 선과 도움, 능력과 평화의 최고 원천이신 하나님과 동맹을 맺어주기 위해서 왔다. 그러나 그들은 도움을 받기는커녕 근심과 위협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슬람은 그들에게 평화를 수립하고 의를 명하며 악을 금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옹호하며 피정복자들을 해방시키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얼마나 믿음직하고 도움이 되는 분인가를 입증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그러나 이들 자신이 억압당하고 두려움에 빠진데다 무력한 상태에 처해버린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 대부분을 당혹케 한 것은 꾸란이 그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어떻게 하라는 특별한 지시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 당혹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문제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단을 내려 그들의 슬픔을 덜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내린 결단을 다음과 같이 말씀으로 나타내신다: 진실로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수호하시니라. 하나님은 믿음을 배반하거나 배은망덕한 자를 정녕코 사랑치 아니하시느니라. 전쟁을 걸어오면 싸울 것을 허락하노니, 이는 저들이 해를 당함이라. 진실로 하나님은 지극히 강하사 저들을 도우시느니라, 저들은 (아무 까닭도 없이)'우리의 주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자기 집에서 쫓겨난 자들이라. 하나님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다른 무리로 저지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수다히 기념하는 수도원과 교회와 회당과 성원이 정녕코 무너졌으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대의를 돕는 자들을 정녕 도우시리니 진실로 하나님은 힘으로 충만하고 능력에 뛰어나며 (당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분이심이라. 저들은 우리가 그 땅에 안주시키면 예배를 거르지 않고 제 때에 자선하며 의를 명하고 악을 금하는 자들이라. 만사의 끝과(결정이) 하나님께 달려 있느니라(꾸란, 22:38-41) 하나님께서 이렇게 허락을 내리자 무슬림들은 더 이상 박해와 압제를 당하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평온을 다시 찾고 평화와 자유를 회복하며 자기 가족과 재회하고 재산을 되찾기 위해 대항하였다. 무슬림의 평화와 자유를 약탈하게 거부한 악의의 이교도들과 전투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무슬림 편에서 먼저 공격한다든지, 집·농작물·보급품 등을 파손한다는 지 혹은 비전투원인 아이·부녀자·무능력자를 죽이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무슬림들은 이들 규정을 지켜 하나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후후무한 일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 아래서 무슬림들은 싸워야 했으며,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원칙과 지시로써 그들은 최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검은 아라비아의 이글거리는 메마른 사막에서 출현하여 로마와 페르시아의 속령을 정복하고 대담하게도 유럽의 성벽을 에워싸기까지한 '잔인한' 무슬림을 다룬 얘기나 기록이 상당히 많다. 이 무슬림들이 갈 수 있는 데까지 무력을 이슬람을 전파시키겠다는 종교적 열망에 의해 움직였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 이슬람은-그 성격상-강요될 수 없으며 설사 이슬람을 피정복민에게 강요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곳에서 오랫 동안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정복된 지역에서 비무슬림들이 축출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견해를 어리석고 소박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슬람은 가는 곳마다-몇 가지 이유 때문에 스페인은 예외로 하고-살아 남았으며, 무슬림 정복자들이 가는 곳마다 비무슬림 토착민들과 나란히 살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거 하는 바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이슬람 같은 종교를 누구에게 강요할 경우, 새로운 지역의 무슬림 개종자들이 그랬던 것만큼 자기 신앙에 대해 지지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예를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패배한 사람들 중에서 이처럼 훌륭한 무슬림들을 키워내는데는 강요 이상을 요하며, 이들이 "강요된"종교를 지지하고 여기에 애착을 찾게 하는 데는 억압 훨씬 이상을 요한다. 㐀

또 하나, 일부 지식인 혹은 사리에 밝은 비판자나 권위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지니는 사고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이슬람이 무력으로 전파되었다는 저 어리석고 소박한 견해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슬람의 팽창을 아라비아의 열기와 가뭄에 질식하고 단순히 경제적인 필요와 사정에 의해 움직인 무슬림들이 일으킨 침략 전쟁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한 전쟁과 모험은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급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랍인들이 그처럼 고도한 희생과 헌신을 하지 않았고, 무함맏의 사후 그의 잔존자들과 이들의 뒤를 이은 잔존자들이 종교에 아주 흥미를 잃고 당장의 욕구만을 채우기 위해 기동했으며 이슬람 자체가 아랍의 무슬림 전사들의 마음에 열기와 정열을 불어넣을 수 없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암시는 다양하며 이런 견해의 지식인들은 어느 것을 앞세워야 할 지 단정한 입장이 못 된다.

아라비아에서의 무슬림의 전쟁을 약탈과 침략의 야욕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지니는 사고 경향이 또 하나 있다. 그들은 무슬림에게서 피에 굶주리고 전리품을 노린다는 것 이외의 동기를 보지 못하며 다른 호소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슬람에서 미덕을 보려하지 않으며 무슬림에게 고상한 동기를 관련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 각파 사이의 논쟁은 아주 심각하며 때로 학문적인 논의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어쨌거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비판자들 중 누구도 진지하게, 문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여 진상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통찰력이 결어되어 있었고 사건 전모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공표할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들이 언젠가 자신들이 수많은 사람을 오도하여 판단을 그르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짐이 얼마나 무겁겠는가! 진리에 대해, 무슬림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추종자들에 대해 대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할 것인가!

여기서 각 전쟁과 전투에 관한 이슬람의 견해를 상세히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급해 두면 문제 전체를 올바로 알 수 있게 할 주요 논점이 몇 가지 있다.

1. 모든 인류를 위한 자비로서의 사명을 하나님에게 받은 무함맏은 인근지역의 통치자들에게 접근하고자 노력했고 이들에게 이슬람을 받아 들여 하나님의 자비를 함께 나누고자 권유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통치자들이 무함맏의 정중한 권유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무함맏을 조롱하고 무슬림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무함맏의 생전에 로마와 페르시아의 군대가 무슬림의 국경을 넘어 여러 번 침략해 왔다. 그래서 무함맏이 죽을 때까지 무슬림들은 부득이 이웃나라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사태가 계속 되었던 만큼, 후대에 일어난 일은 모두 이러한 최초의 사건의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당시에 스페인과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국이, 등장하는 이슬람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유럽에서의 무슬림들의 모험 역시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모든 기독교국이 하나의 강국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 교황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의심할 여지없는 권위에 의해 입증된다. 또한 이 사실은 중세와, 금세기의 1/4분기의 십자군 운동시 이슬람을 상대로 한 기독교 병력의 총동원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그러므로 로마가 이슬람에 대한 전쟁을 승인하였을 때, 무슬림들에게 어떤 전장에서든-팔레스타인이나 비옥한 초생달 지대에서든, 이탈리아나 헝가리에서든-맞받아 싸울 충분한 권리를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무슬림들은 가만히 앉아서 로마와 페르시아의 막강한 병력에 의해 사방에서 포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로 가게 한 것이다. 그들을 땅 위에서 소탕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함맏을 죽여 목을 잘라서 황실에 바치라는 명령이 로마에서 내려졌다. 이는 로마의 이교도들이 초기의 기독교 개척자들에게 저질렀던 만행이었다. 그러나 후세기의 일부 전쟁들은 무슬림들이 싸우기는 했지만 이슬람과 아무 관계도 없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들 전쟁은 이슬람을 포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지역적인, 어쩌면 개인적이라 할 이유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무슬림들이 가한 것이건, 당한 것이건 침략은 침략이다. 이슬람의 침략에 대한 태도는 알려진 대로며 변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후에 침략 전쟁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슬람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없거니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도 않을 것이다.

2. 전술한 비판자들 중 누구나 그 당시의 초기 성격과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당시에는 매스컴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인 접촉에 의하지 않고 홍보하거나 선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생명이나 재산이나 명예 혹은 개인이나 약소국의 협정을 존중하지도 않았다. 안전보장이나 평화의 자유도 없었다. 고상한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거나 인기 없는 신념을 입밖에 내는 자는 모두 협박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기독교 개척자들 그리고 초기의 무슬림들의 전기에서 드러난다. 통치자들과 총독들에게 특별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명을 띤 많은 사자들이 함흥차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바로 자기 주인들에 의해 냉혹하게 살해되거나 체포당하였다.

아라비아의 무슬림들은 이러한 모든 곤경을 헤쳐 나가야 했으며 이러한 모든 상황하에서 그들은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인류에게 메시지를 전해야 했고, 인류를 위해 기여해야 했으며 구원의 신조를 권해야 하였다. 꾸란은 지혜를 다하고 아름다운 선교를 펴 하나님의 길로 초대하고 가장 정중하게 의논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 누가 하나님의 평화적인 부르심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려 하였던가? 많은 불신자들이 예언자의 평화적인 설교에 물들지 않으려고 예언자의 말을 듣기를 기피하는 실정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무력으로 이슬람의 평화적인 부름에 저항하였다. 일찍이 아라비아에서 겪은 체험을 통하여 무슬림들은 평화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경계태세를 취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평화를 수호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경우에만 평화롭게 행동할 수 있고 평화의 소리는 압박에 저항하고 압제를 제거할 수 있을 때 더 잘 울려 퍼지리라는 것을 배웠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이슬람을 바깥 세상에 알려야 했다. 그러나 원거리 통신 체계나 신문 혹은 기타의 매스컴이 없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즉 직접적인 대인 접촉뿐이었던 바, 이것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소규모의 비무장집단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규모의 무장 보호 집단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분명 군대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건전한 의미의 군대는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여러 시기에 여러 방향으로 국경을 넘었다. 이 때 일어났던 일은 고려해 볼 만하다. 어떤 지역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의 외국세력에 오랫동안 억압과 복종을 당해 왔던 토착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이슬람을 권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슬람세금(자카)에 상당하는 공물(조공)을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세금을 요구한 이유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무슬림들은 이 납세자가 자신이 어떻게 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며 이슬람이 제시되었으나 자신이 자유의사와 선택으로 지불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싶었다. (2)무슬림들은 무슬림 자신과 마찬가지로 납세자를 보호하고 그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할 의무가 있었다. 납세자의 위험은 곧 무슬림 동포의 위험이었으며 무슬림을 지키기 위해서는 비무슬림을 지키고 그 안전을 보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3)새로운 사태는 모두의 기지와 협조 곧 무슬림에게는 자카를, 비무슬림에게는 공물을 요청하였다. 이 모든 것이 공익을 위해 사용되었다. (4)무슬림들은 납세자가 자신들과 자신들의 새로운 형제를 적대하거나 무슬림이 된 그의 동포를 괴롭히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이슬람을 배척하고 자기 국가를 지원하기 위해 다른 분파들과 공모하여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한 자들은 스스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들은 처음부터 적대 행각을 벌였고 새로운 무슬림들이 아니라, 새로운 무슬림 개종자들과 공동 납부자들에게 혼란을 획책하였다. 국가적으로 그런 태도는 반역이었고 인간적으로 야비하였으며, 사회적으로 경솔하였고 군사적으로는 도발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새로이 온 자들의 안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바로 이러한 반역자들이 살고 있었던 국가를 위하여 진압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자기들 책임-즉 이슬람을 쾌히 받아들이는 무슬림으로서의 책임 혹은 공물을 바치고 무슬림이 된 동포들과 함께 살면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성실한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 유일한 경우였다.

3. 이러한 비판자들은 전쟁과 평화에 관한 꾸란의 규정을 알아보겠다는 정직한 의도로써 꾸란을 연구해 봄이 현명할 것이다. "피정복민"의 지위와 무슬림과의 접촉 전후의 생활조건을 연구해 보면 더욱 좋다. 페르시아와 로마의 속령의 원주민들이 와서 외국이 억압적인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무슬림들에게 절박하게 호소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뭐라 말할 것인가? 무슬림 정복자들이 무슬림의 보호와 무슬림의 정의로운 통치를 갈망하는 종교적인 족장과 평민에게 즐거운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피정복"민 중 일부가 "쳐들어오는" 무슬림을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무슬림 편에 서서 압제자들과 싸웠다는 현상을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슬람하의 "점령"지역의 번영과 자유와 발전을 그 이전의 지배적인 상태와 비교하여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특별한 관점을 확인하거나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 다만 이 문제는 재고와 신중한 연구의 여지가 있다고 믿을 뿐이다. 발견 내용은 확실히 흥미 있고 의미심장한 것이다. 현대의 지배적인 세계상태에 비추어 그 문제를 전체적으로 고찰한다면 아마 서양인에게 이해가 더 잘될 것이다.

4. 해외에서의 무슬림의 전쟁이 아랍인들의 경제적인 요구에 의해 유발되었다는 생각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런 생각을 지지하는 자들은 겉보기에 자신들의 추측을 확신하고는 있지만 정말 사실을 진지하게 조사해 본 것은 아니다. 경제적 요구가 무슬림들이 아라비아의 국경을 넘게 한 이유였다는 게 그들의 정직한 생각일까? 어떤 근거에서 그들은 고대의 사업 중심지와 계곡과 오아시스가 있는 아라비아가 더 이상 무슬림들을 충분히 부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가? "침공한" 무슬림들이 어느 정도로 자급자족했으며 자신들 지배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이 분배했고, 메디나·다마스커스·바그다드·카이로에 있는 중앙 정부에 얼마나 많이 반환했는지 신중하게 조사해 보았던가? 이슬람이 오기 이전의 "점령"지역의 소득을 비교해 보고 과연 침략자들은 단순히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 투기꾼들인지 아닌지 밝혀 내었던가? 당시의 무슬림들이 준 것보다 뺏은 게 더 많다거나, 맡긴 것보다 찾아낸 게 더 많다거나 혹은 투자한 것보다 벌어들인 게 더 많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가? 아라비아의 중앙정부가 바로 "정복자" 속령의 발전에 필요한 공물이나 조세를 이들 정복 속령으로부터 언제고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라도 발견했는가? 또 그렇다면 얼마나 많이 받았으며 그것이 미지의 세계에서 모험할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아라비아가 "점령"지역보다 세출이나 발전 계획 면에서 더 특권이나 우선권이 부여되었다는 믿을 만한 정보라도 입수했는가? 끝으로 아라비아가 갑자기 인구폭발의 위협을 의식한 나머지 무슬림들이 부득이 모험적인 전쟁이나 경제적인 탐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가?

