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신앙Ⅱ

역사적 사실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나간 시간에 일어났고 끝이난 것이기에 시간의 대체나 사건 발생의 변화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처음 것과 처음 것을 대체한 것으로 판명되는 두 번째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오랜 기간을 통하여 변화하고 바뀌었음에 확실하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이 사도의 시기에 계시됨으로 하여 정확하게 계시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성서들과 계시문들에 포함된 진실은 하나님께 다 보존되어 있는 것이므로 그분은 계시하시는 시대에 적절한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계시하시게 된다. 꾸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성서들과 계시문들은 의미와 원칙에 있어 꾸란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꾸란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러한 것들을 모아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꾸란은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가 확실하며 계시가 시작되고 끝날때까지 정확하게 전달되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늘날 우리 앞에 존재하는 꾸란은 마지막 선지자이자 사도이신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꾸란과 말과 의미와 문자에 있어 똑같은 것이다. 어떠한 사람도 이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은 꾸란을 변화와 왜곡으로부터 지켜주셨다.

왜냐하면 꾸란은 마지막 성서이며 모든 것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꾸란 이후에는 성서가 없는 것이다. 꾸란이전에 있었던 모든 성서들과 계시문들은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민족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일반화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류는 시작이래로 모든 것에 있어 원시적이었다. 지식은 한정되었고 읽고 쓸줄 아는 사람은 적었고 무지한 사람은 많았다. 귀족들과 왕들이 그들을 통치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들을 신성시하였고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고 빵조각을 얻을려고 또는 그들의 압제와 힘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만족을 얻는일에 순종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인간들 사이에는 차이나 구별이 없이 모두 공평하다는 것을 알리셨고 인간의 종들로부터 인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종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위해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이러한 원칙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자들과 압제적인 왕들의 분위기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글을 쓰고 읽는 사람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지배계층 사람들이었고 일반인들은 지식의 습득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난하고 약한 일반계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씀에 귀기울지 않았다. 사도들의 말씀에 귀기울리는 자들은 그 수가 매우 적었다. 따라서 꾸란 이전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계시되었던 성서들과 계시문들은 충분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계시될 때의 시기에 힘과 권력을 가진자들은 귀족들과 왕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성서를 남용하여 왜곡  

하고 변화시켰고, 손실을 입혀 성서는 불태워지고 여러차례 파괴되었다.

그리고 원본이 사라지고 그 시대의 귀족들과 왕과 성직자들의 분위기에 따라 재 편집되었다. 그것이 오늘 존재하는 것이며 많은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또한 번역을 통해 최초의 의미들이 변화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으로부터 벗어났다. 왜냐하면 번역은 인간 번역가들의 말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사이에는 큰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성서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계시된 사도의 말씀과 그분과 함께한 교우들의 말이 서로 섞이어서 성서의 대부분이 어떤 특정한 민족의 자손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야기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한 것은 마치 이스라엘 자손의 행적을 위한 역사서 처럼되어 가장 고귀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 그들만을 창조하셨고 그분은 단지 그들의 주님이며 그들이외의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혀로써 그들은 이러한 성서들의 원본은 잃어버렸음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아부 하싼 나다위 박사는 인도에서 발행되는 이슬람의 부흥이라는 잡지의 1995년 4월의 3호 10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꾸란에 앞서서 계시된 성서들은 항상 왜곡과 변화와 변질로써 노출되었고 손실과 분산과 숨김이 있어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대해 보존과 영속의 약속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 이것은 이러한 계시문을 따르는 사람들과 계시를 받았던 사람들도 고대의 계시문들이 늘 공격과 화재와 약탈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학문적 역사적 사실이다. 유태역사가들도 그러한 일이 3차례 있었음에 동의하고 있다.

  1 - 바벨왕인 바크탄사르(Nebuchad Nezzar)가 BC 586년에 유대인들을 공격했을 때 그는 예루살렘을 불태웠으며, 그곳에는 솔로몬이 모세와 하론에게 계시된 구약의 경판들을 보관하였었다. 바벨왕은 나머지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묶어서 바벨로 데리고 갔고 거기에서 그들은 50년 동안이나 머물렀다. 선지자 아지르는 구약의 처음의 다섯 계시문을 암송자로 부터 다시 한번 받아 적었고 역사적 정리로써 사건들과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였으며 그런 후에 거기에다 다른 성서들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에 그것을 붙여놓았다.

