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부록Ⅰ

꾸란과 그 지혜
 

꾸란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푼 최대의 선물이며 그 지혜는 독특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성서의 목적은 앞서 내린 계시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회복하며 인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인간의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고 인간의 정신을 계몽하는 것이다.

꾸란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무함맏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바, 그것은 상상하여 모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다. 무함맏과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아랍어의 최고 대가들로서 갈채를 받았으며, 꾸란에 필적할 만한 원전을 만들어 보겠다는 동기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꾸란의 내용이나 문체를 모방해 내지 못했다. 무함맏은 공식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교육을 받은 사실을 숨긴 것도 아니었다.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 인류 전체 곧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다 같이 하나님의 진리의 메시지를 가르쳤다는 것이 그의 최대의 명예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꾸란에 대한 첫 번째 사실이다.

이 유일무이한 성서에 대한 두 번째 사실은 그 내용과 순서의 의심할 여지없는 신빙성이다. 이는 일찍이 그 어느 책도 가져 보지 못한 혹은 가질 것 같지 않은 특성이나 꾸란의 신빙성은 그 원문의 순수성, 독창성, 그리고 전체성에 대해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막론하고 진지한 학자들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꾸란이 무함맏을 가르치고 생활의 지표로 삼고 대략 14세기 전에 인류에게 남겨 준 바로 그 성서라고 확실하게 단정을 내렸다. 몇 가지 사실을 관찰함으로써 꾸란의 이러한 유례없는 신빙성을 설명할 수 있다.

1. 꾸란은 일부분씩 단편적으로 계시되었지만, 그렇다고 순서나 배열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것을 결코 아니다. 꾸란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것이 애초부터 하나의 책이었음을 나타낸다.(꾸란, 2:2, 41:41-42) 꾸란의 배열과 꾸란 구절의 점차적인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였으며 무함맏과 그의 동료들이 따른 하나님의 뜻이었다.(꾸란, 25:32, 비교 75:17)

2. 아랍인들은 극히 세련된 문학적 취향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문학적 취향이 있었기에 그들은 훌륭한 문학 작품을 음미하고 감상할 수 있었다. 꾸란은 그들의 취미에 맞는 가장 뛰어난 문학적 걸작품으로 갈채를 받았다. 그들은 꾸란의 어조에 감동되었으며 그 비범한 선(善)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가장 큰 만족과, 가장 깊은 기쁨을 발견하였으며 이 성서를 암송하고 암기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것은 모든 무슬림들과 많은 비무슬림에 의해 찬양 받고 인용되고 소중히 여겨졌다. 이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3. 남녀를 불문하고 예배를 보거나 야간에 불침번을 설 때 꾸란의 일부를 암송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에게 지워지는 의무다. 꾸란을 암송하는 것은 무슬림에게 있어 고상한 숭배 형식이며 일상 습관이다.

4. 아랍인들은 대게 문맹자들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아주 좋아하는 시나 글귀를 보존하려면 오로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빈틈없는 기억력으로 유명하였던 바 바로 이러한 기억력에다 자기들의 문학적인 유산을 저장하였던 것이다. 꾸란은 문학적 취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 의해 모방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지체없이 암기하되, 항상 가장 훌륭하고 공손하게 그렇게 한다.

5. 무함맏 생존시에는 계시를 받아쓰는 전문적인 서기들과 기록 담당자들이 있었다. 무함맏이 한 구절을 받을 때마다 즉시 서기들에게 서기를 내려 자기 감독 하에 그것을 기록하게 하였다. 예언자가 친히 이들이 기록한 것을 전부 점검하고 인증(認證)하였다. 낱말 하나 하나가 재검토되었고, 구절 하나 하나가 제 순서대로 배열되었다.

6. 계시가 완결되자 무슬림들은 완전한 꾸란 기록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꾸란 기록들은 온갖 일상적 목적을 위해 암송·암기되고 연구 사용되었다. 차이가 하나라도 생기면 문제가 원문에 관련된 것이든 의미나 억양에 관련된 것이든 항상 예언자에게 직접 그 문제의 해결이 위임되었다.