무슬림이 비무슬림과 접촉한 것을 경제적 요구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가 참신하고 공감의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그다지 사실성이 있어 보이지 않으며, 학문적인 진지성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시도에 붙일 수 있는 최소한의 단서는 그것이 결코 만족스럽거나 완벽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아직도 연구·조사·분석·비교의 여지가 상당히 많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비판자에게는 자신의 이론적 가정을 타당하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통용시킬 수 있는 도덕적 권리가 없다. 그런 만큼 이슬람은 다시 한번 모든 비판자들에게 더욱 진지하게 진리를 탐구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5. 무슬림의 전쟁을 약탈물과 전리품에 의하여 고찰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것보다 더 엉성하고 상투적인 견해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학문에 있어서는 지름길이요 지적·윤리적 문제에서 빠져 나오는 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결코 지리는 아닌 것이다. 무슬림 모험가들이 얼마나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거나 아라비아로 반송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전리품을 가지고 귀국했는지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전기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논점의 물음을 다시 되풀이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바로 이러한 "약탈자"들에게 짓밟힌 "약탈당한" 지역의 번영과 부흥과 융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무슬림들이 모진 박해와 그리고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당했다거나 도발과 위협이 그들에게 가해졌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사실을 더 자세히 조사해보고 보다 책임 있는 결론을 제시하라고 호소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무슬림들이 모든 전리품은 무슬림들이 몰수·강탈·박해 기타 적진에서 자행한 도발행위에 의해 잃은 것에 비해 비할 바가 못된다고 하는 점이다.

이들 여러 계층의 비판자가 이러한 조사의 관점을 받아들이든 않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곧 이슬람은 완전한 의미에서 평화의 종교이고 부당한 전쟁은 그 가르침 속에 결코 없으며 침략이 그 교의에 포함되거나 이슬람에 의해 용납되는 일은 결코 없고, 무력을 써서 누구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팽창은 강요나 억압 때문이 결코 아니며, 착복은 결코 하나님이 용서하시거나 이슬람이 용납하지 아니하고, 이슬람의 가르침을 왜곡시키거나 잘못 전하는 자는 누구나 이슬람보다 자기 자신과 동료들에게 더 많은 해를 입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종교요, 그분께로 가는 정로(正路)이기에 그것은 가장 어려운 조건 아래서도 살아 남았던 것이며, 영원의 행복에 이르는 안전한 다리로써 앞으로도 살아 남을 것이다. 이들 비판자들은 이러한 사실이 의심스럽다면 이슬람을 연구하고 꾸란을 읽어보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함이 현명할 것이다.

이슬람이 "정복"지역에 전파된 데 이어 경제적 번영과 문예부흥이 따랐다는 사실이 반드시 무슬림들이 경제적 이익과 전리품을 추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록 이슬람의 후기 역사에서, 추정대로 이러한 이득과 전리품이 동기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슬람이 평화를 전쟁보다 좋아했고, 무슬림들이 전리품에 맛을 들였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훌륭한 설명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기타 요인들과 더불어 현대 자본주의의 흥기를 유도했다고 지적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고전적 논의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명백한 것이다. 진지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프로테스탄트들(신교도들)이 경제적으로 번영하기 위해서 그들 윤리를 발전시켰다거나 현대 자본주의가 아직도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2. 마리아의 아들, 예수 (up)

인류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예수의 문제이다. 예수는 완전한 신이였는가 아니면 인간에 불가하였는가? 혹은 반신반인이었는가?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속이는 또한 사람들의 사기꾼에 불과했는가? 그는 여느 아이처럼 평범하게 부모에게서 태어났는가? 태어난 때가 겨울이었나 여름이었나? 이와 같은 많은 질문들이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다같이 제기되었으며 아직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쟁과 의논은 예수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어 오고 있다. 이들 문제의 몇 가지 하찮은 측면들에 대한 해석상의 사소한 차이 때문에 기독교들 사이에 많은 교파가 생겨났다. 이것은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 그러나 이슬람의 정확한 입장은 무엇인가? 이슬람이 이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논의에 앞서 세 가지 점을 분명히 한다. 첫째, 예수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에 관한 한 무슬림은 아주 태평하다. 무슬림의 마음은 차분하고 양심을 깨끗하며 신념은 건전하다. 둘째, 하나님, 종교, 예언자의 지위, 계시, 인간애에 대한 무슬림의 개념에 의해 무슬림은 예수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출한 사도의 한 분으로서 받아들인다. 여기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무슬림들이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슬람의 기본 신조이며 무슬림이라면 결코 예수를 비하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행이 무슬림에게는 예수나 하나님의 다른 예언자의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는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다. 셋째, 여기에 언급되는 것은 모두 꾸란이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이슬람의 신념은 비록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인기가 없지만, 결코 예수의 역할을 얕잡거나 그의 인격을 과소평하거나 혹은 그의 위대한 개성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다. 반대로 이슬람이蝡 이러한 신념은 예수를 매우 존경스럽게 묘사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앉혀 주신만큼 높은 위치에 그를 앉힌다. 사실, 무슬림이 많은 기독교인들보다 예수를 더 존경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태도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태도는 무슬림이 확신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확신할 진리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어제의 진리요, 오늘의 진리며 내일의 진리인 것이다.

예수가 태어나서 자라난 환경은 상당히 주목해 볼만하다. 예수가 보내어진 사람들은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취지와 단어의 양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경을 개필, 곡해하였다. (2) 예수를 비롯한 예언자들을 일부는 배척하고 일부는 죽였다. (3) 자기네 부에 대해 무책임하게 함부로 말하였다. 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원치 않는 것을 가진 사도를 보낼 때마다 너희가 교만으로 부풀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어떤 사도는 사기꾼이라 불렀고, 또 어떤 사도는 죽였도다!(꾸란, 2:87)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하나님은 가난하되, 우리는 부유하도다!'라고 말하는 자들의 조롱하는 소리를 들으셨느니라, 우리가 정녕 저들의 말과 부당하게 예언자들을 살해한 저들의 소행을 기록하여 이같이 말하리라 : 극렬히 타오르는 (지옥)불의 형벌 맛을 봐라!(꾸란, 3:181)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계약을 받아냈더니, 저들이 그 계약을 어겨 우리가 저들을 저주하여 그 마음을 완악게 하였느니라 : 저들은 (제)자리의 말을 바꾸고 저들에게 보낸 계시의 중요부를 잊었느니라(꾸란, 5:13-14)

이것이 예수가 보내어진 사람들이 보인 제 2의 천성이었다. 예수의 탄생 연대에 관하여 기독교인들은 그 정확한 해나 계절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아직도 베들레헴의 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예수탄생과 더불어 별이 나타난, 해와 계절은 정확히 모른다'…역사가들이 추산한 가장 빠른 해는 기원 전 11년이고 가장 늦은 해는 기원전 4년이다. …'또한'…탄생한 해는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으나 계절은 12월이 아니라 봄철이었을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미해군 기상대의 Mrs. Simone Daro Gossner, 1960년 12월 23일 자 The Edmonton Journal지 12면 인용)

아무튼 무슬림에 대해 더욱 중요한 문제는 예수가 어떻게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 종류의 창조가 있었는 바, 각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첫째, 아버지나 어머니의 육체적 개입이나 존재가 없이 창조된 사람으로서 아담이 있었다. 둘째, 어머니나 여자 조상의 육체적 존재 혹은 선재(先在)없이 창조된 사람으로서 이브가 있었다. 이브는 인류의 상징적 혹은 비유적 아버지로 생각할 수 있는 아담이 기대한 사람이었다. 셋째,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상적인 관계를 통하여 창조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호기심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네 번째 종류의 창조, 즉 인간 아버지의 육체적 개입이 없는 인간의 창조 가능성을 깊이 생각해 보았음직하다. 이러한 가능성이, 아마 네 번째 종류의 창조를 완성하고 가능한 모든 형태로 하나님의 능력을 예증하기 위해 예수의 창조시에 하나님에 의해 현실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경건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기적의 작용이었으며, 하나님의 의지와 행위였다. 그 특정시기에 이런 종류의 창조를 선택한 것은 흥미로움과 동시에 이해되는 바가 없지 않다. (당시에는)의술이 그럭저럭 곳에 따라 상당히 대중화되었던 모양이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길에서 크게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또한 완고하였다. 새로운 형태의 창조로 당신의 능력을 이런 사람들에게 입증하셨고, 당신의 능력은 무한하며 오직 그 분께 복종하고 그 분을 믿음으로서만 그들이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보이셨다. 그 실례가 예수 창조의 생생한 실연(實演)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또한 예수가 후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행하게 되는, 다소 의학적 성격을 띤 종류의 기적을 예고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수탄생에 대한 이러한 가정적 해석은 꾸란이나 무함맏의 관습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이와 같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네 가지 유형의 창조와 예수의 탄생이 네 번째이자 최종적인 유형을 이룬다는 귀납적 결론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요 가정이다. 이러한 사건은 꾸란과 무함맏의 관습의 권위 혹은 진실성과 하등의 관계도 없다. 네 가진 종류의 창조에 대한 이러한 가정이 타당하든, 않든 그것은 꾸란의 진리와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의 기적의 뜻이요 일이라는 꾸란이 언명에 대한 무슬림의 믿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아무튼 전체적인 논점은 추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만약 누가, 인간 아버지의 선재(先在)함이 없이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삼으시거나 아버지 행세를 하셨다 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이라 부르고자 한다면 이것이 옳다 할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었던 아담에게는 같은 논리가 더욱 적절하게 들어맞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비유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모든 인류 특히 지고한 주님에 대한 봉사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뛰어난 창조물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분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아담을 빼버리고, 비유적 해석에서 나머지 인류를 제외시키는 것은 실로 독단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꾸란은 예수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오, 무함맏이여) 마리아가 가족의 곁을 물러나 동쪽에 있는 곳으로 가던 때의 이야기를 성서에 할지니라. 마리아가 (가족이 못 보게)장막을 치매 우리가 천사를 보냈더니 저가 마리아 앞에. 완연한 남자 모습으로 나타났느니라. 마리아가 말하되, '내가 당신에게서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께로 피하려 하니 하나님이 두렵다면 다가오지 마오' 하니 천사가 이같이 말했느니라. '그리 말라. 나는 네가 티없이 자랄 아들을 선물로 받게 됨을 알려 주려고 온 네 주의 사자일 뿐이니라.' 마리아가 말하되, '남자가 내게 손댄 일이 없고, 내가 부정한 여자가 아니거늘 어찌 내가 아들을 가지리요?' 하니 천사가 또 이렇게 말했느니라 : '그렇게 되리라' 네 주께서 말씀하시되, 그것은 내게 쉬운 일이요. 우리가 저를 사람들에 대한 징표로, 우리가 보낸 자비로 정하고자 하노라 하였느니라. 이는 그리 정해진 일이라! 그러자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알아듣고 천사와 함께 먼 곳으로 물러갔느니라. 해산 진통이 임하매 마리아가 야자나무 줄기를 잡고 괴로움에 못 이겨 이렇게 소리쳤느니라 : '아!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차라리 죽었더라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잊혀져 버렸더라면!' 그러자 한 음성이 야자나무 아래로부터 이렇게 외쳤느니라, '슬퍼하지 말라! 네 주께서 네 아래에 개울을 마련해 주셨느니라. 그리고 야자나무 줄기를 네 쪽으로 흔들라, 그러면 싱싱하게 익은 대추야자가 네 위에 떨어지리라. 그런 즉 먹고 마시며 (네)눈을 식히라. (평안할 지어다). 그리고 네가 사람을 만나거든 이렇게 말하라.' '내가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단식을 맹세했으니 오늘은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겠나이다.' 마침내 마리아가 아이를 팔에 안고 사람들에게로 데려오매 저들이 말하되, '오, 마리아! 정녕 네가 이런 끔찍한 것을 가져오다니! 오 아론의 자매여! 네 아버지가 악인이 아니었고 네 어머니가 부정한 여인이 아니었거늘!'이라 하였느니라. 마리아가 아이를 손으로 가리키매 저들이 또 말하되, '요람에 있는 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하란 말이냐?' 하니 아이가 이렇게 말했느니라. '나는 진실로 하나님의 종이니라. 그 분이 나에게 계시를 주셨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를 복되게 하셨고 내가 어머니에게 친절케 하셨으며 나로 오만해지거나 가련해지지 않게 하셨느니라. 그런 즉 내가 태어났던 날과 죽는 날과 생명으로 (다시)일으켜지게 되는 날에 나에게 평화가 있도다!' 이 사람이 바로 마리아의 아들 예수였느니라. 이는 진리의 말씀이거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헛되이)다투는 도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는다 함은 그 분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라. 그 분께 영광이 있을 지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결정하실 때, 다만 '되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느니라. 진실로 하나님은 나의 주요, 너희의 주이시니 너희는 그 분을 섬길지니라. 이것이 정로(正路)이니라. (꾸란, 19:16-36, 비교 3:42-64, 4:171-172, 5:17, 72-75, 25:2, 43:57-65)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맡기신 사명은 피의 희생에 의하여 모두를 속죄함으로서 구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도와 자기 수양에 의해, 침체한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고 굳은 영혼을 부드럽게 함에 의해 구원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참종교를 정립시키고 곡해·오용된 당신의 계시를 바로 잡으라는 것이었다. 이들 침체한 정신과 굳어진 영혼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징표를 가져오고 '기적'을 행함으로써 자기 사명을 뒷받침하였다. 이 완고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보여 주기 위해 '초자연적'이고 비범할 뿐 아니라 논리적이고 영적인 증거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제시되었다. 예수의 사명과 그의 증거의 기적적인 성격에 관하여 꾸란은 이와 같이 말한다 : 보라! 천사들의 말이니라. '오 마리아여! 하나님께서 네게, 당신이 보낸 말씀의 기쁜 소식을 주셨나니 그의 이름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이니라. 그는 현세와 내세에서 존귀함을 누리고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자들과 (함께 있으리라) 그는 아이로 있을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사람들에게 말하며 의로운 자들과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서와 지혜와 율법(토라)과 복음을 가르치시며 그를 이스라엘 자손들의 사도로 정하사 (이 같은 계시를 주시니라) ; '나는 너희 주의 징표를 가지고 너희에게 왔노라. 징표는 이것이니 곧 내가 진흙으로 새의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매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그것이 새가 되며, 날 때부터 눈 먼 자들과 문둥병자들을 고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죽은 자를 소생시키며, 너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집에 저장해 두었는지 너희에게 밝혀 말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믿는다면 진실로 그 가운데 너희에 대한 증거(징표)가 있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온 것은 나 이전에 있었던 율법(토라)을 입증하고 너희에게 (전에)금지되었던 것의 일부를 너희에게 허락하기 위함이라. 나는 너희 주의 징표를 가지고 너희에게 왔느니라. 그런 즉 하나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고 나에게 순종할지니라. 하나님은 나의 주요, 너희의 주이시니 그 분을 숭배하라. 이것이 정로(正路)이니라.(꾸란, 3:45-51)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오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내가 너와 네 어머니에게 내린 은총을 자세히 말해 보라. 보라! 내가 너를 성령으로 강하게 하매 네가 아이로 있을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사람들에게 말하였느니라. 보라! 내가 너에게 성서와 지혜와 율법과 복음을 가르쳤느니라. 보라! 네가 나의 허락에 의해 진흙으로 새의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매 그것이 내가 허락하여, 새가 되며, 네가 나의 허락으로 날 때부터 눈 먼 자들과 문둥병자들을 고치느니라, 보라! 네가 나의 허락으로 죽은 자를 되살리느니라. 보라! 네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분명한 징표를 보일 때 내가 저들이 너에게 폭력을 가하지 못하게 하였더니 저들 가운데 불신자들이 이렇게 말했느니라.' '이는 분명 마술에 불과하니라' 보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오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네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비하시켜 너와 너의 어머님을 신으로 숭배하라 말하였느냐?' 저가 이같이 말하리라. '당신에게 영광이 있을 지어다! 저는 저에게 (말할)권리가 없는 것은 결코 말할 수 없나이다. …저는 당신이 말하라고 명하신 것 곧 나의 주요 너희 주이신 하나님을 숭배하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저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저는 저들 가운데 거하는 동안 저들에게 증거하였나이다. 당신이 저를 보호하셨을 때 저들을 지켜보았사오니 당신이 모든 일의 증인이니이다.(꾸란 5:110-117) 여기의 성귀들은 꾸란 전체를 통하여 많이 산재되는 유사한 성귀들을 대표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들 성귀는 모두, 예수가 결코 신이나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지 않았으며, 그 역시 그보다 앞서 왔던 사람들의 본대로 하나님의 종이요 사도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꾸란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예언자들의 발자취를 좇아 우리가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보내어 저보다 앞서 왔던 율법을 확인하였노라. 우리가 저에게 복음을 주어 보내매, 그 가운데 인도와 빛과 저보다 앞서 왔던 율법의 확인이 있었나니, 이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인도하고 훈계하려는 것이라.(꾸란, 5:46)