2. 로마왕인 티투스(Titus)가 70년 9월 7일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솔로몬 사원과 함께 도시를 불태워 잿가루와 부스러기로 변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는 성서들을 로마의 수도로 가져가 버렸고 유태인들을 쫓아 버렸다.

3. 그리스 안따키야왕 안뚜쿠스4세(Antiochus)가 168년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서들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낭송에 대해 금지하였고 유대 전통과 종교적 의식을 금지하였다. 후에 유대인 무까비가 이 계시문들을 모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는 그것에 고대 성서들을 첨부하였다.

신약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으로 부터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처음으로 계시되었던 성서의 원본은 잃어버렸고 신약은 지금까지도 공공연한 변화와 변질이 자행되고 있다. 런던 타임지는 1995년 9월1일자 신문에서 ‘성서의 정확한 사본 ’의 출판에 대해 글을 실었다. 정치적 사본이라는 제목으로 그것을 번역한 무함마드 아크람 나다위교수는 1995년 9월 16일 수요일자 인도 라크후노에서 발간되는 라

이드지5,6호에서 런던 타임지의 기사를 번역하여 게재하였다. 그 기사에서 런던 타임지는 이 정치적 출판이 수정과 변화가 있었으며 유태인에 해가되는 표현들이 삭제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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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당신들이 꾸란 이전에 있었던 고대 성서들에 대해 내가 썼던 것을 보고 내가 그 성서들의 사도들을 믿지 않거나 성서들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실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믿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모든 성서들을 어떠한 의심이나 주저 없이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나 조금이라도 하나님에 관계된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실제로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하는 인간의 말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말은 피조물의 말이며 피조물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인간의 말을 믿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거짓이며 기만이며 진실에 위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그분의 위대성에 일치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금 존재하는 이러한 성서들은 인간의 말이며 그것들은 인간의 언어로 말되어진 것들이다. 그들은 성서의 문자들을 만들었고 성서의 문장들을 만들었으며 그것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문자와 문장과 정리와 특징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꾸란은 실제적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함마드의 말이 아니며 무함마드 교우들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며 사도 무함마드가 그것을 가브리엘로부터 듣고 그의 교우들에게 옮겼고 사도의 교우들은 사도로부터 듣고서 사도의 감독 하에 계시될 때 바로 그것을 문장으로 받아 적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꾸란을 읽을 때 실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문자나 절로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다.

  (1) 성서 역사의 원전을 보라. 이러한 사건들은 나흐미야 페이지와 무까빈 페이지에서 지적되고 있다. - 유대인 백과 사전 9권 589,590페이지 Valentine, S, Volume Jewish Encyclopaedia p92-93  

선지자와 예언자  

선지자와 예언자,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들 가운데 선택하신 사람들이며 그들은 완전한 인간의 특징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어느누구도 그 수를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니싸아장 16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대에게 이미 언급한 선지자들이 있고 그대에게 언급하지 아니한 선지자들이 있도다. 》 그들의 임무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들로 하여금 유일신 하나님을 믿도록 선교하며 높은 도덕성을 가지도록 선교하며 그들사이에 좋은 관계를 가지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선지자이자 사도인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과 예수, 그리고 마지막 사도이자 선지자인 무함마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아담의 자손으로 창조된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셨고 그의 사도

무함마드의 혀를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명백히 하셨다. 꾸란의 카흐프장 110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 일러 가로되, “ 실로 나는 너희들과 같은 한 인간이나 계시가 내게 내렸을 뿐이거늘 ”…》

따라서 모든 사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와 같은 특징과 몸을 가진 인간들이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어떻게 음식을 먹고 시장을 걸어 다니고 그들과 같은 특징과 몸을 가진 사람에게 계시가 내릴까라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놀람과 궁금증을 표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의 혀로써 이야기하게끔 하셨다. 이스라장 94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들이 말하길 “ 하나님이 인간을 선지자로 보냈단 말이뇨?》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나장 2절에서 대답하셨다. 《 우리(하나님)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계시를 내리어 백성들에게 경고하도록 한 것이 그들을 놀라게 하였단 말이요? 믿는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 하나님께서 이므란장 79절에서 말씀하셨다.