7. 무함맏 사후에는 꾸란이 이미 많은 무슬림들에게 기억되었고 수많은 기록 판에 적혔다. 그러나 제 1대 칼리프인 아브 바크르는 여기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꾸란 기억자들이 많이 전사하면 꾸란에 심각한 혼란이 야기되지 않을까 우려, 그래서 그는 일류 권위자들의 의견을 물은 다음, 계시를 받아 적은 무함맏의 일등 서기 자이드 이븐 싸비트(Zeyd Ibn Thabit)에게 위임하여 무함맏이 친히 인정한 순서대로 성서의 표준 완결판을 편찬하게 하였다. 자이드 이븐 싸비트는 예언자의 동료들의 감수와 도움을 받아 그 일을 해냈다. 이 최초 완결판이 무함맏에게서 꾸란을 직접 듣고 그것을 기억하여 마음에 새긴 모든 무슬림들에 의해 점검 승인되었다. 이 일은 무함맏이 사거(死去)한 지 2년이 채 못 되어서 이루어졌다. 계시는 서기와 기억자들과 기타 예언자의 동료 무슬림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8. 무함맏이 사거한 지 약 15년 후, 우쓰만(Uthman)이 칼리프로 있을 때, 편찬된 꾸란 사본들이 이슬람에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는 지역에 널리 배포되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무함맏을 보지도 그의 말을 듣지도 못했다. 지역적, 지리적 요인 때문에 그들은 꾸란을 읽는데 악센트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낭송과 억양에 차이가 생겨 무슬림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우쓰만은 기민하게 움직여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였다. 그는 모든 일류 권위자들과 서로 협의한 후에, 계시를 받아 적은 4인의 전임 서기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사용 중에 있는 모든 사본이 회수되어, 단권 준 사본으로 대체되었다. 이 표준 사본은 바로 무함맏의 방언과 악센트였던 꾸라이쉬의 악센트와 방언에 따라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 방언이 표준어로 채택된 것은 그것이 모든 방언 중에서 가장 훌륭하였고 꾸란이 그 방언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꾸란은 다시 그것을 받은 사람의 악센트나 방언에 한정되었다. 그 때 이후로, 똑같은 표준판이 낱말이나 순서에 있어서 심지어 구두점에 있어서조차 극히 사소한 변화도 없이 사용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 결과로부터, 학자들은 지금 있는 꾸란은 처음에 받은 그대로이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꾸란에 첨가하는 일은 결코 없었으며 그 내용을 생략하거나 변조하는 일도 없었다. 그 역사는 대낮처럼 밝고, 그 신빙성은 확실하여 그 완전 무결한 보존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꾸란은 근원과 특성과 차원에 있어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지혜로 충만해 있다. 꾸란의 지혜는 그 저자의 지혜에서 연원하는 바, 하나님 이외의 그 누구도 꾸란의 저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지혜는 또한 모방이 불가능하고 모든 문학인들과 지식인들에게 도전을 제기하는 이 성서의 저항할 수 없는 힘에서 연원한다. 꾸란의 현실주의적 접근 방법, 그것이 제공하는 인간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위해 정해 놓은 숭고한 목적을 꾸란의 지혜가 독특한 성격을 가지게 한다.

역동성(逆動性)

꾸란의 지혜가 가지는 주요 특성 중 하나는 그것이 정태적(情態的)이거나 무미건조한 형(型)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을 자극하고 마음에 활기를 불어 놓는 역동적인 지혜다. 이 지혜 속에는 사람을 고무하는 역동성과 꾸란 자체는 물론 역사적인 증거에 의해서 입증되는 운동력이 깃들어 있다. 무함맏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리기 시작할 당시에 그가 가진 유일한 힘을 꾸란이었고 그가 가진 유일한 지혜는 꾸란의 지혜였다. 꾸란의 폐부를 찌르는 역동성은 실로 막강하여 저항이 불가능하다.