'하나님은 마리아의 아들인 그리스도니라'고 말하는 자들은 신성 모독을 범하는 자들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오 이스라엘 자손들아! 나의 주요 너희 주이신 하나님을 숭배하라. 하나님에게 다른 신을 붙이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저에게 낙원을 금하실 것이요 (지옥)불이 저의 거처가 되리라. 행악자들에게는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삼위(三位)의 한 분이니라'고 말하는 자들은 신성 모독을 범하는 것이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신은 없음이라. 저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그치지 않는다면, 신성을 모독하는 저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리라. 저들을 어찌하여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 분의 용서를 구하지 아니하는가? 하나님은 지극히 관대하시고 지극히 자비로운 분이시오. 마리아의 아들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사도에 불과하였음이라. 저보다 앞서 간 사도들이 많이 있었느니라. 저의 어머니는 진실한 한 사람의 여인이었으며 이들은 둘 다 매일 음식을 먹어야 했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징표를 저들에게 분명히 하시는가를 보라! 또 저들이 어떻게 미혹되어 진리를 떠났는가를 보라! …이렇게 말하라. '오 성서의 백성들이여' 너희 종교의 (적당한)한계를 넘지 말며 진리를 범치 말라. 지나간 시대에 타락하여 많은 사람을 그릇 인도하고 스스로 평탄한 길에서 벗어난 자들의 헛된 욕심을 좇지 말라.(꾸란, 5:72-75, 비교 4:171-172)

예수의 시작을 놓고 이론이 분분하였다. 그의 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시작에서 최후까지의 사이에 불굴의 의지로 자기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하나님의 성서와 지혜와 분명한 징표와 성령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극히 적었다. 예수는 관대하고 온화하였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의 위선과 이들이 율법의 정신은 저버리고 문자에만 집착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수를 배척, 반대하였고 그를 잔혹하게 죽이려는 음모를 실제 꾸몄다. 예언자들 중 일부는 배척하고 일부는 죽이는 것이 그들 사이의 관례였다. 예수도 여기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을 뻔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믿었다. 얘기가 극적인 전개를 보여 그 절정에 달한 것은 바로 이 단계에서였으며, 곡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신성하였던 것처럼 종교적인 애도가 기독교인들에게 신성하게 되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려는 음모가 꾸며졌고 실제 십자가형이 집행되었다. 누군가 형을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예수는 아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 대신에 다른 누구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적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하나님은 잔혹한 죽음으로부터 예수를 구해내시어 하늘 높이 올리심으로써 지상에서의 그의 사명의 최후를 장식하였다. 예수가 뛰어나서 지위가 높여진 것인지 혹은 영혼과 육체가 살아서 올려졌는지 아니면 자연사한 후에 영혼만 살아서 올려 졌는지의 여부는 이슬람의 신념과 별로 관계가 없다. 그것은 신조가 아니다. 왜냐하면 무슬림에게 있어 중요하고 구속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바,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하고 당시께로 올리워 졌다고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꾸란은 예수의 최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성서의 백성들이 하늘에서 자기들에게 책이 내려오게 해보라고 네(무함맏)게 요구하니 진실로 저들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라' 고 하여 더 큰 기적으로 모세에게 요구하였느니라. 저들은 주제넘었는지라., 천둥과 번개로 혼났느니라. 그러나 분명한 징표(증거)가 온 후에도 저들은 송아지를 숭배 하였나니, 그래도 우리는 저들을 용서하고 모세에게 명백하고 권위 있는 증거를 주었느니라. 그리고 (시나이)산 꼭대기를 저들 위로 우뚝 높혀 저들과 계약을 맺었으며 또 (다른 때에는)겸손하게 성문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였으며 (다시 한 번)저들에게 명하되, '안식일을 범치 말라'하였느니라. 우리가 저들과 엄숙한 계약을 맺었으나 (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느니라) 이는 저들이 계약을 어겼고 하나님의 징표를 외면했으며 사도들을 부당하게 살해하였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보자기가 더 이상 필요 없다.'-반대로 하나님께서 저들이 신성 모독을 범하는지라 그 마음을 봉하시매 거의 이해하지 못하니라-고 말하였으며 신앙을 배척하였고 마리아에게 심한 누명을 씌웠으며 조롱하며 자랑하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사도인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노라'하였음이라. 그러나 저들은 예수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아니 하였나니 다만 저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이니라. 이와 생각이 다른 자들은, 추측만 할 뿐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잔뜩 의심하나니, 이는 저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음이 분명한 연고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저를 당신께로 올리셨으니 하나님은 능력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분이시라.(꾸란, 4:153-158, 비교 3:52-59) 이슬람은 하나님의 적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교리와 그런 교리를 배척한다. 이러한 배척은 꾸란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위 그리고 피의 희생과 대속에 대한 보다 심한 배척에 근거한다. 이슬람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아담의 원죄는 그가 속죄한 후에 용서받았고, 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스스로 자기 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며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속죄할 수 없다. 이것은 피의 희생과 대속의 교리를 용납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교파 중 일부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바칠리드파는 예수는 결코 육체를 갖지 아니하였고 다만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그렇게 보였을 뿐 실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마르치온파 복음서(기원 138년 경)는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그는 단지 인간 형체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성 바나바 복음서-비엔나 주립 도서관에 영역판이 있고, 아랍세계에 아랍어 번역판이 있다-는 십자가 위에서의 대체설을 지지한다.

무슬림은 예수의 최후에 관해서는 예수의 시작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전연 거리낄 것이 없다. 무슬림은 예수가 살해되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명예와 은총 속에 그를 당신께로 올리셨다고 믿는다. 이 문제 전반에 관한 한 무슬림의 마음은 깨끗하다. 꾸란이 예수에 대한 논쟁을 단번에 매듭지었던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믿음은 많은 불가피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 중 일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독교 교회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십자가형이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와 능력과 지혜에 부합하는가?

2. 죄를 진 당사자가 아닌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의 죄와 악행을 회개케 한다는 것이 하나님-혹은 누구라도 좋다-께서 그 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인가?

3. 예수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굴욕적으로 살해당했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지혜에 조화되는가?

4. 예수가 하나님의 적들에게 쉽게 희생당하도록 방치해 두는 것이 자신의 동맹자들을 수호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보호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인가? 이것을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방법으로 볼 수 있는가? 또한 솔선하여 자신의 말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5. 지극히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원죄 때문에 아담과 그의 자손들을 용서하실 수 없었으며 예수가 자신의 피로 속죄하러 오실 때까지 이들을 불안과 당혹 속에 방치하셨다고 믿는 것이 공정·타당한가?

6. 초기의 그리스·로마·인도·페르시아 등의 이교 교의는 별문제로 하고 십자가형과 피의 희생에 대한 믿음이 (또)어느 종교에 나타나는가?

7. 바커스, 아폴로, 아도니스, 호루스, 기타 처녀가 수태하여 낳은 신들과 같은 허구적인 인물 외에 인류 역사상 필적할 만한 자가 (또)있는가?

8. 예수가 한 것으로 되어 있는 말과, 자신이 세상의 알파요 오메가며 자기의 피로 인류를 구속(救贖)하기 위하여 왔다고 한 바커스의 말을 비교해 보면 새로운 안목이 생기지 않는가? 이러한 말과 그 후에 예수가 했다고 하는 말의 유사성이 문제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파헤쳐 보겠다는 새로운 열의를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9. 예수는 로마 당국에 무엇을 거슬렸는가? 그는 설교자로서 로마 당국이 그 지역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저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이처럼 법을 준수하는 선량한 시민 지지자를 잃어버릴 이유가 무엇인가?

10. 로마 총독 빌라도의 성품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그는 자기에게 불복하여 로마에 항소한 당시의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았는가? 유대에서의 그 통치로 보아 그는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경멸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는 뇌물에 약하지 않았나? 그가 아리마다의 요셉 같이 예수에게 감복한 부자의 뇌물을 받지 않을 이유라도 있는가? 누가의 말에 의하면, 이 요셉이라는 사람은 부자로서 예수에게 대단한 관심이 많았으며 법률 고문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는 평결에 찬성하지 않았다. 회의실에서의 구출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부패한 총독에게 뇌물을 주어서라도 예수를 십자가형으로부터 구해내려고 할 수 없었을까?

11. 실제 몇 명의 사도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제자들이 모두 그 분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마태의 말(마태 복음 26:56)이 사실일 수가 있는가? 이것이 위대한 교사의 이처럼 위대한 제자들이 가지는 성실성과 인격의 기준이란 말인가? 오직 사랑하는 요한만이 현장에 있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얼마동안이나 현장에 있었나? 믿을 만한 사료(The chamber's Encyclopaedia, 1950. 십자가에 관한 논문 참조)에 의하면 사형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데는 보통 며칠씩 걸렸다. 그런데 보통 며칠씩 걸리는 일이 어째서 예수의 경우에는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는가? 같이 십자가형을 당하던 다른 두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는 "죽었는가?" 형 집행의 세 시간 동안 온 땅을 뒤덮은 어두움은 어찌된 일인가?(마태, 27:45, 마가, 15:33, 누가, 23:44) 어둡고 혼란한 그 시간에 십자가 위, 자주색 옷 속에서 바꿔치기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까?

12.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고 온 당시의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얼마나 잘 알고 있었나? 그들은 자기네가 현장에 데려간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는 것을 어느 정도로 확신하였나? 체포하러간 그들이 정말 예수를 알아보았을까? 축제가 벌어져 민중 폭동이 터지지 않을까 두려운 그 때에 그들이 예수를 확인하는데 신경을 쓸 경황이 있었을까?

13. 믿는다는 사람이 (다섯 분의 가장 단호하고 굽힐 줄 모르는 하나님의 사도들 중의 한 분이셨던)예수가 사람들의 말처럼, 비난하는 투로 혹은 고작 한다는 게 근심하는 투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말하셨다고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예수처럼 특출한 예언자가 고통스러운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다고 그 분에게 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그것을 하나님께 말하거나 고통에 반응하는 자의 모범 혹은 선례로 간주할 수 있는가?

14.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관대하시며 가장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무죄할 뿐 아니라 당신에 대한 봉사와 당신의 대의 명분에 매우 비상하게 헌신한 분에게 이처럼 잔인하고 극히 치욕적인 십자가형을 가하지 않고서는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었을까?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적용인가? 그 분의 정의와 사랑의 반영인가?

당시의 주변 상황, 세속 당국의 행동, 민중의 반응, 하나님의 개념, 인간의 지위, 종교와 생명의 목적-이러한 것들을 연구해 보면 저자가 언급한 것과 유사한 흥미 있는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이 만족스럽게 설명되어야 비로소 믿는 사람은 태평해지고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보다 깊이 조사해 보라고 권하는 바이다.

그러나 무슬림에게는 이런 의문들이 결코 생기지 않으며 이 때문에 당혹해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살해된 것이 아니라 영예롭게도 하나님께로 올리어졌다는 주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헌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이후 몇몇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께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이슬람의 신념과 어긋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는 자기를 구하고 적의 악랄한 음모에 반격을 가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으로 그 분의 명에 따라 은신하였던 것이다. 그 분은 적의 계획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욕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책대로 지위가 더욱 높여지고 더욱 영예롭게 되었다.

예수의 위대성과 그 분의 역할을 탁월성은 무슬림에 의하면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하여 냉혹하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기독교의 신념으로부터는 나오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대중적 믿음이 타당한 것이라면, 죄가 제거되지 않았음으로 예수의 속죄 희생은 무효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훌륭하니 어쩌니 하는 자기네 대의 명분을 세우려다 죽어간 예수처럼 위대한 영웅들은 수없이 많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웅들은 독일군들, 연합국, 공산주의자들, 국제연합기구의 관리들, 종교적 전사들, 자유의 투사들…가운데서 즉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잔혹한 죽음이 사자를 신격화할 수 있다면 인류에게는 무수한 신들이 있어야 한다. 누구든 이러한 신성을 예수에만 국한시키고 비슷한 상황에서 죽은 다른 영웅들을 제외한다면 독단적인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무슬림은 이런 역설에 직면하지 않는다. 무슬림은 예수의 위대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광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계시가 맡겨졌고 그 분의 메시지를 가르치라는 사명을 받았으며 개성과 인격을 갖춘 예언자였고 속과 겉이 다 진실하였으며 위선과 신성 모독에 맞서 싸웠고 태어날 때의 시작과 승천할 때의 최후가 특별하였으며, 백성에 대한 징표(증거)였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비였다는 사실에서 생긴다고 믿는다. 그 분과 그 분의 동료 예언자들에게 평화가 깃들 지어다.