《 하나님으로부터 그 성서의 지혜와 예언자의 직분을 부여받은 인간이 백성들에게 말하여, “ 하나님 대신 나를 경배하라 ” 하지 아니하고 …》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시할 한 인간을 선택하신 것이며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인간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장 11절에서 말씀하셨다.

《 이에 답하여 선지자들이 말하였더라. “ 우리는 너희와 같은 인간에 불과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복가운데 그분의 뜻대로 은혜를 베푸시니라.”》 또한 푸르깐장 20절에서도 말씀하셨다. 《 그대 이전에 우리(하나님)가 보냈던 선지자들도 모두가 음식을 먹고 시장을 걸었으며…》 즉 그들은 음식을 먹고 인간들이 고통받는것에 그들도 고통을 받고 죽음이 그들에게도 오며 그들중 어느 누구도 영생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어떠한 하나님의 특성중 어느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므란장 144절에서 말씀하셨다. 《 무함마드는 한 선지자에 불과하며 그이전 선지자들도 세상을 떠났도다. 만일 그가 죽거나 살해 당한다면 너희는 돌아설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의 마지막 사도 무함마드에 대해서 아흐잡장 40절에서 말씀하셨다.

《 무함마드는 너희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며 하나님의 선지자이자 최후의 예언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인류에게 그들이 명하고 가르치는 것을 복종하도록 명하셨다.

하나님은 파티르장 24절에서 《 실로 어떠한 백성 중에서도 경고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고, 요나장 47절에서 《 각 움마(공동체)에 각 선지자가 보내어져…》라 말씀하셨다. 또한 뭄타히나장 6절에서는 《 실로 너희를 위한 교훈이 그들안에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다.  

선지자와 사도의 차이  

실로 선지자들은 충실한 하나님의 종들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들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적인 계시를 내리셨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이전시대와 자기와 동시대의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을 부여 받았다. 그래서 선지자는 사도의 추종자이며 그는 사도와 같은 시대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선지자 하룬이 하나님의 사도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지자인 하룬은 하나님의 사도 모세의 추종자이자 조력가가 되었으며 사도의 명령과 그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사도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계시를 받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성서와 계시문들을 계시하여 인간들에게 알리게 하신다. 따라서 모든 사도는 선지자이지만 모든 선지자는 사도가 아니다. 사도는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아 인간에게 전달하는 분이다. 전달자의 일을 맡은 사람이나 예언의 일을 맡은 사람이나 또는 선교의 일을 맡은 어느 인간이나 백성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메신저의 일을 맡은 어느 인간에 대해 말하면 그는 합법적인 용어에 따른 사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우편 배달부 또는 인간으로부터 그와같은 인간의 편지를 전달하는 일을 맡은 전령사라 불리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는 절대 하나님의 사도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메신저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사도인 무함마드의 메신저들인 왕들과 군주들이 있으며 인간에게 예수의 가르침의 임무를 맡은 예수님의 교우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그분의 계시를 전달받는 일을 맡기며 가브리엘 천사가 성령으로 그에게 계시하는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사도라는 말이 어느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는다.

영혼과 정신  

  하나님이 꾸란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두 번째 삶인 내세에 대한 연구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인간의 삶에 있어 중요한 두 요소인 영혼과 정신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만 하겠다.

영혼  

영혼과 정신은 인간의 현세적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며 그 각 요소들의 몇몇 특징들을 아는 것은 사탄이 인간을 유혹하기위해 행동하는 방법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각요소들의 본질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지식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며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그것을 자세하고 전반적으로 명백히 해놓으셨기 때문이다. 많은 이슬람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영혼의 본질을 알기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한 색, 냄새, 형태 등 어느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에 대한 인식을 하지못해 당황하였다. 우리는 실제로 만질수 있는 물질을 제외하고는 인식할수 없는 물질적 존재이며 보고 인식할 방법이 없는 모든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느끼고 그것의 존재를 믿을 뿐이며 그것은 이상적, 인식적, 느낌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느낌과 인식은 그것들이 이상적, 의미적 세계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사도인 무함마드에게 영혼에 대해 질문했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그의 정신으로부터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장 85절에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셨다. 《 그들이 영혼에 관하여 그대에게 물으리라. 일러 가로되, “ 영혼은 나의 주님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며 너희가 아는 것은 미량에 불과하니라.”》