가장 다이내믹한 인물 가장 결정적인 입론(立論)이라 하더라도 꾸란의 다이내믹한 지혜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들은 많다. 하나님은 꾸란을 가리켜 루흐(Rooh) 혹은 영과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을 올바로 인도하는 빛(꾸란, 42:52)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분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가 이 꾸란을 산으로 내려보냈더라면, 진실로 너희는 그 산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움츠리고 산산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으리라, 이는 사람들을 반성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보이는 비유이니라.(꾸란, 59:21)

실천성

꾸란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은 그 실천성이다. 꾸란은 (현실성이 없는)희망적 관측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 가르침의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거나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의 낙관적 흐름 위에 표류하는 것도 아니다. 꾸란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 입장에서 될 가망이 있는 인물이 되라고 권고한다. 꾸란은 인간이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저주를 받고 태내(胎內)에서 무덤에 이를 때까지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무력하고 가망 없는 존재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숭고하고 명예로우며 위엄 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묘사한다. 꾸란의 가르침의 실천 가능성은 고금을 통하여 무함맏과 무슬림들이 보인 모범에 의해서 확증된다. 꾸란의 독특한 접근 방법은 그 교훈이 인간의 전반적인 복지를 목표로 하고 인간의 힘이 미치는 한도 내의 가능성에 입각한다는 사실에 있다.

온건성

세 번째 특성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등의 사이에 중용을 지키거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꾸란은 삶의 모든 현실과 인간의 모든 필요에 합당한 주의를 기울이며 인간을 도와 자신의 존재하는 숭고한 목적을 실현케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러한 것들을 다룬다. 이와 같이 중용을 그 접근 방법으로 하기 때문에 꾸란은 무슬림들을 중앙의 민족(꾸란, 2:143)이라 일컫는 것이며 이와 같이 중앙에 있기에 그들은 일찍이 인류를 위해 발전된 가장 훌륭한 민족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의(義)를 명하고 불의와 싸우며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꾸란, 3:110)

꾸란의 지혜는 3가지 주요한 차원 곧 내향적(內向的), 외향적, 상향적 차원에서 작용한다. 내향적으로 꾸란의 지혜는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며 정신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이른다. 그것은 개인을 내면으로부터 건전하게 교화시키는데 목표를 둔다. 이러한 내향적 침투는 여타의 법적 윤리적 제도의 그것과는 다르며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다. 꾸란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며 모든 문제를 그 분께 일임하기 때문이다.

꾸란의 외향적 작용은 각계 각층을 포괄하며 가장 사적(私的)인 문제로부터 복잡한 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사의 전 분야에 대한 원칙을 망라한다. 꾸란은 어떤 세속법 제도나 윤리 규범에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어떤 인기 있는 종교 교리도 도달하기 어려운 분야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꾸란의 주목할 만한 점은 그것이 인간사를 다루되 거기에 하나님의 향기와 윤리적인 색채를 곁들인다고 하는 사실이다. 꾸란은 매사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며 그 분을 인도의 제일 원천, 만사의 궁극목표로서 인정한다. 그것은 인간의 영적 지침, 법제도, 윤리규범이며 무엇보다도 생활양식이다.

상향적 작용에 있어서 꾸란은 지고 유일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만사는 우주에서의 하나님의 적극적인 유재(有在)인 이 초점에다 맞춰서 그것을 통하여 보아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광대한 영역에 있는 한 수탁자에 불과하며 인간을 창조한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숭배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은둔이나 소극적인 현실 도피에 대한 핑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뛰어난 성품을 이 지상에서 올바로 구현하라는 인간에 대한 권유다. 꾸란이 위로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은 곧 인간 앞에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유례를 볼 수 없는 숭고한 윤리 기준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평화와 선의 영원한 원천을 숙지시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의 궁극 목표라고 깨닫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종교 교리의 대중적인 경향에 역행하는 하나의 혁명이다. 이 혁명의 목적은 마음을 의심에서, 영혼을 죄에서, 양심을 예속에서 해방시키는데 있다.

