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본서는 단지 일반독자에게 이슬람의 기본을 알려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분명해지겠지만, 본서에서 이슬람의 깊이와 폭을 드러내 보일 의도는 없다. 의도한 바는 단지 교양 있는 일반 독자로 하여금 문제를 올바로 꿰뚫어 보게 하고 이슬람이 나타내는 제 원칙을 인식하게 하자는 것뿐이다. 일단 처음에 생긴 관심을 계속 발전시키면 스스로 보다 깊이 있는 지식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반구의 무슬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젊은 무슬림들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한다. 주위의 상황이 전부 이슬람에 관한 한 불리하다. 라디오논평, TV쇼, 잡지기사, 영화 그리고 심지어 학교 교과서까지 모두가 이슬람을 잘못 전하고 있는 바, 여기에 반드시 악의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극성스러운 단체들은 무슬림이 이 교파나 혹은 저 종파로 개종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이런 무슬림들의 상황을 이용하려고 든다. 한편, 살다 보면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올바른 신앙의 길로부터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유혹을 많이 받게 된다. 이는 극히 해로운 것이다. 특히 젊은 무슬림들의 경우에는 더욱 해로우며, 세계의 이쪽에서 오해받고 있는 종교인 이슬람의 경우에는 더 한층 해롭다. 일부 무슬림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종교적으로 인도하고 가르치려고 애쓰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제한된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이와 같이 주위에서 자꾸 압력을 가해 오는데 어떻게 그것이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사정은 어떤가? 이처럼 어려운 상황이 가져 온 결과는 무엇인가? 사태가 암담해 보이기는 하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아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일부 무슬림들은 주위에서 가해 오는 심한 압력에 무고한 피해를 입어 무관심해지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들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거나 자기 주위를 의심한다. 결국 이들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 아무런 가치 있는 기여도 할 수 없게 되며 그 사회로부터 아무런 실속 있는 혜택도 받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유행에 뒤지지 않고 남의 마음에 들고 싶은 나머지 사회의 조류에 휩쓸려 버리는 무슬림들도 있다. 이들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기여할 수 없거니와 그로 하여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실효성 있는 종교적 도덕이라는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관심해지고 위축되거나 해이해진 무슬림 말고도, 어떻게 해봐도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무슬림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의 경우, 어떤 종교 집단의 고도로 능률적인 조직 같은 것이나 세속적인 종교 단체가 사회에 널리 유포시킨 것에 빠져 있는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 그저 가입하고 있을 뿐 실상은 주변인들에 불과하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고독한 군중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들로도 볼 수 있다. 이 혹은 저 특수 집단의 신념이 철저히 주입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가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타집단에 가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슬람적 유산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데다가 비무슬림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무슬림으로 나서서 버텨 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용기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런 "무슬림"들이 종교에 진정 어린 관심을 가진다면 이슬람의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야말로 그 종교적 발전과 인간적 열망의 수준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인류의 정신적·도덕적 복지에 진정한 관심이 있다면, 이슬람의 체제 내에서 가장 커다란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집단에 가입해 봐야 항상 그 관심이 피상적(皮相的)일 수밖에 없으며 더 좋은 것을 찾다가 보다 못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이들은 같은 무슬림들과의 정신적 유대를 잃고 새로 들어간 집단의 주변에서 맴도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황 전체의 최종적인 결과를 분석해 보면 그 결과가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도 애처롭고 유해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슬림 강령에 의해 해가 되는 것은 다른 모든 훌륭한 강령에 대해서는 더 큰 해가 된다. 진정한 무슬림이야말로 책임질 줄 아는 시민 정신과 세계의 평화·상호 이해와 인류의 형제애, 양심의 자유와 인간 존엄성 보존의 실현에 가장 보람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원칙들은 이슬람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바로 이런 원칙들이 무슬림에게 부과, 위임되어 있다. 만일 이런 원칙들을 지킨다고 하는 무슬림들이 방황하거나 무관심해져 버리면 인류 일반이 그의 가치 있는 기여를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니 이는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다.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성서(聖書)인 영광의 꾸란이 최고의 계시서이며 종교적 진리의 기준이라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이들도 또한 이슬람이 영원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재확인하고 과거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하여 인간이 각계 각층에서 건설적인 창조 활동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무슬림들이 나머지 인류와 다르게 혹은 그들보다 우월하게 선별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슬람을 강요하려 하지 않으며 인류를 열등 계급과 우수 계급으로 나누려 하지도 않는다. 어떤 민족은 은총을 받고 어떤 민족은 저주를 받는다는 개념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선민이니 이방인이니 하는 교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하고 필요 불가결한 공헌을 할 임무가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무슬림들에게는 무관심해지거나 배타적이 되거나 오만을 부릴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실생활의 모든 면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신분과 교의(敎義)와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팔을 내밀어 환대하는 것이 그들의 엄숙한 의무이다. 이들이 이슬람을 실천하고 친절하고 진정 어린 이슬람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과 화합해야만이 비로소 이들이 베풀 수 있는 선행과 바칠 수 있는 봉사가 그 의의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상황에 비추어 이슬람을 참신하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무슬림들을 맹목적인 광신자나 편협한 사람들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이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무슬림들과 그에 상당하는 사람들에게 이슬람의 진리를 재인식시키고 세계에 대한 영적인 통찰력과 인간 조건에 대한 윤리적 접근법을 갖게 해 주고 싶을 따름이다. 이러한 희망이 이루어진다면 무슬림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네 나라의 책임감 있는 시민, 인류의 존경할 만한 일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현대 세계에서 이슬람이 처한 미래에 대한 전망을 비관적으로 그려본 것일까? 아니면 무슬림들이 겪고 있는 절망감과 무력감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한 것일까? 혹은 무슬림들이 신세계에서 종교적 싸움에 패할 것을 예상하고 그 결과를 반성해 볼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관론과 절망감은 이슬람의 정신에 위배되며 무력감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 이슬람의 미래가 곧 인류의 미래이며 인류에게 미래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나는 있다고 믿는다-이슬람의 앞에도 위대하고 밝은 미래가 가로 놓여 있다. 비록 그 진전이 더디어 보이기는 하지만 무슬림들은 지금 전개하고 있는 종교적 싸움에서 패배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건 무슬림들이 이 종교적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신세계의 무슬림들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을 실감 있게 그려내는데 본 머리말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부모와 자녀에게 다 같이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과 손실을 방지해야 한다는 경고를 해 주자는 것이다. 또 인류의 영적인 복지에 진정한 관심을 가진 사람 모두로 하여금, 정신을 바짝 차려 인류와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알라의 배려에 우리의 무슬림 형제들을 맡기는 바이다. 그 분을 무한히 신뢰하기에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직 힘을 다하여 개혁(改革)을 바랄 뿐이니 나의 (과업의)성공은 오직 하나님께서 비롯됨이라. 그 분을 나는 신뢰하며 그 분을 나는 의지하노라."(성꾸란 11:88) 함두다 압달라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