질문은 영혼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며 하나님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에 대한 지식 중 필요한 것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있어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야씬장 82절에서 말씀하셨다. 《 실로 그분(하나님)께서 무엇에 뜻을 두시고 “ 있어라 ”명령하시면 그대로 되느니라.》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원조를 창조하셔서 그 인간에게 그분의 영혼을 불어넣으셨다고 알려주셨다. 히즈르장 29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 내가 형상을 만들어 그안에 나의 영혼을 불어 넣을 때…》 그리고 샴스장 7-8절에서 《 인간과 그것을 창조한 주님을 두고 맹세하사,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도록 하셨나니》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셨고 아담을 흙과 물로 (진흙)형상화 하셨다. 싸즈다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분(하나님)은 그 분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가장 조화있게 두셨으며 인간을 흙에서 창조하기 시작하셨느니라.》 이것은 최초 창조의 시작을 나타낸것이며 그러신 후에 살아있는 완전한 인간을 만드시기 위해 최초 창조물에 선과 느낌과 시각을 가지고있는 그분의 영혼을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께서 싸즈다장 9절에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청각과 시각과 심장을 주셨도다.

그러나 너희는 감사하는 마음이 크지 못하더라》 따라서 인간은 3개의 주요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요소는 바로 영혼과 정신과 물질이다.

그것 모두는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영혼에게는 그것을 나타낼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느낌으로 부터이지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모든 무생물을 느끼고 인식하고 움직임이 있는 살아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하나님이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난자와 정자의 만남없이 인간을 창조하신 일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정액을 점차적으로 응혈로 변화시키시고 그런후에 4달동안 영혼이 없는 식물이 성장하는 것처럼 응혈을 작은 태아로 성장시키신다. 성장과 형성으로써 인간의 구조가 완성된 후에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에게 영혼이 생기게되며 그래서 인간의 태아가 되어 그의 어머니 배속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로한 방법으로 모든 인간은 창조되었다.

아담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이 진흙의 작은 물질에 영혼을 불어 넣으셔서 완전한 생명체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남자의 정액없이 마리아의 자궁으로부터 예수를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성장하였는데 그것은 일반적 인간과는 다른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므란장 59절에서 말씀하셨다. 《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랬듯이 예수에게도 다를바가 없도다. 하나님은 흙으로 그를 빚어 그에게 말씀 하셨다. “ 있어라, 그리하여 그가 있었느니라. ”》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창조에 관한 것을 니싸아장 171절에서 말씀하셨다. 《마리아에게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주님의 영혼이었느니라. 》 따라서 창조에 있어 형태는 영혼이었으며 하나님은 그러한 무생물을 완전한 인간의 삶으로 변화시키도록 명하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일반화되지 않은 남자와 여자와의 결합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영혼은 아담과 하와와 예수 각자에게 불어 넣으신 것이며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시는 영혼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흘장 2절에서 말씀하셨다.

《 천사들에게 영혼으로서 그 분이 원하시는 그 분의 선지자들에게 명령을 내리사…》 그 말씀은 모든 창조물에 있어 영혼은 하나라는 것을 명백히 하신것이며 모든 것을 존재케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인 “ 있어라”이다. 기독교는 창조에 대한 명령을 설명할 때 “ 있어라”를 하나님으로 설명함으로써 갈라져 나간다. 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그리스도는 인간의 형상을 한 하나님이며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영정함에 환영하기위해 한 일이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실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하나님으로 간주하며 그분이 마리아의 자궁에서 9개월동안 인간의 구조를 형성하고 준비하기 위하여 거하셨다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고 여기며, 그분은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고통 받으시고 인간의 조상인 아담이 저질렀던 원죄를 대속하기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 교리이며, 그것은 많은 우상숭배 종교들이 이야기하는 속죄 이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이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성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것과 같지 않으시며 그분의 속성은 유일하게 그분만이 소유하시며 그분은 신성과 신격을 가지신 한 분이시며 신성에 있어 누구와도 비유되지 않는 한분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써 예수를 창조하셨고 그를 그의 사도로 만드셨으며, 경배로써 그 분의 유일성을 선교하도록 하셨고, 그 분의 유일성을 어느 누구와도 비유하지 않도록 하셨다. 아담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죄를 저질렀고 곧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다. 그러한 죄는 하나님이 그의 회개를 받아들이심으로 끝이 난 것이다. 아담의 자손들은 완전한 믿음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왜 그가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까 ?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시기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절대 묻지 않으신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