본 조사의 성격상 그의 사명에 대한 꾸란의 진술을 철저하게 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여기에 제시한 내용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다. 더 연구 조사하고 싶은 독자는 꾸란 자체를 조사하기 바란다. 참조의 편의를 위해 꾸란의 관련 장절이 실린 표를 다음에 제시한다.

장 절

2 87, 136, 253

3 42-59, 84

4 156-159, 171-172

5 17, 46, 72, 75, 78, 110-118

6 85

9 30-31

19 1-40

23 50

33 7

42 13

43 57-65

57 27

61 6, 14

3.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 : Polygamy : 복수(複數)의 처(妻) (up)

엄밀히 말해서 (복혼(複婚 : polygamy)은 복수의 배우자를 의미한다. 더욱 특별한 경우로써 한 남자가 두 명 이상의 처(아내)를 둘 때 이것을 일부다처(一夫多妻 : polygyny)라 한다. 그러나 평균적인 일반 독자의 경우, 이 두 용어는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 두 용어를 구별 없이 사용하기로 한다. 본서의 문맥에서의 복혼(polygamy)은 실제로는 이 말에 적합한 의미인 일부다처(polygyny)를 뜻한다. 반면에 한 여자가 두 명 이상의 배우자를 두는 경우 이것을 일처다부(一妻多夫 : polyandry)라 한다. 남녀 혼성인 경우에는 집단혼이 된다.

각 사회는 제각기 처한 시대와 놓인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이러한 세 가지 기본적 유형의 복혼을 행해왔다. 가장 흔한 경우는 일부다처다. 그러나 일부다처는 몇 가지 이유로 해서 불가피하게 극히 소수의 특정 인구에 한정되어 왔다. 이것이 이슬람이 허용하는 유일한 유형이다. 다른 두 가지 유형, 즉 복수의 남편(一妻多夫 : polyandry)과 집단혼은 이슬람에서는 엄금이다.

그러나 유대교나 기독교가 항상 일부일처제였다거나 일처다부제를 철저하게 반대해 왔다는 것은 심지어 오늘날까지 정확한 말이 아니다. 고이테인(p·p·184-185) 등의 몇몇 저명한 유대인 학자들을 통해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일부다처의 유대인 이주민들 때문에 이스라엘 주택 당국이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기독교 몰몬교의 입장은 잘 알려져 있다. 간통, 주음, 배우자 바꿔치기보다는 차라리 일부다처가 낫다고 하는 아시아·아프리카 주교들의 견해 역시 몰몬교도와 같은 입장이다. 미국에서만 해도 배우자 바꿔치기가 수십 만 건에 달하는 것으로 추상된다.

엄격한 형식적 일부일처제와 매음·동성애·사생아·간음·일반화된 성문란의 빈도 사이의 높은 상관 관계를 조사해 보면 적나라하게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표준적인 사회학적 가족사라면 다 지적하는 바일 것이다.

이슬람의 경우로 돌아가서 보면 무슬림은 육욕에 사로잡혀서 제한된 또는 무제한의 많은 아내와 첩을 거느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서양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 중 아내가 한 명인 무슬림이나 결혼하지 않은 무슬림을 보면 놀라움을 표시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다. 이들은 무슬림들이 한껏 자유롭게 한 아내 혹은 다수의 아내로부터 다른 아내로 전전할 수 있으며 이것은 아파트를 옮기는 것만큼이나 심지어 옷을 갈아입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태도는 일부는 선정적인 영화와 염가판 소설에 의해 일부는 몇몇 무슬림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의해 악화일로를 걷는다. 이런 상황의 필연적 결과로 허다한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장벽에 가리워 이슬람의 찬란한 빛과 그 사회 철학을 보지 못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무슬림의 관점에서 그 문제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그 후에는 누구든 자기 나름의 결론을 내려도 좋다.

이러한 일부다처는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행해져 오고 있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 솔로몬 등과 같은 예언자, 왕과 총독, 고금의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 가운데서 갖가지 형태로 일부다처가 행해지고 있다. 그 중 일부는 합법적이지만 일부는 불법적·위선적이다. 또 숨기는 일부다처가 있는가 하면 공개적인 일부다처도 있다. 어디서 어떤 식으로 숱한 기혼자들이 정부(情婦)를 남몰래 부양하거나 애인을 따로 숨겨 놓고 만나든지 혹은 기타 법에 의해 보호되는 여자들과 그저 놀아나는 지를 알아내는데는 구태여 많은 조사가 필요 없다. 도덕론자들이 좋아하든 않든 일부다처가 행해지고 있으며 어디서나 그리고 역사상 모든 시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성서가 계시되던 시대에는 일부다처가 공인된 관습이었다.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인정되었고 이에 대해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 아마 이것이 이 문제가 성서 자체에 거론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당시에는 일부다처가 기정사실이요 당연지사였기 때문이다. 성서는 일부다처를 금하지도 규제하지도 않으며 제한하는 일조차도 없다. 성서에 나오는 열 처녀 이야기를 한 번에 열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관한 성서 예언자·왕·족장들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슬람이 무함맏에 의해 다시 제시되는 당시에는 일부다처의 관습이 사회생활 속에 널리 그리고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꾸란은 이러한 관습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았으며 아무런 제한도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꾸란은 그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일부다처가 조장하는 혼란과 무책임을 용납할 수 없었다. 널리 행해지는 여타의 관습이나 관행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전래의 악폐를 일소하고 그 이점을 지켜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일부다처 제도를 체계화하고 정비하기 위해 꾸란이 개입하였다. 꾸란이 개입한 것은 그것이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바로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족 구조상에 어떠한 혼란이 야기되는 것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비롭게 개입한 꾸란은 다음과 같은 제규정을 도입하였다.

1. 일부다처는 일정한 조건과 상황 아래서 허용할 수 있다. 그것은 조건부 허용일 뿐이지 하나의 신조가 아니요, 필연의 문제도 아니다.

2. 이러한 허용은 최대한 네 명의 아내까지 유효하다. 이슬람 이전에는 아무런 제한이나 보장도 없었다.

3.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아내라 하더라도 일단 아내가 되었으면 첫 번째 아내와 동등한 권리와 특권을 누린다. 나머지 아내들도 어떤 경우에나 첫 번째 아내가 당연히 가지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다. 대우와 부양과 친절에 있어서의 아내들 사이의 평등은 두 명 이상의 아내를 둔 사람은 누구나 만족시켜야 할 필요조건이다. 이러한 평등은 관련 개인의 내면의 양심에 주로 의존한다.

4. 이러한 허용은 정상 수단에 대한 예외다. 그것은 일부 사회적·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불가피한 곤란에 대처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요 최후의 시도다. 요컨대 그것은 긴급조치의 일종이며 그러한 의미에 국한되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꾸란의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 만일(너희가 결혼하거나 혹은 그 어미를 너희 아내로 취하는) 고아들을 공평하게 대우하지 못할까 두려우면, 너희가 좋아하는 여자 두 명이나 세 명 혹은 네 명과 결혼할지니라. 그러나 저들을 공평하게 대우하지 못할까 두려우면 오직 한 명의 여자 혹은(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한 명의 포로)하고만 결혼할지니라. 너희가 불공평해지지 않으려면 그리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꾸란, 4:3)

이 귀절은 많은 무슬림들이 전사하여 과부와 고아들이 생기게 한 우후드 전투 이후에 계시되었다. 생존한 무슬림들이 이러한 고아와 과부들을 마땅히 돌봐야 하였다. 결혼이 과부와 고아들을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꾸란은 이와 같이 경고하는 한편, 고아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 보호자가 자기 부양 가족을 불공평하게 대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선택권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만큼, 이슬람이 일부다처를 창시하였다거나 전기(前記)의 규정을 도입함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규칙으로 장려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슬람이 일부다처를 폐지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을 폐지한다 하더라도 단지 이론상으로만 폐지되었을 것이요 사람들을 오늘날 일부다처를 허용하지 않는 헌법과 사회규범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러한 관습을 계속해 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온 것은 생활 속에 실천되기 위해서지 어중간한 상태에 있거나 단순한 이론으로 간주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슬람은 현실적이며 그 인생관은 매우 실질적이다. 그것이 이슬람이 조건부의 제한된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이런 제도를 두지 않는 게 인류전체를 가장 이롭게 하는 길이었다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것을 폐지하라고 명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보다 더 잘 알 수는 없다.

이슬람이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이유들을 상상해 보거나 가정을 세워 보거나 할 필요는 없다. 이런 이유들은 실재하며 매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이유 몇 가지를 검토해 보자.

1. 사회에 따라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많은 경우가 있다. 특히 산업지역이나 상업지역 그리고 전쟁에 말려든 나라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무슬림 사회가 이런 범주에 들고, 이슬람이 일부다처를 금하며 법률혼을 한 아내에게만 제한시킨다면 기혼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어디서 어떻게 선천적으로 바람직한 교제의 상대를 찾을 것인가? 어디서 어떻게 동정과 이해와 원조와 보호를 구할 것인가?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만 내포되어 쓴 것은 아니다. 도덕적·감정적·사회적·정서적·천성적인 문제가 또한 내포되어 있다. 정상적인 여자라면 누구나-사업을 하든, 해외근무를 하든, 정보부에서 일하든-가정을, 자신의 가족을 원한다. 여자는 자기가 돌보아 줄 사람과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여자는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귀속되고 싶어한다. 비록 순전히 육체적인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문제는 매우 심각하며 그대로 무시해 버릴 수만은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방치한 당연한 결과로서 심리적 콤플렉스, 신경쇠약, 사회의 혐오, 정신불안의 증세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타고난 욕구와 감정적 열망은 실현되어야 한다. 이들 욕구와 열망은 귀속하고, 돌보아 주고 돌보아질 것을 필요로 하며, 또한 어떻게 해서든지 만족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지의 여자는 보통 자기의 천성을 변화시키거나 천사 같은 생활을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여자들은 자기들도 인생을 즐기고 자기 몫을 차지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합법적이고 떳떳한 방법으로 권리를 차지할 수 없을 경우에는 위험하고 일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경로를 찾고야 만다. 남자와 귀속적이고 보장 있는 교제를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여자는 극히 적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미혼녀의 압도적인 다수가 남자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들은 사치스런 파티를 벌이고 칵테일 모임을 만들며 상담에 나서고 노골적인 행각을 추구한다. 이러한 필사적인 헌팅(hunting)의 결과가 반드시 도덕적으로 떳떳한 것만은 아니다. 기혼 남자가 여자의 마음에 들 경우, 여자는 그 남자를 법적으로 혹은 법을 어겨서라도 자기 곁에 잡아 두려고 할 것이다. 또한 뭔가 까닭이 있어 풀이 죽어 있는 남자가 여자에게 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남자는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히, 떳떳하게 혹은 부도덕하게, 법의 형식을 갖추거나 혹은 합법적으로 그녀와 관계를 가지려 할 것이다. 이는 틀림없이 해당 기혼 남자의 가족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사회의 풍기와 도덕을 안으로부터 파괴할 것이다. 아내는 방치되고 자식들은 버려지며 가정은 파탄이 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친구와 만나는 여자는 아무런 보증도 받지 못하며 품위와 권리도 지키지 못한다. 그 남자친구 혹은 연애쟁이와 동거하면서 여자를 부양하고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선물을 들고 그녀의 거처를 자주 들락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 무슨 보장이 있는가? 어떻게 해야, 그 애인이 몹시 필요하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에 그가 자기를 버리거나 실망시키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그가 이 은밀한 사랑을 내던지지 못하게 할 것인가? 도덕? 양심? 법? 아무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도덕은 그들이 이런 관계를 시작했을 때부터 치명타를 맞았고, 양심은 하나님과 인간의 모든 규정을 어기고 그가 관계에 빠졌을 때 마비되어 버렸다. 게다가 사회의 법은 하나뿐인 자기 아내 이외의 여자와 관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자는 자기가 원하는 한 이러한 느긋한 교제를 즐길 수 있다. 그러다가 일단 열이 식으면 또 다른 여자를 찾아서 책임이나 의무에 구애됨이 없이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한 여자가 여전히 매력적이고 호소력이 있을지도 모르며 아직도 뭔가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녀는 또 다른 남자를 찾아 두 번째 시도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그녀에게 무슨 보장이 있겠는가? 품위와 권리가 지켜지겠는가? 헌팅하거나 헌팅되기를 바라면서 줄곧 같은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특히 아이라도 딸리게 되는 경우에는 부담은 점점 더 커진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소외당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이나 여성의 섬세함에 어울리는 일인가? 이런 처지의 여자라면 누구든 어쩔 수 없이 신경 쇠약자나 반항적인 보복자 그리고 도덕의 파괴자가 되고 만다.

한편, 누구도 모든 기혼 남자들이 행복하고 원만하며 자기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자기의 잘못이든 아내의 잘못이든, 불행한 남편은 다른 상대를 찾아 위안을 얻으려 할 것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많은 경우, 이렇게 하기는 쉬운 일이다. 정직한 경로를 통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다른 수단을 써서라도 뜻을 이룰 것이다. 그 결과 부도덕하고 음란한 관계에 빠져 사생아, 낙태, 기타 그치지 않는 두통거리로 인해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추악하고 쓰라린 사실이겠으나,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첨예한 문제들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남녀 개인의 안전을 지키고 사회를 보호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이슬람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불행하고 불만족한 남편이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여 공개적으로 책임을 지고 첫 번째 아내와 두 번째 아내에 대한 모든 의무를 똑같이 이행하면서 함께 살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결혼 못한 여자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키고 소망을 실현하며 정당한 열망과 타고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한다.

이런 여자들도 결혼하여 남자와 사귀고 법적인 아내로서의 모든 권리와 특권을 누리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슬람은 구태여 문제를 회피하거나 무시하려 들지 않는다. 이슬람은 현실주의적이고 솔직하며 직선적이고 실제적이다. 이슬람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합법적이고 떳떳하여 자비로운 것이다. 이슬람이 이러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이유는 인간 관계에서의 위선을 그것이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법적으로 한 여자와 결혼했으면서 실제로는 무제한의 정교(情交)와 은밀한 관계를 나누는 남자의 태도를 합법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간통에 무섭게 반대하는 이슬람은 그것을 묵과할 수 없다. 간통한 남녀에 대해서는 사형만큼 엄한 벌을 가할 수 있으며 간음한 자들에 대해서는 각각 채찍으로 100번씩 때리는 만큼의 고통스러운 형벌을 가할 수 있다. 위선과 간음과 간통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합법적인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이슬람의 전기의 규정과 조건을 다룬 이유다.