모든 차원에 있어서 꾸란의 지혜는 결정적인 것이나, 그것은 육체를 죄악시하거나 괴롭히지 않으며 영혼을 등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인간화"하거나 인간을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만사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 속에서 그것이 속해 있는 자리에 세심하게 놓여진다. 행위와 대가, 수단과 목적 사이에는 비례 관계가 있다. 꾸란의 지혜는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그것은 요구하며 올바른 인식과 이해력을 가진 충복 같은 모든 사람들은 그 요구를 기꺼이 환영한다.

꾸란의 지혜는 사고에 있어서 진실성을, 행동에 있어서 경건성을, 목적에 있어서 통일성을, 의도에 있어서 선량함을 요구한다. 그것은 성서이니 그 속에 정녕코 확실한 인도가 들어 있느니라…(꾸란, 2:2)

이는 너희가 인류를 깊은 암흑에서 빛으로 인도케 하기 위해 우리가 너희에게 계시한 성서라…(꾸란, 14:1)

부록Ⅱ

마지막 예언자, 무함맏

무함맏이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무슬림의 신념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러한 신념은 결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의 문을 닫아버리셨거나 물러나 앉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념에 의해 위대한 종교 인물의 출세가 제한되지 않으며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의 등장이 막히거나 위대한 신앙인들의 발전이 방해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무함맏이 선택된 아랍인들에게만 도움이 된다거나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분의 마지막 은총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특정 종족이나 연령 혹은 세대를 편애하시지 않으며 그 분의 자비의 문은 항상 열려 있어 그 분을 찾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 자비의 문을 가까이 할 수 있다. 그 분은 인간에게 다음의 세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1) 영감에 의해, 영감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이나 정신 속에 주입시키는 암시와 생각의 형태를 나타낸다.

(2) 베일(휘장)의 배후로부터 베일은 자격 있는 수령자가 잠들어 있거나 황홀경의 상태에 있을 때 어떤 광경이나 환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3) 하늘의 사자 가브리엘을 통하여 가브리엘은 선택된 인간 사도에게 전해줄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내려온다.(꾸란, 42:51) 이 마지막 형태가 최고의 형태이자 꾸란의 무함맏에게 내려온 형태에 해당한다. 그것은 무함맏을 그 마지막이자 봉인으로 하는 예언자들에게만 국한되는 형태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이 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다른 두 가지 형태로 영감을 주시고 계심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무함맏은 예언자들의 봉인으로 선택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과 접촉하시지 않거나 인간에 대한 관심을 잃은 게 아니며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길이 막히거나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열망이 방해받아 온 것도 아니다. 이와는 달리 무함맏은 예언자 지위의 정점, 꾸란을 계시의 완결판으로 선택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의 영구적인 수단을 확정하셨으며 끊임없이 인도의 빛을 발하는 횃불을 올리셨다. 이러한 일반적인 관찰 결과 말고도 무함맏이 하나님의 마지막 사도인 이유를 지적하는 특별한 논점들이 있다. 이 가운데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꾸란은 무함맏이 천지의 통치권이 귀속하는 하나님의 사도로서 만인에게 보내졌다(꾸란, 7:158)고 언명한다. 꾸란은 또한 무함맏이 다름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막론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자비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졌다(꾸란, 21:107)고 언명하며, 무함맏은 하나님의 사도요, 예언자들의 봉인(꾸란, 33:40)이라고 언명한다. 꾸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드지 모든 무슬림이 따르고 숙고하는 하나님의 진리다. 무함맏의 메시지는 단순한 민족적 부흥이나 종족적 독점 혹은 굴레와 압제로부터의 일시적 해방이 아니다. 역사 방향의 갑작스러운 전환도 아니다. 무함맏의 메시지는 세계적 부흥, 공통의 축복, 초국가적인 유산, 그리고 영원한 영적 해방이다. 그것은 이전의 메시지의 발전적 연속이며 앞서 내린 모든 계시의 균형 잡힌 통합이다. 그것은 인종, 연령, 피부색, 지방색의 모든 경계를 초월한다. 이 메시지는 모든 시대의 인간이 그 대상이며 바로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은 무함맏이 마지막 사도라고 믿는다. 꾸란이 그것을 옳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며, 무함맏의 메시지가 최고급의 실로 보편적이고 결정적인 믿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무함맏이 직접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라고 언명하였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무슬림이든 다른 누구든 이 언명의 진실성을 의문시할 수 없다. 생전의 무함맏은 매우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의 성실성과 진실성은 무슬림들이 보기에, 뿐만 아니라 그를 가장 철저하게 반대한 자들이 생각하기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인품, 그의 영적 업적과 세속적 개혁은 인류의 전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것이다. 역사가 무함맏에 필적할 만한 인물을 탄생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시간이 흘러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 예언자인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이지, 자기가 사사로운 명예를 바라거나 사사로운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승리를 했지만 그는 우쭐해 하지 않았고 개선을 하고도 그의 빼어난 덕은 약해지지 않았다. 이득이나 명예에 대한 생각이 얼씬거리는 일이 없었다. 그의 말은 지혜와 진리와 찬란한 빛을 발한다.