  하나님께서 샴스장 7절에서 《 정신과 그것을 창조한 주님을 두고 맹세하며 》 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정신은 인간의 원함, 바람, 희망을 나타내는 형태이다. 그것은 진행하는 인식의 특징이며 물질적 신체와 결합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다. 정신은 물질적 신체가 아니며 인식으로부터 정신이 형성되며 그 정신으로서 물질적 신체가 즐거워하며 느끼며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은 영혼의 자취들 중의 하나이며 영혼은 정신에게 그 특징들을 수행하기 위한 힘을 부여했다. 따라서 정신은 영혼과 분리되지않고 그것과 결합하여 하나가 된다. 근본적으로 정신은 영혼이 아니다. 주마르장 42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 죽음에 이른 인간의 정신을 앗아가며 수면의 상태로하여 생명을 앗아가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기한이된 정신을 앗아가며…》 여기서의 죽음은 앗아가는 것과 취하는 것이며 보내는 것은 떠나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정신과 육체사이의 차이점이 명백히 나타나고 있으며 영혼과 정신사이의 차이점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정신은 완전한 믿음의 본성에서 벗어난다. 즉 원하고 바라는 느낌과 사탄의 팽창에 대한 분쟁에서도 벗어난다. 만일 정신을 제압해버리면 정신으로부터 아담의 자손들에게 위협을 주었던 적이 없게된다. 왜냐하면 정신은 현세만을 원하며 현세만을 좋아하고, 육체속에서 물질과 쾌락과 즐거움의 세계에 근접하며 지배와 통치력을 좋아하게 되고 통치와 영향력을 위해 다른 것을 이용한다.

만일 정신이 이러한 병적인 상태와 같은 것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영혼에 영향을 주게되며 길을 잃고 길 없는 곳이나 낭떠러지 같은 곳을 달리다가 영혼은 정신과 함께 지도자적 위치에서 떨어지게 되고 영혼의 관대한 특징을 잃게되며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슈라장 45절에서 말씀하셨다.

《 실로 손실자들은 부활의 날 그들의 정신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을 상실한자들이라 》 땅위에서 그들의 거만함과 건방짐은 그들의 손실의 이유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푸르깐장 21절에서도 말씀하셨다. 《 그들은 스스로 교만해하고 불손하도다 》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안카부트장 40절에서 말씀하셨다. 《 이것은 곧 하나님 스스로가 그들을 욕되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 스스로 욕되게 한 것 뿐이라. 》 그래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욕됨으로 인해 고통과 징벌을 받아야만한다. 영혼은 비천한 정신에 따라 관대한 특징이 없어질때까지 점차적으로 타락에 이르게 된다. 영혼은 진실속에 있으며 고귀한 특징속에 있는 것이다. 만일 정신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경배함으로써 하늘나라 왕국인 천사의 세계와 이상의 세계까지 그의 몸을 고귀하게 한다면 정신에게는 고귀한 인간성과 완전함으로 안락한 위치가 있게 될것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만족을 얻어 만족스럽고 안정된 정신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파즈르장 27-30절에서 말씀하셨다. 《 그러나 의로운 영혼들에게는 “ 너희 영혼들아, 너희는 완전한 휴식과 기쁨속에 있으리라” 라는 말씀이 있을 것이라 》 현실의 삶에 있어 행위와 행동에 따라 영원한 내세에서 그의 운명과 위치는 일치 될 것이다. 그리고 영혼의 첫 번째 머물게 되는 곳은 장벽의 세계에서이다.    