일부다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대안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슬람은 이런 대안을 인정하지도, 특별히 지지하지도 않는다. 자기 수양을 쌓아 모든 면에서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부다처가 필요 없다. 이슬람의 주요 관심은 개인의 존엄(품위)과 안전을 유지하고 사회의 고결성과 풍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회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나으냐고 자문해 볼 수 있다. 혼란과 무책임한 행위가 사회의 기초를 파괴하도록 내버려두는 쪽이 권할 만 한가 아니면 이슬람의 해결책에 의지하여 그것을 시행하는 쪽이 권할 만 한가? 날카로운 문제들을 무시하고 위선과 외설을 용납하며 간통과 밀통을 묵과하는 것이 사회를 위하는 길인가? 사실상 실효를 거둘 수가 없고 불법적이고 음란한 배출구로 몰아 부칠 뿐인데도 남녀가 교제하고자 하는 정당한 욕구와 타고난 열망을 억누르는 것이 건전한 일인가? 사회적·윤리적·인도적·영적 관점에서 문제를 고려하든 기타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고려하든, 개인이 합법적으로 책임을 지면서 법의 보호와 관계 당국의 감독 하에 교제를 할 수 있도록 사회가 허락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문제를 여성의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바로 이러한 해결책을 통해서 이슬람이 여자에게 합당한 존중을 보장하고 여자의 권리와 고결성을 안전하게 지키며 떳떳하게 교제하고자 하는 그녀의 정당한 욕구를 인정하고 그녀가 사회에 귀속할 수 있는 여지를 주며 사랑하는 그이를 보살피고 그이에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그녀에게 제공한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이미 한 남편을 가지고 있고, 다른 여자가 남편에게 접근하여 교제와 보호를 구하는 것을 보거나 그 여자와 자기 남편의 부양과 친절을 함께 나누는 것이 심히 못마땅한 여자에게는 이것이 불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편이나 믿을만한 반려가 없는 다른 여자의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들에게는 안정과 만족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생각해야만 할까? 우리가 그들을 무시한다고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에게 만족이 주어질까? 바로 이 아내가 반려 없는 여자의 비슷한 처지에 있게 된다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귀속되고, 존중받고,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을까? 가득 채워 받을 수 없다면, 말하자면 반 잔 혹은 반 남편이라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어느 정도 보호와 안전을 누리는 것이 모두 빼앗기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만약 사랑하는 남편이 칵테일 모임이나 댄스파티에 갔다가 이러한 "잉여"여자들 중 하나에게 빠져 버린다면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은 어찌 되겠는가? 남편이 자기 가족을 버리거나 새롭게 빠져든 여자를 위해 시간을 들여 준비하느라 자기 책임을 등한시한다면 그녀는 어찌될 것인가? 자기 일생에 하나 뿐인 남자가 다른 여자들과 일을 벌이고, 다른 사람을 남몰래 부양하거나 따로 숨겨 둔 애인을 자주 찾아간다면 그녀의 기분이 어떠할까? 이러한 남자는 해로울 뿐 아니라 위협적인 존재이며 비열하고도 악랄한 인간이다. 말인즉 옳다! 그러나 이런 저주가 관련 당사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러한 상태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여자 즉 합법의 아내와 불법의 반려자다. 그러나 관련된 두 명의 여자가 남자의 보살핌과 부양을 똑같이 분유(分有)하고 남자와 똑같이 관계를 가지며 둘이 똑같이 법의 보호를 받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 남자는 이제 사실상 한 아내의 남편이 아니다. 그는 비열한 위선자다. 하지만, 당장 해가 끼쳐지고 영혼이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다. 충분한 이유가 있다면, 이슬람이 자비롭게 개입하여 이 기혼 남자의 재혼을 허락하는 것이 곧 관련 당사자 모두를 보호하는 것이요, 부정과 싸우고 해를 막으며 상처 입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다.

2. 결혼을 했지만 사정이 있어 아내가 자식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가정 생활을 영위하고 인류의 보존에 기여하려면, 근본적으로 자식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자식을 두는 것은 결혼의 주요 목적의 하나인 바, 남자는 선천적으로 자기 이름을 보존하고 가족의 유대를 강화시키기 위해 자식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남자에게는 보통 다음 세 가지 대안이 있다.

1) 자식을 갖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억눌러 잊어버린다. 2) 별거, 간통 등의 방법으로 자식이 없는 아내와 이혼한다. 3) 아이를 입양시켜 그 아이에게 자기 이름을 준다.

이러한 대안들은 모두 생명과 본성에 대한 이슬람의 일반적 견해와 부합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정당한 욕구와 타고난 열망을 억누르라고 권하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하는 것을 승인하지도 않는다. 이런 경우에 억누르는 것은 그 제도에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슬람은 떳떳하게 합법적으로 이러한 열망과 욕구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혼하는 것은 자식을 가지 못하는 게 아내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정당하지 못하다. 더욱이 이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가증한 것이요 다른 대안이 없는 경우에만 허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아내는 남편의 도움과 그와의 동거를 필요로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내가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내가 아쉽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 아내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아내를 나가게 하는 경우 잔인한 처사다.

모든 아이는 자기 친부의 이름을 붙여 불러야 하며 친부의 이름을 모를 경우에는 믿음의 형제라고 불러야 한다(꾸란, 33:4-5)는 것이 이슬람의 규정이기 때문에 입양하는 문제 역시 논의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물론 아버지나 보호자를 모르는 아이는 보살핌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결코 없다. 오늘날 하는 식대로 입양시키는 것은 아이에게 안전하고 보람있는 생활을 보장해 주는 방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친부와 친모를 제대로 완전하게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매일 일어나는 사건, 법원의 복잡한 소송 절차, 가족간의 분쟁은 입양이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을 입증한다. 법원이 하루에 재판하는 소송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친부모는 재판에서 낯선 가정에 입양되어 다른 환경에 처한 자기 자식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정상적인 부모가 자기 자식이 낯선 가정에 있는 것을 참고 볼 수 있을까? 양부모가 자기 자식을 올바로 양육하고 제대로 보살펴 주리라고 얼마만큼이나 믿을 수 있겠는가? 자식이 자라서 자기 친부모가 자기를 버려서 양부모 밑에서 자라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친부모가 누군지 모르거나 혹은 자기 어머니가 가난, 수치, 불안정이 두려워 자기를 버렸다는 것을 알면 그 자식이 어떻게 나올까? 입양한 가정의 다른 식구들이 그 아이를 좋아할까? 낯선 아이가 들어와서 자기네 이름을 갖고 자기들이 상속하게 될 재산을 상속하는 것을 그들이 좋아할까? 친부모가 자기 자식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거나 그 자식이 원래 부모와 같이 살고 싶어한다면 길러준 사람의 마음이 어떠할까?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제도가 건전하지 못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며, 그 자식과 친·양부모와 입양 가정의 다른 친척과 사회 전체에 큰 해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 입양은 많은 사람들이 무책임한 행동과 관계에 빠져들도록 조장하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다. 요즈음에는 입양이라는 게 상업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뉴스매체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자기 자식을 "팔려고" 내놓은 사람들도 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정글에 있는 일이 아니라 바로 여기 캐나다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 때문에 이슬람은 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무슬림들 사이에 그것이 행해지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는다.(꾸란, 33:4-6 참조)

이러한 세 가지 대안을 전술한 이유 때문에 배척하는 이슬람은 그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슬람은 이런 처지의 남자가 재혼하여 선천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고 동시에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자기를 필요로 할지 모르는 자식 없는 아내를 부양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번 경우에도, 이것은 절망적인 처지의 남자가 양자를 들이거나 이혼하거나 자신의 열망을 부자연스럽게 억누르는 대신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허락된 것이다. 그것은 재혼이 최선의 가능한 선택이 되는 또 하나의 예요, 어려운 처지에서 빠져 나와 모든 면에서 정상적이고 안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3. 아내가 결혼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되는 경우와 때가 있다. 아내가 의당 그래야 하는 만큼 혹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의 즐거운 반려자가 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남편이 받을 만하고 또 그가 원하고 있는 애정과 만족과 주의를 모두 그에게 줄 수 없는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생길 소지가 없지 않으며 실제 이런 일이 생기고 있다. 그것이 반드시 아내의 잘못은 아니다. 천성 자체가 그럴 수도 있고 지병이나 산욕기 혹은 어떤 정기적인 기간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모든 남자가 참거나 자제하거나 천사 같이 행동할 수는 없다. 불륜과 기만, 위선과 간통의 수렁에 빠져 버리는 남자들도 있다. 남편이 아내가 병상에 있거나 해산 후 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 집안 일을 봐 주러 온 처제나 파출부 혹은 가정부들과 열렬한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 아내가 어려운 분만 수술이나 외과 수술을 받는 동안, 남편은 다른 여자들과 새로운 연애를 벌이는 사태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환자의 동생이나 친구가 이러한 연극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마 좋은 의도만을 가지고 병든 자기 언니 혹은 자기가 아끼는 친구를 돕고 아이를 보살피거나 집안 일을 잠시 돌보러 왔다가 일이 크게 벌어져 문제가 복잡해졌을 것이다. 아내가 집이나 병원에 병들어 누워 있으면 남편은 외롭고 우울해진다. 집 주위의 다른 여자-아내의 동생이나 친구 혹은 그 밖의 다른 여자-가 그렇게 하는 것도 도와주는 길이라 생각하여 남편에게 어느 정도의 동정과 이해심을 보여 준다. 그러한 태도는 진지하고 정직한 것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것일 수도 있다. 처음에 단순히 동정심을 보이는 것을 기화로 하여 그것을 끝까지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결과는 상처뿐인 마음이요, 필시 파탄난 가정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가상적인 것이 아니요 드물게 생기는 일도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신문도 이러한 문제들을 종종 다룬다. 법원 기록 역시 이러한 사실을 증거 한다. 이 점에 있어서의 남자의 행위는 비열하고 부도덕하며 음란하고 악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인즉 옳다! 그러나 이런 비난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다고 사실이 달라지고 인간성이 바뀔까? 일은 벌어졌고 죄는 되풀이 저질러졌으며 날카로운 문제는 실천성 있는 떳떳한 해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입법자들은 이러한 남자와 그의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인가? 그들은 이 남자가 자신의 성실성과 사회의 도덕적 기초를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할 것인가? 정직과 성실이 물러가고 위선과 부도덕이 들어서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 공공연하게 금지하고 비난하면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고 자기 양심을 일깨울까? 저들은 도리어 입법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직면하는 위선과 은밀한 간통과 무책임이 활보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슬람마저 속수무책일 수는 없다. 이슬람은 도덕적인 기준을 놓고 타협하거나 위선과 간통을 용납할 수 없다. 이슬람은 만족을 가장해서 자신이나 사람을 속일 수 없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단순히 공공연한 비난이나 금지에만 의지할 수도 없다. 그것이 해를 극소화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자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하고 관계된 여자-아내나 밀통하는 친구-가 불필요하게 복잡한 문제에 휘말려 들지 않도록 보호하며, 해를 극소화시키기 위해 이슬람은 전술한 단서와 조건을 붙여 일부다처제에 의지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긴급조치로 적용될 수 있으며 이름뿐인 일부다처제와 남녀 사이의 무책임한 관계보다 훨씬 더 건전하다. 절망적인 상태에 처하거나 혼란에 빠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이러한 해결책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사자 일방에 대해 불공평하고 해로운 일이 생길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일부일처를 원칙으로 한다.

4. 본성 자체가 특히 남자에게 어떤 일이나 행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대게 사업차 여행을 많이 하고 자국 내에서나 해외로 길거나 짧은 여행을 하느라고 얼마동안 집을 떠나 있게 되는 것은 남자다. 책임을 지고, 이러한 상황 아래 있는 남자들 모두가 충실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는 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몇 달 혹은 몇 년이 될 수도 있는 부재 기간 중에 낯선 여자들과 불륜에 빠져 죄를 짓는다. 우유부단하여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유혹조차도 뿌리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그들은 죄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이 가정 파탄을 부를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이 제한된 일부다처제를 적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경우다. 이러한 남자의 경우, 멋대로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죄를 짓느니 차라리 두 번째 법적인 아내를 맞이하여 두 번째 가정을 갖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이편이 그 아내에게도 훨씬 더 낫다.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하되 법적인 규정과 윤리적 원칙에 구속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가 그가 다른 식으로 관계하고 있을 때보다 애를 덜 태울 것이다.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끼여드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여자의 본성이다. 그러나 남자가 법적으로 책임을 지고 윤리적으로 구속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교제를 계속할 것이냐 하는 선택을 내리게 되는 상황에 아내가 직면하게 될 때, 그 아내는 틀림없이 첫 번째 대안을 선택하여 그러한 상황에 순응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피해를 입거나 그 권리가 침해된다면 언제라도 법에 호소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게 자기에게 가장 이롭다면 이혼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대해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를 적용함으로써, 그 남자의 성실성과 두 번째 여자의 존엄성과 사회의 윤리가치가 더 많이 보호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들은 상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들은 일상 생활의 사실적 요소인 것이다. 그런 경우들이 드물지는 모르지만, 무슬림들 사이에 일부다처가 행해지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일부다처제에 호소하는 무슬림들이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사는 신앙심 없는 남편과 아내들보다 훨씬 드물다는 말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부다처가 위험스럽고 많은 전제 조건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무관심·위선·불안정·부도덕·외설의 경우보다는 훨씬 낫다. 일부다처제의 도움으로 남녀들이 현실적이고 책임성 있게 자신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부다처제는 심리적·천성적·감정적 성격을 띠는 인간 생활의 많은 복잡한 문제들을 극소로 줄인다. 그것은 관련 당사자 모두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예방조치다. 그러나 그것은 이슬람의 신조가 아니며 그렇다고 명령도 아니다. 일부다처제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허락이요,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지난한 일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에 지나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합법적인 조건부의 일부다처가 실속 없는 결혼 생활과 피상적인 일부일처를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취하고 있는 다른 방법들보다 도리어 낫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무슬림들의 입장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일부일처가 일부다처보다 바람직할 뿐 아니라 그것이 원칙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필요하다면 일부다처를 고려하여 적용한다는 것이다.