3. 무함맏은 생전에 자기 사명을 완수하고 자기 사업을 매듭지은 유일한 예언자였다. 꾸란은 그가 운명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종교가 완성되었으며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계시의 진실성이 지켜졌으며 (앞으로도)안전하게 보존되리라(꾸란, 5:3과 10:9)고 언명하였다. 그가 운명했을 때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완성되었고 무슬림 신자들의 공동체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꾸란은 그의 생전에 기록되었으며 원래의 완결판으로 보존되었다. 이 모든 사실은 하나님의 종교가 적용에 있어서는 물론 개념에 있어서 무함맏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하나님의 왕국이 이 지상에 수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함맏의 사명, 본보기, 업적은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기 어려운 이상이거나 오직 내세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도 있는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였다. 하나님의 왕국은 무함맏 시대에 존재하고 번영하였던 바, 진지한 신자들과 신앙인들이 있는 경우에는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하고 번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 지위의 정점을 이루게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무함맏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리고 계시의 완결판을 이루게 되어 있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이 꾸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상에서의 무함맏의 사명이 실제로 완수되었으며 그의 생전에 꾸란 전체가 신빙성 있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마지막 예언자였다는 신념에 대해 그 누구에게나 일말의 의심도 남기지 않는다.

4. 무함맏이 마지막 예언자라는 하나님의 정하심은 꾸란의 독창적이고 순수한 신빙성, 무함맏의 결정적이고 독특한 업적, 이슬람의 보편성, 모든 상황, 모든 연령, 모든 사람에 대한 꾸란의 적용 가능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는 모든 국경을 초월하고 인종, 피부색, 연령, 재산 상태 혹은 위선의 모든 장벽을 훌쩍 뛰어 넘어 퍼지는 종교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과 형제애, 자유와 존엄, 평화와 명예, 인도와 구원을 보증하는 종교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교의 순수한 본질이며, 그 분이 역사의 시초부터 인간에게 베풀어 오신 류(類)의 도움이다. 무함맏 그리고 꾸란과 더불어 종교의 발전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가 끝났다거나 인간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온갖 하나님의 인도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실제적인 본보기들이 인간에게 충분히 마련된, 새로운 접근 방법의 시작, 신기원의 개시에 불과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는 그 분의 가장 믿을 만한, 불후의 계시인 꾸란 속에 들어 있으며 그 실제적인 본보기들은 무함맏의 인격 속에서 발견된다. 만약 새로운 예언자나 새로운 계시서가 온다면 이것이 예언자의 지위의 특성이나 꾸란의 진리에 무엇을 보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거나 계시의 진리성을 지키는 것이라면 이 일은 꾸란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에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이 모든 일은 무함맏이 이미 보여 주었다. 또 그것이 인간을 하나님과 올바른 인생길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이 일은 꾸란과 무함맏에 의해 이미 그 기초가 튼튼하게 잡혔다. 인간은 새로운 계시나 새로운 예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깨어나는 것이요 정신을 개방하고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인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미 있는 계시와 자신의 현존 자원을 활용하고 앞서 내린 계시의 순수성을 구체화하고 보존 완성한 이슬람의 무진장한 보물을 캐내는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무함맏이 마지막 사도가 될 것으로 정하셨던 바, 무함맏은 정해진 대로 정말 마지막 사도가 되었다. 