    내세(장벽 - 무덤 - 천국과 지옥 - 판결과 숙명 )

장벽의 세계

1 - 장벽의 삶, 죽음으로서 시작되는 것 - 무덤, 축복 과 징벌

2 - 나팔소리

부활과 소생 그리고 심판의 날에 소집

3 - 심판의 날

4 - 내세와 안정된 삶  

천국, 지옥  

우리가 알고 믿어야하는 이러한 요소들은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식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어떠한 논쟁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내세에서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유일신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믿는 모든 신자들은 그것을 어떠한 의심이나 주저없이 확실하게 믿고 있으며 우리 주 하나님께 내세에서 우리가 승리 할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장벽의 세계  

1. 장벽의 세계와 영혼의 위치 : 장벽의 세계에 대한 언어, 법률적 정의  

* 언어적 정의 : 언어학자들은 장벽이라는 말을 어떤 두 개 사이의 낀 벽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것을 죽은 후 부활까지의 기간으로 부르고 있다. 와씨뜨사전 49페이지에 이와 같이 정의되고 있다.

죽은 사람은 장벽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그것은 지리학자들에게 있어 두 바다 사이에 둘러싸인 땅조각이다 > 또한 압둘라 싸라즈 교수는 그의 책 ‘ 내세들에 대한 믿음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 장벽 그것은 어떤 두 개 사이의 분리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영원한 극단이 없다. 그것은 태양과 그림자 사이 그리고 민물과 바닷물 사이의 분리선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라흐만장 19 -20절에서 말씀하셨다. 《 그분(하나님)께서 두 바다를 자유롭게 흐르게 하고 만나게하되 둘 사이에 장벽을 두니 그들 각자는 침범하지 아니하도다.》

*법률적 정의: 하나님은 성서인 꾸란 무으민장 99-100절에서 장벽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죽음이 그들에게 이를 때 “주여! 저를 다시 돌려보내 주소서. 제가 남겨둔 일에 선행을 행할수 있나이다”라고 말하나 그러나 결코 할수 없나니 그것은 그가 지껄이는 말에 불과하며 그들 앞에는 부활할 그날 까지 장벽이 있을 뿐이라.》 이슬람 법학자들은 장벽이란 용어에 대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존재하는 기간이라고 말한다. 이븐 까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장벽은 현세와 내세사이에 있으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현세와 내세를 보며, 장벽은 무덤의 고통과 축복이라 불리며 그곳에는 정원과 구덩이가 있게 된다. >

그곳은 의미의 대표적 세계이다. 거기에는 영혼들이 확실하게 나타나며, 영혼은 적절한 형태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곳은 모든 것의 예들을 모아놓은 본보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물질적 세계로 그곳에는 모든 물질의 형태와 구조가 나타나며, 우리가 이 현세에서 죽음의 장벽으로 세계를 옮겨가면 모든 물질의 형태와 구조는 사라지고 우리 시야와 우리의 물질적 삶에 숨어 있었던 진실이 나타나며, 진실은 우리의 생각과 이 물질적 삶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과 의미적 예의 형태로써 드러나게 된다.

이븐 까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장벽의 세계는 모든 것의 예들을 모아놓은 느낌과 의미와 형태적인 세계이다 >

하나님께서는 무으민장 100절의 말씀으로서 그분의 말씀을 명확히 하셨다. 《 그들 앞에는 부활할 그 날까지 장벽이 있을 뿐이라 》 실로 인간은 죽음으로 현세와의 관계가 끊어지며 그의 물질적 몸은 그의 최초의 물질로 돌아가기 위해 땅 속의 구멍으로 옮겨진다. 이러한 구멍을 무덤이라 부른다. 영혼이 몸과 분리되는 순간부터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이며 죽음의 순간부터 부활의 시간까지의 이 기간을 장벽의 세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무덤에 있는 시간 부터 부활의 시간까지의 기간이다. 그 시간에는 이븐 까임이 언급했듯이 고통과 축복이 있다. 인간은 그 장벽의 세계에서 현세에서 그가 가장 좋아한 사람과 함께 있게 되는데 정직한 자들과 함께한 자는 그들과 함께모여 장벽의 기간을 함께 보내며, 불신자들을 좋아한 사람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의 은총을 거부하는 자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

< 인간은 그가 좋아한 사람과 함께 모인다 > 그리고 또한 말씀하시길 : < 친구의 종교에 속한 사람은 너희들중 누군가가 친구로 대하게 됨을 보개 될 것이다. > 친구를 믿는 것은 필요로 하는 의무적인 일이다.