논의를 마무리하자면, 예언자 무함맏의 결혼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예언자의 이상적인 성격과 그가 혼인을 맺은 상황을 이해하는 무슬림에게는 이러한 결혼이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무슬림에게는 그것이 예언자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슬람이나 예언자에게 불명예스러운 무책임하고 성급한 결론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 자신의 결론을 내세우거나 다른 사람의 결론을 비나하지는 않겠다. 확실한 몇 가지 사실을 제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알게 할 것이다.

1. 이슬람에서는 결혼 제도는 매우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그것은 사회의 건전한 존속을 위해 필요 불가결하며 가급적 하도록 권유되는 것이다.

2. 무함맏은 결코 자신이 불사신(不死身)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하기 위해 그 분에 의해 선택된 죽어야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되풀이 강조하였다. 그의 생애는 독특하고 뛰어났지만, 그는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으로 죽었다. 그러므로 결혼은 그에게 있어 당연한 것이었지 이단적이거나 저주받는 행위가 아니었다.

3. 그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기후에서 살았다. 이런 기후에서는 사람이 육욕에 짓눌리고 몸은 조기에 성숙하며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쉽게 만족을 채워 버리기가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함맏은 25세의 나이로 처음 결혼할 때까지 여자에게 손을 대 본 적이 없다. 아라비아 전역에서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성격으로 유명하였으며, 도덕적인 생활의 최고 기준을 뜻하는 칭호인 알-아민으로 일컬어졌다.

4. 그 지역에서 볼 때는 이례적으로 늦게 이루어진 그의 첫 번째 결혼 상대는 카디자라는 부인이었다. 그녀는 무함맏보다 15년 연상인데다 두 번이나 과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청혼을 수락하였다. 당시에 그가 정열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였다면 얼마든지 더 예쁜 처녀들과 젊은 아내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이 부인만을 반려로 삼아 50세가 넘게까지 살았으며, 이브라힘을 제외하고는 그의 모든 자녀가 그녀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65세를 넘길 때까지 그와 함께 살았으나, 그는 그녀 생전에 다른 여자와 결혼하거나 하나뿐인 아내 이외의 여자와 관계를 갖지도 않았다.

6. 이제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그의 나이 50세, 그녀의 나이 65세를 넘기던 때의 일이었다. 박해와 위험이 쉬지 않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해졌다. 이런 고난의 와중에 아내와 사별하였다. 아내의 사후, 그는 한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그때에 박해초기에 남편을 따라 아비시니아로 이주하였던 싸우다라는 여자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죽자, 그녀는 보호를 구하게 되었다. 무함맏의 사명을 위해 남편이 죽었던 터라, 그녀는 당연히 직접 예언자에게 호소하였고 예언자는 보호를 베풀어 그녀와 결혼하였다. 특히 젊다거나 예쁘다거나 호감이 가는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성질이 급하고 산만한 평범한 과부였다. 그후 같은 해에 예언자는 자신이 아끼는 동료 아브 바크르의 딸이며 일곱 산 난 소녀였던 아이샤에게 청혼했다. 이 결혼은 메디나로 이주하고 얼마가 지나서야 비로소 성사되었다. 그러나 그는 56세가 될 때까지 다른 아내를 더 두지 않고 5-6년 동안 그 두 아내하고만 살았다.

7. 56세에서 60세의 사이에 예언자는 잇달아 9번의 결혼을 하였다. 생애의 마지막 3년 동안에는 전혀 결혼하지 않았다. 그의 결혼은 대부분이 약 5년의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 기간은 그가 사명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 무슬림들이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고 대내외적으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분쟁에 말려 든 게 바로 그 때였다. 또 바로 그 때에 이슬람법이 제정되어 있었고, 이슬람 사회의 기초가 놓여지고 있었다. 매우 흥미 있는 현상은 무함맏이 이들 사건의 가장 지배적인 인물이었고 사건 전개의 중심이었으며 그가 한 결혼의 대부분이 이 기간 중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사회학자·입법자·심리학자 등의 진지한 주의를 끌고 있다. 단순히 육체적 매력과 호색적인 견지에서 이러한 사실을 해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8. 무함맏은 아주 소박하고 엄격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한꺼번에 국가 원수, 재판장, 총사령관, 교사 등의 역할을 했던 그는 당내에서 가장 분주한 사람이었다. 또 밤에는 가장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매임 밤의 삼분의 이(2/3)를 기도와 명상을 하면서 뜬눈으로 보내곤 하였다.(꾸란, 73:20) 아라비아의 왕이요, 주권자였지만 그의 가구는 매트, 주전자, 담요와 같이 소박한 물건들뿐이었다. 어찌나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던지 한 번은 아내들이 세상 재미도 좀 보라고 졸라댔지만 결코 그런 예가 없었다.(비교, 꾸란, 33:48) 분명히 그것은 호색적이고 정욕에 불타는 사람의 생활은 아니었다.

9. 그가 취한 아내들은 어린 소녀였던 아이샤를 제외하고는 모두 과부거나 이혼녀들이었다. 그가 아내로 맞이한 이들 과부와 이혼녀 중 육체적 매력이나 아름다움으로 해서 특히 알려졌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들 중 몇 사람은 그보다 나이가 위였고, 그들 모두가 실제로 그의 보호의 손길을 구하였다. 선물로 그에게 바쳐졌지만 법적인 아내로 그가 맞이한 아내들이었다.

이것이 예언자가 결혼했던 전체적인 배경인 바, 이는 결코 이들 결혼이 육체적 요구나 생물학적 충동에 응한 것이었다는 인상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사사로운 의도나 육체적인 욕구 때문에 그렇게 많은 아내들을 부양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친구든, 적이든, 무함맏의 결혼 때문에 그의 도덕적 성실성이나 영적인 우월성을 의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여자와의 교제가 전혀 없이 25세의 나이에 최초의 결혼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그는 두 번이나 과부가 되었던 15년 연상의 부인을 선택하였는가? 그의 나이 50이 넘어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하고만 같이 산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는 특별히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러한 의지할 데 없는 과부와 이혼녀들을 받아들였는가?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로 그는 엄격하고 힘든 생활을 하였나? 그의 사명과 경력이 위태롭던 그의 생애에서 가장 분주했던 5년 동안의 기간에 결혼의 대부분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렘(Harem)생활과 정욕이 그를 사로잡았다면 어떻게 그와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었는가? 기타 많은 논점들을 제기할 수 있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과 욕망의 견지에서 해석할 수 있을 만큼 문제가 그리 단순치 않은 것이다. 이 문제는 진지하고 정직한 고찰을 요한다.

무함맏의 결혼을 개별적으로 검토해 보면 이들 결혼 배후의 실제 이유가 어김없이 드러난다. 이러한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1. 예언자는 인류에 대한 이상적인 본보기로서 세상에 왔으며, 생활의 모든 면에서 실제 그러하였다. 특히 결혼이 그 두 실례다. 그는 가장 다정한 남편이었고 가장 많은 사랑을 주는 가장 소중한 반려자였다. 그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과 도덕적인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한 명의 아내와 두 명 이상의 아내, 나이든 여자와 젊은 여자, 과부와 이혼녀, 호감이 가는 여자와 신경질적인 여자, 유명한 여자와 비천한 여자를 상대로 그는 살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친절과 위로의 본보기였다. 그는 인간 행위의 이러한 모든 다양한 측면을 경험해 보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육체적 쾌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시련이였으며 인간의 고된 과업이었다.

2. 예언자는 도덕을 확립하고, 모든 무슬림들에게 안전과 보호, 윤리적 성실성과 떳떳한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하여 왔다. 그의 사명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시험되었으며, 정태적인 이론의 형태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그가 가장 힘든 역할을 맡았고, 가장 불편한 속에서 자기 직분을 이행하였다. 전쟁과 박해는 무슬림들에게 많은 과부와 고아와 이혼녀들을 짐으로 안겨 주었다. 이들은 생존한 무슬림 남자들이 보호하고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여자들을 자기 동료들과 결혼시켜 다시 안정을 찾게 해 주자는 것이 예언자가 세운 관례였다. 동료들에게 거절당하는 여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예언자의 사적인 후원보호를 구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처한 여건과 이슬람을 위하여 그들이 치른 희생을 너무나 잘 알았던 그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구제해야만 하였다. 한 가지 구제 방법은 무거운 책임을 감수하고 그들을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여 한 번에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부양하였다. 즐겁지도 쉽지도 않은 일이었다. 자기로서는 관여할 뜻이 없는 일을 자기 동료들더러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과부와 고아와 이혼녀의 처지를 회복시켜 주는데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들은 무슬림에게 맡겨진 사람들이었으므로 공동으로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에 그가 한 일이 바로 자기 책임을 부담한 것이었으며 항상 그렇듯이 그의 부담이 가장 크고 무거웠다. 그가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고, 자기 동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아내를 맞이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3. 무슬림들에 의해 많은 전쟁 포로들이 잡혔는데, 이들에게도 안전과 보호의 권리가 있었다. 이들은 살해되거나 인간으로서 육체적인 권리를 부인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첩이나 흔한 정부로 취해진 것이 아니라, 무슬림과의 합법적인 결혼을 통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 또한 무슬림들에게는 또 하나의 도덕적인 부담이었으며, 하나의 공동 책임으로서 그것을 분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다시금 무함맏은 자기 짐을 져, 포로 중 두 명과 결혼함으로써 책임의 일부를 떠맡았다.

4. 예언자가 한 결혼의 일부는 사회·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주요 관심은 이슬람의 장래였다. 그는 온갖 유대로 무슬림을 강화시키려고 고심하였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제 1대 계승자인 아부 바크르의 어린 딸, 그리고 제 2대 계승자인 우마르의 딸과 결혼한 이유인 것이다. 그는 주와이리와 혼인함으로써 바니알-무스따리끄 씨족 전체와 이들과 동맹한 부족들의 이슬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였다. 샤피아와의 혼인을 통해서는 아라비아의 적대적인 유태인들이 차지한 큰 지역을 중립화시켰다. 이집트 출신의 콥트인,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므로써 한 유력한 왕과 정치적 동맹을 결성하였다. 무함맏이 아비시니아의 네구스가 바친 자이납과 혼인한 것 역시 이웃 왕에 대한 우정의 제스처였다. 그의 영토에서 초기 무슬림들이 안전한 도피처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이와 같이 혼인을 맺음으로써 예언자는 신분제도와 인종적·민족적 허영심과 종교적 편견을 일소하고자 하였다. 그는 가장 비천하고 가련한 여자들과도 결혼했으며 이집트 출신의 콥트인 여자, 종교와 종족이 다른 유태인 여자, 아비시니아 출신의 흑인 여자와도 결혼했다. 그는 단지 형제애와 평등을 가르치는데 만족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가르치고 가르친 것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6. 법적인 이유 때문에 그리고 퇴폐적인 전통을 폐기하기 위해서 예언자가 결혼을 한 경우도 있다. 그가 자이납과 결혼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자이납은 노예에서 해방된 자이드와 이혼한 여자였다.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에는 이혼녀와 재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무함맏은 자이드를 양자로 삼아,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들 사이의 관습대로 자기 아들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슬람은 이러한 관습을 철폐하여, 그것을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무함맏이 최초로 실천을 통해서 이것이 불가함을 표명하였다. 그는 자기 "양(養)"아들의 이혼녀와 결혼함으로써, 양자를 삼음에 의해 실제로 그 양자가 양부의 친자가 되지 못하며 이혼녀도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공교롭게도 이 자이납은 바로 무함맏의 사촌이었다. 그녀는 자이드와 혼인하기 전에 무함맏에게 청혼한 적이 있었다. 무함맏은 그 때는 청혼을 거절했지만, 그녀가 이혼한 이후 이혼녀의 합법적인 결혼과 양자의 사실상의 지위라는 두 가지 입법상의 목적을 위해서 그녀를 받아들였다. 자이납에 얽힌 이야기를 무함맏의 도덕적 성실성에 대한 가소로운 날조에 관련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이러한 악랄한 날조는 여기에서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꾸란, 33:36, 37, 40)

이제까지 논한 것들이 예언자의 결혼에 수반된 상황들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이 최고의 도덕규범을 가졌으며, 그는 어떤 상황아래서든지 인간에 대한 완전한 본보기였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비무슬림들에게 그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 보라고 호소하는 바이다. 그런 연후에야 그들은 건전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혼과 이혼 (up)

이슬람에서 가장 많이 왜곡된 개념 중 하나는 결혼의 진정한 의미다. 본 조사에서 앞에 간략히 언급한데 덧붙여 몇 마디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슬람에서 결혼은 양 당사자들이 맺는 상거래가 아니며 서로 대조하여 물질적 이득과 의무를 평가하는 세속 계약도 아니다. 결혼은 엄숙, 신성한 것인 바, 단순히 물질적, 세속적 견지에서 결혼을 규정함은 잘못이다. 도덕적인 사랑, 영적인 향상, 사회적 결혼은 하나님께서 친히 첫 번째 증인, 첫 번째 당사자가 되시는 계약이다. 혼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나님의 법령에 따라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감독하시는 사람으로서의 떳떳한 교제이며, 그 분께서 꾸란(30:21)에서 언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분의 축복과 풍성한 자비의 징표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의 결혼은 남녀사이의, 뿐만 아니라 양 당사자와 하나님 사이의 영속적인 관계와 부단한 조화의 수단임이 분명하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혼인 계약을 맺는 당시의 두 명의 무슬림은 좋든, 나쁘든, 더 좋아지든, 더 나빠지든 결혼을 원만하게 지속시켜 나가겠다는 의사를 갖는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런 결과를 보증하기 위해 이슬람은 몇 가지 규정을 마련하였다. 이런 규정들은 결혼이 제 목적에 완전히 합치될 것임을 철저하게 보증한다. 이들 규정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쌍방은 서로를 상당히 잘 알아야 하되, 부도덕하거나 기만적인 그리고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를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2. 특히 남자에 대하여는 여자의 재산이나 가문 혹은 단순히 육체적 매력을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종교적 헌신, 도덕적 성실성, 성격 등의 영속적인 가치를 기준을 하여 배우자를 고르라고 권고한다.