무함맏 이전의 어떤 예언자도 무함맏 만큼의 업적을 이루거나 남기지 못했으며 무함맏 이후에 예언자라고 자처한 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에게 필적할 만한 일을 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포고는 그 뒤를 이은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예고하였다. 그 포고는 인간이 지적 성숙과 영적 극치의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그 이후로부터는 무함맏과 그의 전임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예언자직과 계시라는 풍부한 유산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예언자나 새로운 계시 없이 스스로 일을 해나가야 할 것이라는 희소식을 인간에게 전하였다. 그것은 세계의 여러 문화, 인종, 지역이 서로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며 인류가 하나의 보편 종교와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였다. 이 하나의 보편 종교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인류는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고등한 지식과 진지한 지적 사업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면에서 담당할 위대한 역할에 대한 엄숙한 증언이었다. 인간이 고등한 지식과 건전한 지적 잠재 능력에다 꾸란의 영적, 도덕적 가르침을 겸비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존재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상 예언자직의 시대는 무함맏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무함맏은 이간에 대해서는 자발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였고, 과학에 대해서는 제 기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광대한 영역을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으며, 정신에 대해서는 숙고하고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이슬람은 그 성질상 상당한 융통성과 실천성을 내포하고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이에 대처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응력이 강하며 꾸란은 그 성질상 보편적이고 영원한 한편,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인도를 내포할 정도로 독특하며 무함맏의 메시지는 그 성질상 모든 사람, 모든 세대를 그 대상으로 할 정도로 일반적이다. 무함맏은 단순한 종족의 지도자, 민족의 해방자가 아니었다.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었으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가장 훌륭한 본보기였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서 배울만한 점과 따를 만한 선과 경건의 뛰어난 본을 발견할 수 있으며 모든 세대가 그에게서 잃어버린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록 Ⅲ

이슬람력

무슬림의 기원을 멕카에서 메디나로의 히즈라 혹은 무함맏과 그의 동료들의 멕카에서 메디나로의 이주라는 대산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사건을 무슬림 기원의 시작으로 채택한 것은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무함맏 이후의 제 2대 칼리프-가 칼리프직에 있을 때였다. 지금은 히즈라후 1395년(1395 A. H)에 해당된다.

이슬람 역은 음력이어서 각 월은 달의 위상변화에 의해 결정된다. 일년에는 열두 달이 있으며, 한 달은 달의 위상에 따라 30일이 되기도 하고 29일이 되기도 한다. 각 월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무하르람, 싸파르, 라비알-아우왈, 라비알-싸니, 주마다 알-오올라, 주마다 알-싸니야, 라잡, 샤반, 라마단, 샤우왈, 줄-까다, 줄 힛자.

주마다 잊지 않고 지켜야 할 특별한 날이 있다. 금요일이 이 날에 해당하는데 이 날의 의의는 참석이 가능한 모든 무슬림이 준행해야 할 정오 집단예배에서 유래한다. 이 외에도 잊지 않고 특별히 지켜야 할 뜻깊은 날들이 있다.

1. 히즈라 ; 무하르람월, 초하룻날 전야에 해당한다.

2. 예언자 탄신일 ; 라비일 알 아우왈월 열 이튿날 전야에 해당한다.

3. 라마단 월 ; 단식하는 달로써 이 달에 꾸란이 계시되었다.

4. 까드르의 권능의 밥 ; 라마단의 23일이나 25일 혹은 27일에 이 날을 경축할 수 있다.

5. 이둘-피뜨르(라마단 월의 단식을 파하는 축제) ; 샤우왈월 초하룻날에 해당한다.

6. 이둘-아드하(희생의 축제) ; 줄-힛자월 열흘날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