친구를 불신하는 자는 꾸란을 불신하는 자이며 친구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자이며 하나님께 거짓말 하는자는 불신자이며 불신자는 고통과 징벌을 얻게 될 뿐이다.  

영혼의 거처

피조물인 영혼을 잃어버리면 모든 그의 감각과 움직임이 멈추게 되어 딱딱한 조각으로 되어버린다. 영혼은 물질적 신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현세에서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렀을 때 영혼은 신체와 분리되어 장벽의 세계에 거하게 된다. 즉 운명이 정해진 시간이 되었을 때 영혼은 나가서 장벽의 세계에서 그와 유사한 것들과 함께 있게 된다. 그 장벽의 세계에는 영혼들이 적절한 감각적 형태로 나타나며 죽음 이후에 그와 유사한 것들을 만난다.

쌀리흐 마리는 말했다 : ( 영혼들은 죽었을 때 서로 만난다. 그래서 죽은 영혼들은 몸으로부터 벗어난 영혼에게 말할 것이다. 너가 거주했던 곳은 어떠했으며 좋은 몸속에서 있었느냐 아니면 사악한 몸속에 있었느냐고 ) 이븐 까임은 싸이드 빈 마십의 말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

< 사람이 죽으면 그의 아버지는 마치 숨어 있던 사람을 만나듯이 그를 만난다 > 또한 아비드 빈 아마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사람이 죽으면 영혼들은 그를 만나 그에게 여행가들이 질문하듯이 그에게 많은 것을 물어본다. 즉 누구는 무엇을 했고 누구는 무엇을 했는가를 물어본다. 그러면 그가 그는 죽었고 그들에게 오지 않았느냐고 말하면 그들은 그는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갔다라고 말한다. >

영혼들의 만남과 그들의 상호방문은 이슬람 학자들이 전하는 쑨나에 확실히 나와 있다. 이븐 까임이 말하기를 : < 살아있는 자의 영혼과 죽은자의 영혼이 만나는 것은 진실한 꿈의 일종이다. 꿈은 사람에게 있어 인지되는 종류이며 그것은 잠자는 사람의 영혼이 가족, 친척, 친구 등의 죽은 영혼들과 만나는 것이다. >

영혼들은 듣고 본다. 그러한 사실은 사도께서 명확히 밝히셨다. 사도께서 무덤을 지나갈 때 그분은 무덤들에게 인사를 하곤하셨다. 부카리와 무슬림의 하디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 하나님의 종의 무덤이 있다면 사도는 그의 교우들과 그들을 부리는 소리를 듣기위해 그에게로 간다. 두 천사가 그 종의 무덤에게로와 그를 앉히고서 그에게 말한다 : 너는 무함마드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

그러면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가 하나님의 종이며 그분의 사도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도는 말씀하기를 나는 너희 자리가 지옥인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자리를 천국의 자리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 하디쓰의 이 말씀은 살아있는 자들의 기도에 유용함을 줄 것이다. 아담의 자손이 죽었을 때 단 3가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행위는 끊긴다. 그 3가지는 바로 자선과 학식과 자식이다.

장벽의 세계에서 영혼들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1. 이전에 행한 나쁜 행위 때문에 고통과 징벌로서 예정된 고통받는 영혼들  

2. 현세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선함을 행한 결과로써 행복감에 젖어있는 자유롭고 축복받은 영혼들

죽 음  

하나님은 꾸란의 안카부트장 57절에서 말씀하셨다. 《 모든 인간은 죽느니라. 그리하여 우리(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느니라 》 죽음은 인간이 내세로 들어가는 첫 순간이다. 그리고 죽음은 현세의 마지막 순간이며 죽음으로써 현세상이 끝나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죽음에 대해 피할길이 없으며 어떠한 피조물도 영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라흐만장 26-27절에서 말씀하셨다.

《 대지 위의 모든 것은 멸망하되 그대 주님은 영

하사 권능과 영광으로 충만하시나니》

죽음은 사실이며 죽음으로써 신실한 신자는 현세의 고통과 고난으로부터 휴식이 있으며 그의 원래의 땅인 하나님이 믿는 종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천국으로 되돌아감으로 행복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푸실라트장 30절에서 말씀하셨다. 《 그러나 “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이시라 ”고 말하며 옳은 길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천사들이