3. 여자에게 청혼하는 남자가 자기에게 어울리며 자기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한지, 자기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것을 이유로 하여 여자는 자기 눈에 안차거나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청혼을 거절할 수 있다. 이런 남자와 결혼하면 여자가 아내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할 수 없게 되고 그나마 결혼 생활마저 파탄 나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여자는 자기의 기준과 청혼 남자의 재력에 따라 그에게 결혼 지참금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여자가 이런 권리를 무시하고 결혼 지참금을 거의 혹은 전혀 받지 않고 남자를 맞아들이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결혼 지참금을 주라는 남자에 대한 명령은 곧 남자가 여자를 원하고 필요로 하며 기꺼이 자신의 재정적 혹은 기타의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여자에게 보증하는 것이다. 결혼 지참금은 또한 여자가 자기 안전을 누릴 것이며, 남자가 물질적 이득을 노리는 동기로 결혼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제스처다. 그것은 각 당사자가 타방에 대해 기대하는 것과 기대하지 않는 것 사이에 분명한 한계선을 긋는다.

5. 결혼은 공개되어야 하며 즐거움이 넘치는 가운데 축복 받아야 한다. 쌍방의 자유로운 동기가 필수 조건이며 이러한 동의 없는 결혼은 무효가 된다.

6. 모든 결혼은 그것이 합법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두 명의 성인이 증인을 서고 공문서에 올려야 한다.

7. 아내를 온전하게 부양하는 것은 남자의 의무다. 여자는 결혼을 함으로써 부양 받을 권리를 갖는다. 여자에게 재산이나 소유물이 있는 경우에는 결혼 전이나 후나 그것은 여자의 것이 된다. 남편은 자기 아내의 재산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다. 이는 곧 결혼을 그 숭고한 목적에 한정시켜 온갖 쓸데없는 목적과 절연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조처를 통하여 이슬람이 결혼을 행복한 교제 그리고 부단한 조화와 영속적인 평화의 확고한 토대로 만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보증을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란 변하기 쉬워서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슬람은 현실주의적 인생관을 견지하고 모든 예기치 않은 사건을 고려해 넣는다. 결혼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루어져야 할 떳떳하고 숭고한 목적을 갖는다. 이슬람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거나 효과가 없는 결혼 생활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름뿐이거나 부질없는 결혼 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하든가 아예 결혼 생활을 그만두어야 한다. 결혼은 엄숙한 계약인 만큼 아무 보람도 없이 침체된 상태에 방치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결혼이 제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제구실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 결혼은 이혼으로써 청산하고 관련 당사자의 모든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이름뿐인 무익한 계약을 지킬 아무런 의의가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존중할 수 없는 서약에 매인 사람을 풀어 주게 되는 것이다.

전술한 규정에 근거하고, 전술한 예방책이 적용되는 이슬람의 결혼 생활이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할 때는 어떤 매우 심각한, 화해로써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가로놓여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혼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혼은 마지막 수단이다. 예언자는 이혼을 가리켜 모든 합법적인 일 중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가증한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종적이고 절망적인 조처를 취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순서로 몇 가지 시도를 해 보아야 한다.

1. 관련 양 당사자는 자기들 사이의 다툼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당사자들이 해결을 못하면, 남편의 친척과 여자의 친척 가운데서 각각 한 사람씩 나온 두 명의 중재자들에게 일을 맡겨 둘 사이를 중재하여 다툼을 해결해 보도록 해야 한다.

3. 그래도 역시 안 되면, 이혼을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이혼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이슬람법은 양 당사자가 이혼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며, 그들 각자에게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이슬람법은 이혼의 권리를 남자 혹은 여자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둘 다 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양 당사자 중 어느 쪽이 이혼을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상대방과 함께 지내는 것을 불안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이혼 요구가 정당하다고 인정되면 법원이 간섭하여 피해를 받는 쪽에서 이혼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혼을 한 후에는 대기 시간-보통 2-3개월-이 있게 되는데, 이 기간 중에도 전 남편이 이혼녀를 완전히 후원 부양한다. 이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 대기 기간은 쌍방이 자기들의 태도를 더욱 진지하게 재고하고 수치스러운 별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다. 그 기간 중에 재결합하기를 피차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별거하게 되면 보통, 상대방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느끼기 때문에 다시 결합하도록 고무된다. 대기 시간이 끝나면 여자는 자유롭게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 쌍방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의무를 지지 않는다.

이혼녀와 이혼녀의 전 남편이 재결합할 경우에는 이들의 결혼은 신혼과 다름없을 것이다. 둘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전과 마찬가지로 이혼이라는 해결책에 호소할 수 있다. 그 후 피차 원한다면 새로 결혼하여 재결합이 성공하지 못하면 최종적인 이혼을 적용할 수 있다.

맨 처음 이혼을 허락함으로써, 이슬람은 이혼보다도 더욱 해로운, 불행하고 냉정하며 침체된 결혼 생활을 용납할 수 없다는 방침을 분명히 한다. 재결합한 쌍방의 결정으로 번갈아 두 번 이혼케 함으로써 이슬람은 보람과 목적이 있는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기회를 부여한다. 이처럼 이슬람은 온갖 문제와 대결하고 온갖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혼을 허락함으로써 이슬람이 결혼 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로 이러한 조처에 의해 결혼 생활의 안전을 보장한다. 왜냐하면, 그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피해를 받는 쪽에서 이혼을 함으로써 부당한 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제 구실을 다하고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결혼 생활만이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양 당사자는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행위를 하기에 앞서 결혼 생활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슬람은 각 당사자로 하여금 결혼 전의 배우자 선택과 결혼 후의 배우자에 대한 대우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이슬람이 상호 동의에 의해 혹은 피해자 측을 대신하여 법원이 간섭함에 의해 이혼을 성립시키는 것은 곧 도덕과 인간의 존엄성을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슬람은 충실치 못한 배우자들에게 한쪽이 부당하게 해를 당하도록 강요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부도덕하고 음란한 행위로 몰아 부치지도 않는다. 이슬람은 이와 같이 말한다. 법적으로 행복하게 함께 살든지 아니면 품위를 지켜 떳떳하게 별거하라. 이 점에 관하여 이슬람에 있어서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것이 아무에게도 단지 이혼을 하기 위하여 자시의 품위를 낮추거나 자신의 도덕성을 떨어뜨리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슬림은 이혼 허락을 받기 전에 몇 년 동안 배우자와 "별거"할 필요가 없다. 이혼 허락이 간통 여부에 달려 있지도 않다. 많은 제도가 승인하고 있는 "별거"는 부도덕하고 음란한 행위를 수반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고 있는 게 확실한 실정이나, 이런 식으로 "별거"하는 경우에는 결혼 생활의 권리를 누릴 수도 없거니와 그 의무를 이행할 수도 없다. 별거 당사자는 공식적으로 결혼 상태에 있지만 실제 얼마나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가? 별거 당사자는 아주 단단히 얽매여 있지만 어떤 제약도 영향을 미칠 수 없을 만큼 해이해져 버리고 만다. 그 사람은 이혼도 재혼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혼외 관계를 하는데 대한 무슨 법적인 한계라도 있는가?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누구하고라도 아무런 저지나 제한도 받지 않고 놀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매일 생기고 있는 만큼, 자세한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별거"가 긍정적으로는 이혼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도덕이 치러야 하는 희생,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얼마나 큰 가! 이것은 이슬람으로서는 인정하거나 승인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인정한다면 이슬람이 소중히 하는 윤리적 가치의 전 체계를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간통의 경우와 일부 제도가 그것을 이혼 사유로서 승인한 사실을 고려하여 우리는 다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이혼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간통을 하거나 간통한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을 크게 모욕하고 도덕을 심히 해치는 행위다. 간통에 대한 이슬람의 견해는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대게 보면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간통을 하거나 간통한 것처럼 가장한다고 해서 이혼이 성립되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이혼 판결을 받기 위하여 간통을 하거나 간통한 것처럼 가장한다. 다른 식으로는 이혼 판결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에 있어 참으로 주객전도의 수치스러운 행각이 아닌가!

이것이 그 문제에 대한 이슬람의 입장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이혼을 해야 한다면 품위를 지키고 합당하게 존중하면서 이혼을 승인해야 한다. 이슬람은 결혼 생활에 적용하면 "별거"나 간통이 이혼 사유가 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엄격함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으로 생겨난, 저 헐리우드식의 쉬운 이혼도 없을 것이다. 인간성에 관계하는 제도라면 어느 것이든 현실주의적이고 온건해야 하며 모든 조건에 대처해 나갈 각오로써 모든 상황을 고려해 넣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제도는 설 땅을 잃고 자멸해 버리고 말 것이다.(꾸란, 2:224-232, 4:34-35, 4:127-130 참조)

끝으로 한 마디 더 주의하고 본 논의를 마치기로 한다. 사실상 알려져 있는 모든 사회, 모든 종교마다 제각기 결혼 생활을 끝맺는 방법이 있다. 이혼율은 산업화된 세계에서 급증하고 있으며 이혼 법은 점점 자유주의화 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이혼은 여전히 주목할 만한 도덕적 행위인 것이다. 배우자들은 친절하고 인내하라는 하나님의 명과 하나님께서 많은 미덕과 장점을 심어준 자기 배우자라도 그 배우자의 어떤 점이 싫을 수도 있다고 주의를 받고 있다. 선의를 가지고 동거한다면,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보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혼해서 갈라서야 한다면, 해롭게 하려는 생각은 말고 이혼을 청구해야 한다. 품위를 지켜 명예롭게 갈라선다면 이들에게도 고루 미치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가 보장되어 있다. 결혼의 전체 맥락은 시종일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그 중심으로 하여, 그러한 믿음을 지향한다. 이혼을 다룬 성귀들은 무미건조한 법규정이 아니다. 이 성귀들은 고도의 질서에 대한 도덕적 권고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나고 있다. 당사자들의 도덕적 책임은 이혼 날짜의 훨씬 너머까지 미친다. 이혼을 주로 도덕적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 정당할 만큼 이 문제 전체는 실로 고도의 윤리 체계 속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5. 이슬람에서의 여자의 지위 (up)  

이슬람에서의 여자의 지위가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꾸란과 초기 무슬림의 태도가 여자는 적어도 남자만큼 생존에 필요 불가결하여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이거나 하등인종(下等人種)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외래문화와 외국세력의 영향이 없었다면 무슬림들 간에 이러한 문제가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의 지위는 남자의 지위와 동등하다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것은 당연지사요, 기정 사실이었던 만큼 아무도 그것을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이슬람이 여자에 대해 제정해 놓은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슬람 이전 시대나 오늘날의 현대 세계에서 여자가 처한 비참한 상태를 개탄할 필요는 없다. 이슬람은 타종교나 헌법 제도하에서는 결코 누려본 일이 없는 권리와 특권을 여자에게 부여하였다. 문제를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비교적인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조사해 보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여자의 권리와 책임은 남자의 그것과 동등하지만,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동등(평등)하다는 것과 동일(同一)하다는 것은 두 가지의 전연 별개의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동등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런 차이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둔다면 문제가 될게 없다. 똑같은 두 사람의 남자가 여자를 찾는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

동등하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동등(평등)하다는 것은 바람직하고 공평 공정한 것이지만 동일하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동일하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창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염두해 둔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할 여지가 없다. 여자의 권리가 남자의 권리와 동일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덜 중요하다고 추정할 근거도 없다. 여자의 지위가 남자의 지위가 동일하였다면 여자는 남자의 복제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복제물이 아니다. 이슬람이 여자에게-동일한 권리가 아니라-동등한 권리를 준다고 하는 사실은, 이슬람이 여자를 합당하게 고려하고 여자를 인정하며, 여자의 독립적 인격을 승인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여자에게 악마가 만들어 낸 것이라나 악의 씨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이슬람에 있는 경향이 아니다. 꾸란은 여자가 남자의 지배에 굴복할 수 없도록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는 주민으로 삼고 있지 않다. 여자에게 영혼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끌어들인 것도 이슬람이 아니었다. 이슬람 역사상, 무슬림이라면 그 누구도 인간으로서의 지위와 영혼의 소유 그리고 기타 훌륭한 영적 자질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여타의 통속적인 믿음과는 달리, 이슬람은 이브에게만 원죄(原罪)의 책임을 씌우지 않는다. 꾸란은 아담과 이브가 모두 유혹을 받았으며, 둘 다 죄를 범했고 그들이 회개한 후에 하나님께서 둘 다 용서하셨으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동시에 두 사람 모두에 대한 것이었음을 매우 분명히 한다.(꾸란, 2:35-36, 7:19,27, 20:117-123) 사실 꾸란은 원죄의 책임이 아담에게 더 많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여자에 대한 편견, 여자의 행위에 대한 의심은 모두 이러한 원죄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이러한 편견이나 의심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가 모두 똑같이 잘못을 범했고, 이브에게 죄가 있다고 한다면, 아담에게는 더 한층 많은 죄가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 여성의 권리는 자발적으로 혹은 여성에 대한 친절심에서 부여되지 않는다. 현대 여자가 오늘의 지위에 오른 것은 강제에 의해서지 자연스러운 과정이나 상호 동의 혹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여자들은 실력으로 밀고 나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러 방면에서 벌어진 상황이 여자에게 도움이 되었다. 전시의 인력부족, 경제적 요구의 압력, 산업 발전의 필요 때문에 여자는 가정 밖으로 밀려나 일하고 배우고 자기 생계를 위해 애쓰고 나자와 동등한 입장이 되고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갖가지 상황에 몰린 여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 새로운 지위를 획득했던 것이다. 모든 여자들이 자기들 편에 기운 상황을 환영하였고 그 결과에 기꺼이 만족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러나 현대 여성들이 어떤 권리를 누리고 있든지 간에, 그것이 무슬림 여자의 권리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슬람이 여자를 위해 제정해 놓은 것은 여자의 천성에 어울리고, 여자에게 충분한 안전을 보장하며 수치스러운 상황과 불확실한 인생행로에 빠져들지 않도록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현대 여성의 지위와 살아가기 위해 혹은 자립하기 위해 여자가 무릅써야 하는 위험을 여기서 꼬치꼬치 따질 필요는 없다. 이른바, 여자의 권리의 결과로서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불행과 좌절을 파헤칠 필요도 없다. 현대 여성이 자랑하는 바로 그 "자유"와 "권리" 때문에 파탄 나고 있는 많은 불행한 가정의 상태를 조정해 보자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자유롭게, 독립해 나가서 노동하여 벌고 남자와 동등해진 양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고는 있지만, 그 대가로 매우 유감스럽게도 자기 가족이 희생되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은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슬람에서의 여자의 지위다. 이제부터 여자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를 요약해 보기로 한다.

1. 여자는 이슬람에 의해 인류의 생식에 있어서 완전하고 동등한 남자의 배우자로 인정된다. 남자는 아버지로서 여자는 어머니로서 모두 생존에 필요 불가결하다. 여자의 역할은 남자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이 서로 보조를 맞춤으로써 여자는 모든 점에 있어서 동등한 몫을 차지한다. 여자는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동등한 책임을 지며, 자기 배우자만큼의 자질과 인간성을 보유한다. 인류의 생식에 있어서의 이러한 공동 보조에 대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인류여! 진실로 우리가 너희를 한 쌍의 남자와 여자로부터 창조하여 너희로 민족과 부족이 되게 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서로 알게 하려 함이라…(꾸란, 49:13, 비교 ; 4:1) 2.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게 사적인 책임과 공동의 책임을 지며, 자기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여자는 인간적인 자질을 소유하고 영적 열망을 간직할 만한 독립된 인격으로 인정된다. 여자의 인간성은 남자의 그것보다 열등한 것도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둘이는 서로 한 지체(肢體)를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 주께서 (저들의 기도를)받아들이사 이같이 응답하시니라 : 나는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너희 중 누가 한 일이든지 그 일이 결코 잊혀지게 하지 않으리라 : 너희는 서로 한 지체이니…(꾸란, 3:195, 비교 9:71, 33:35-36, 66:19-21) 3.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게 교육과 지식을 추구한다. 이슬람은 무슬림들에게 지식을 추구하라고 명하되 남녀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대략 14세기 전에 무함맏은 지식의 추구는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무슬림에게 지워진 의무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매우 분명하였으며 무슬림들에 의해 역사의 진행과 더불어 실행으로 옮겨졌다.

4.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 여자의 건전한 의견은 고려되며, 그것이 여자의 의견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시될 수 없다. 꾸란과 역사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여자는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무슬림 지도자들과는 물론 예언자와의 진지한 토론에 참여하기도 하였다.(꾸란, 58:1-4, 60:10-12) 뿐만 아니라 무슬림 여자들이 공익에 관한 입법상의 문제에 대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하고 칼리프들과 반대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는 칼리프들이 이런 여자들의 건전한 주장을 받아들였다. 우마르 이븐 알-칼타브가 칼리프 직에 있을 때 한 가지 특별한 사례가 있었다.

5. 역사기록은 여자들이 초기의 무슬림과 더불어 특히 비상사태시에 공공생활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자들도 부상자 간호와 군량마련, 전사(戰士)의 뒷바라지 등을 위해 전투를 벌이는 무슬림 군대를 따라다니곤 하였다. 여자들은 쇠빗장 뒤에 갇히거나 무가치한 존재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영혼을 박탈당하지도 않았다.

6. 이슬람은 여자에게 계약하고 사업할 수 있는 권리와 독립하여 벌어서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동등하게 부여한다. 여자의 생명, 재산, 명예는 남자의 그것만큼 신성한 것이다. 여자가 죄를 범할 때 받는 형벌은 비슷한 경우에 남자가 받는 형벌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여자가 피해를 입을 경우에는 그러한 처지의 남자가 받는 것과 동등하게 응분의 보상을 받는다.(꾸란, 2:178, 4:45,92-93)

7. 이슬람은 이러한 권리들을 통계적으로 열거해 놓고 나서 흐지부지해 버리지 않는다. 이슬람은 이들 권리를 보호하고 필수적인 신조로서 실천할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다 취해 놓았다. 이슬람은 여자에 대해 편견을 갖거나 남녀 사이에 차별을 두는 버릇이 있는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꾸란은 습관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누누이 책망한다.(꾸란, 16:57-59, 62, 42:47-50, 43:15-19, 53:21-23)

8. 인류의 생존에 똑같이 필요 불가결한 존재로 인정하여 여자는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 이슬람은 여자에게도 상속권을 부여해왔다. 이슬람 이전에는 여자에게 상속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자는 남자가 상속하는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그와 같이 양도할 수 있는 재산을 이슬람은 상속자로 만들어 여자의 선천적인 인간적 자질을 인정하였다. 아내이거나 어머니이거나 혹은 누이이거나 딸이거나 막론하고 여자는 사망한 친척의 재산의 일정 몫을 상속받는다. 상속분은 고인과의 촌수와 상속자의 수에 따라 결정된다. 이 상속분은 여자의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줄이거나 여자의 상속권을 내세움으로써 상속권을 빼앗고자 해도 법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지 않을 것이다. 소유자는 자기 재산의 삼분의 일의 한도 내에서만 유언장을 작성할 수 있기 때문에 남녀 상속자들의 권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상속의 경우에 동등성과 동일성의 문제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게 고인이 된 친척의 재산을 상속할 권리를 가지지만 상속분은 달라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가 한 몫만을 받는 반면에 남자는 두 몫을 받기도 한다. 이것은 여자보다 남자에게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표시가 아니다. 이 특별한 경우에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받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 남자는 자기 아내와 가족 그리고 가난한 다른 친척들을 온전하게 부양할 책임을 혼자서 진다. 모든 재정적인 책임을 떠맡고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을 충분하게 부양하는 것이 법이 정한 남자의 의무다. 또한 자기가 속한 사회의 모든 훌륭한 대의명분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 역시 남자의 의무다. 오직 남자만이 모든 재정적인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다.

둘째 :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자는 약간의 개인 비용과 자기가 갖고 싶은 값비싼 사치품을 제외하면 재정적으로 책임이 없다. 여자는 재정적으로 안전할 뿐만 아니라 부양을 받는다. 여자가 아내라면 남편이 부양자가 되고, 어머니라면 아들이, 딸이라면 아버지가, 누이라면 오빠나 남동생 등이 부양자가 된다. 여자에게 의지할 친척이 없는 경우에는 상속받을 것도 없고 그녀에게 유산을 남겨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상속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지할 데 없는 여자가 굶어죽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이러한 여자를 부양하는 것은 사회전체와 국가의 책임이다. 여자는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직업을 얻을 수도 있다. 여자가 버는 돈은 전부 자기 것이 된다. 여자에게는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부양할 책임이 없다. 남자는 이런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가족과 혹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척이 있다면 그 친척을 부양할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여자의 책임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남자의 책임은 무한한 것이다.

셋째 : 여자가 남자보다 덜 가지는 것은, 사실은 여자가 일한 대가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상속 재산은 여자의 벌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국외의 출처로부터 그들에게 넘어온 가외(加外)의 재산이다. 그것은 여자에게나 남자에게나 불로소득이다. 상속 재산은 일종의 도움인 바, 어떤 도움이든지 특히 하나님의 법이 그 분배를 규정하고 있는 경우에는 다급한 필요와 책임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

한쪽에는 온갖 종류의 재정적인 책임과 의무를 짊어진 남자 상속자가 있고 또 다른 쪽에는 재정적인 책임이 전혀 없거나 고작해야 약간 밖에 없는 여자 상속자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상속시키기 위해 재분배해 줄 상당량의 재산과 도움이 있다. 만일 여자의 몫을 완전히 박탈해 버린다면, 여자가 고인과 친척이므로 이것은 여자에게 부당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여자에게 남자와 동등한 몫을 준다면 이번에는 남자에게 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양쪽에 부당하게 하는 대신 이슬람은 남자가 자기 가족의 필요와 사회적 책임에 응할 수 있도록, 그에게 더 큰 몫의 상속 재산을 주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이슬람은 여자를 아주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한 몫의 상속 재산을 주어 왔다. 사실, 이 점에 있어서 이슬람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많은 친절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여자의 권리가 남자의 권리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동등하다고 하는 사실이다.(꾸란, 4:11-14, 176 참조)

9. 민사계약(民事契約)의 증인으로서 두 명의 남자 혹은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함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약 당사자들의 권리를 보증하기 위한 조처다. 여자는 대개 남자와는 달리 실생활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부족 때문에 특정 계약의 당사자가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적어도 두 명의 여자가 한 명의 남자와 함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증인인 한 여자가 잊은 게 있을 경우 다른 한 여자가 생각나게 해 줄 것이다. 혹은 한 여자가 경험이 없어 잘못을 범하면 다른 여자의 도움으로 그 잘못을 바로잡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 정직하고 정당한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보증하기 위한 예방조처다. 사실, 이러한 조처는 시민 생활에서 여자가 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며 정의를 확립시키는데도 이바지한다. 아무튼 시민 생활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서 반드시 여자의 지위가 남자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족한 게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그 사람의 지위를 의심하지 않는다.(꾸란, 2:282)

10. 여자는 남자에게 없는 특권을 누린다. 여자는 월경기간 중이거나 해산 후 자리에 누워 있을 때에는 예배, 단식 등의 종교상의 의무가 면제된다. 금요일의 집회에 참석할 의무가 면제되며, 모든 재정적 책임이 면제된다. 어머니로서의 여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욱 많은 인정을 받고 더 높은 명예를 누린다.(꾸란, 31:14-15, 46:15) 예언자는 낙원이 어머니들의 발 아래 있다고 선언하여 이러한 명예를 인정하였다. 여자는 아이들의 사랑과 친절의 사분의 삼을 누릴 권리가 있다. 나머지 사분의 일은 아버지 차지다. 아내로서의 여자는 남편이 될 사람에게 앞으로 자기 소유가 될 적정액의 결혼 지참금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남편의 완전한 준비와 온전한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여자는 일하거나 가계비를 남편과 공동 부담할 필요가 없다. 여자는 결혼 후에도 결혼 전에 자기가 소유했던 것을 모두 보유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남편은 아내의 소유물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다. 딸이나 누이로서의 여자는 제각기 아버지와 오빠(혹은 남동생)에게 안전의 보장과 (각종)준비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여자의 특권이다. 여자가 일하거나 자립하고 싶어한다든지 가족 부양의 책임을 함께 지고 싶어 할 경우에는 그녀의 성실성과 명예가 보호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유가 있다.

11. 예배 중에 여자가 남자 뒤에 서는 것을 결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전술한 바와 같이 남자에게는 의무로 되어 있는 집단(회중)예배에의 참석이 면제된다. 그러나 참석할 경우에는 미성년인 아이들이 따로 열을 지어 성인 남자들 뒤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들끼리만 따로 모여 있는 열에 가서 선다. 이것은 예배 중에 지켜야 할 계율을 규정한 것이지 신분의 중요성에 등급을 매긴 것이 아니다. 남자의 열에는 국가 원수가 빈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다.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예배 중에는 가장 지위가 낮은 사람들과 나란히 선다. 예배시의 열의 순서를 정해 놓은 것은 각자가 자기 명상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무슬림의 예배는 찬송가나 노래를 부르는 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무슬림 예배는 여러 가지 동작과 몸짓, 경배, 부복 등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만약 남자와 여자가 같은 줄에 섞여 있다면 방해거리가 생기거나 주의가 산만해질 수 있다. 예배 이외의 엉뚱한 일에 정신이 팔려 명상의 깨끗한 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눈이-금지된 것을 봄으로써-마음과 마찬가지로 간음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무슬림은 남녀를 불문하고 예배 중에 이성(異性)의 몸에 접촉하는 것이 금지된다. 남자와 여자가 예배볼 때 나란히 선다면 서로 접촉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더군다나 여자가 남자의 앞이나 옆에서 예배를 볼 때, 경배나 부복 동작을 한 후에 옷 속의 신체 부위가 노출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남자의 눈이 우연히 노출된 부위를 보게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자는 당황할 것이고 남자는 주의가 산만해지거나 아마 나쁜 생각이 고개를 쳐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황하거나 주의를 산만하게 하지 않게 하고 명상과 순수한 생각에 전념하게 하며 예배자들 사이에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예배의 진정한 목적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이슬람은 남자들이 맨 앞 열에 서고 남자들의 뒤 열에 아이들이, 아이들의 뒤 열에 여자들이 서도록 하는 열편성 방법을 규정하였다. 무슬림 예배의 본질과 목적을 어지간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식으로 예배자들의 열을 편성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2. 무슬림 여자 얘기가 나오면 항상 "베일"로 알려진 오랜 전통이 연상된다. 여자가 명예, 품위, 정절, 순결 그리고 성실의 베일로서 자신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이슬람의 전통이다. 여자는 자기의 법적 남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정욕을 자극하거나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나쁜 의심을 조장할 수 있는 행위나 거동을 모두 삼가야 한다. 여자는 낯선 남자들 앞에서 자기의 매력을 과시하거나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여자가 써야 하는 베일은 영혼을 나약함에서, 정신을 방종에서, 눈을 음탕한 시선에서, 인격을 타락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여자의 성실성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여자의 도덕과 풍기 그리고 개성과 인격의 보호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다.(비교, 꾸란, 24:30-31)

13. 지금쯤은 이미, 이슬람에서의 여자의 지위가 전례 없이 높고, 그것이 여자의 본성에 현실적으로 적합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여자의 권리와 의무는 남자의 경우와 동등하지만 반드시 혹은 절대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 만일 어떤 면에서 한 가지를 여자가 못 가진다면, 다른 많은 면에서 더욱 많은 것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는다. 여자가 여성(female sex)에 속한다는 사실은 여자의 인간으로서의 지위나 독립적인 인격과 하등의 관계도 없으며 여자에 대한 편견과 그 인격에 대한 불공평한 처사를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슬람은 여자에게 요구되는 만큼 여자에게 준다. 여자의 권리는 여자의 의무와 아름답게 어울린다. 권리와 의무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어 한쪽이 다른 쪽에 압도되는 일이 없다. 여자의 전체적 지위는 꾸란 구절에 명시되어 있는 바, 이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여자들도 공평하게 (남자들이)저들에 대해 갖는 권리와 같은 권리를 가질 것이니라. 그러나 남자가 (상속에 있어서의 경우처럼)여자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느니라(꾸란, 2:228) 이 지위는 여자에 대한 지배권이나 여자에 대한 지배의 허가가 아니다. 그것은 남자가 지는 가외(加外)의 책임에 상응하는 것이며 남자의 무한한 책임에 대해 상당한 보상을 해 주는 것이다. 전술한 책임은 항상 다른 구절에 비추어 해석한다.(꾸란, 4:34)

몇 가지 경제적인 측면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높은 지위를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외의 책임이다. 그것은 인간적 혹은 인격적 측면에서 더 높은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쪽의 다른 쪽에 대한 지배나 억압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성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의 풍요함을 분배하는 것이다. 여자에게 무엇이 좋고 남자에게 무엇이 좋은지는 그 분이 가장 잘 아신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선언은 절대적인 진리다. 오! 인류여! 너희의 수호자이신 주를 숭배하라 그 분은 한 사람으로부터 너희를 창조하셨나니

비슷한 본성으로 저의 배우자를 창조하사 저희들로부터 무수한 남녀들을 (씨처럼)흩뿌리셨느니라.(꾸란, 4:1)

Source: Islam Fra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